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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정기성 해석

그런데 도시화가 이루어졌더라도 전래의 장(장날)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장은 발전하여 마침내 어엿한 상설시장 으로 전신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영향을 미쳤던 주변의 주 민에 대해 제반 생산 관계가 근대화되기까지에는 상설화된 시장이 라 할지라도 정기시장으로서의 기능은 당분간 포기되지 않는다. 예 컨대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전과 더불어 정기시장이 분명 상설시장 으로 바뀐 곳이라 할지라도 구 관습에 젖어 있는 근방의 주민과 농 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왕년의 옛 장날에 맞추어 예전에 장이 섰 던 상가 주변에 어김없이 몰려나와 그날은 상설시장이 더욱 혼잡해 지는 것을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예; 광주 양동시장, 순천 북 문시장). 이와 같이 정기시장의 경제적 필요성이 삭감되고 난 다음 에도 한동안 그 정기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시장소재지는 도시화 됐을지라도 그 시장을 이용하던 상당수 근방의 주민이 아직도 영세 (零細)한 생산 및 소비 규모와 옛 문화, 사회관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개시의 정기성(periodicity)은 여러 각도에서 그 필요타당성과 합리성이 증명된다.7

첫째, 상인 및 공장(수공업적 가내공업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시장의 정기성은 이들 영업의 이동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장과 장을 찾아다니는 이동상인(보부상(褓負商))의 원형(archetype) 은 이 부락 저 부락을 찾아다니던 행상이다. 이동상인 말고도 풍각 쟁이, 악극단, 서커스단, 신발․냄비 또는 농기구 수선공, 이발사, 점 쟁이, 대서사(代書士) 등도 장을 따라 이동한다.

그러면 왜 이들은 한 시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동하는가? 그것은 물을 것도 없이 한 개의 시장권으로부터의 총수요가 상설점포를 지 탱하기에 충분한 이윤을 확보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 러 개의 시장을 대상으로 팔고자 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휴대하고 소비자를 찾아 순회 방문함으로써 수요를 확대할 필요가 절실해진 다. 그 길만이 적정 판매수준을 유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 하여 시장 (開市))의 정기성(定期性)은 이동 상인으로 하여금 정해진 날[市日]에 정해진 장들을 순회함으로써 수요를 무난히 충족시키게 한다. 따라서 연관이 깊은 몇 개 시장들의 장날[市日]이 조화롭게 잘 짜여 있으면 이동상인은 그에 맞춰 골고루 소비자를 찾아 순회 이동 할 수 있게 된다.

가내공업자이든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이건 또는 달걀이나 기타 농산물을 장에 내다 파는 농부의 아내이건 장날이 며칠 걸려 서기 때문에 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고 그것을 판매일에 맞출 수

7 중국의 전통사회에서의 정기시일의 성립에 대하여는 스키너(Skinner 1964)를, 한국에 대한 토론은 스타인(Stine 1962, 68-78)을 참조할 것.

있어서 시장의 정기성은 소생산자들에게는 아주 알맞은 제도이다.

바꿔 말해 생산규모의 영세성과 전근대성은 매일 시장에 내다 팔 만 큼 상품생산의 대량화가 요원하기 때문에 며칠 걸쳐 시장에 나간다.

그 다음 소비자의 입장이 되어 보자. 특히 근검절약과 자급자족이 그 사회의 미덕이고 일반적으로 빈곤하며 전통적인 소비관습에 젖 어 있는 생계농가에 있어서는 도대체 매일 장을 볼(shopping) 만한 수요가 없기 때문에 상설장이 섰을 경우 그 시장을 상설로 지탱해야 할 시장인구는 확대한 지역의 수많은 농가를 포함해야 한다. 그런 경우 그 시장권 변두리의 소비자는 대부분 하루 안에 시장을 왕복할 거리 밖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은 단점을 보완하는 방법은 한 곳에 상설시장을 설치하는 대신 그 지역의 전략적인 교통중심지 여러 곳 에, 예컨대 5일 간격의 정기시장을 4~5개소 개설하면 여러 부락 소 비자들을 각각 1일 왕복거리에 포함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전체적으 로 소비자에게 교통상의 불편을 초래함이 없이 그 지역 전체의 수요 를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인구밀도가 낮거나 개별수요가 크지 않은 지역에 있어서는 매일 시장 대신 여러 곳에 정기시장이 개설되어 그 지역 모든 소비자를 포용할 수 있게 된다. 설사 인구가 조밀해 정기시장이 상설시장화될 만큼 전체 수요가 크더라도 생계적 수준의 소비자들에게 있어서는 상설시장이 정기시장보다도 반드시 더 매력적일 수는 없다.

그들은 어차피 며칠 걸려야 겨우 한두 번 장을 보러 갈 정도밖에 시장 수요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앞에서 살펴본 바 와 같이 정기시장이 상설화되더라도 예전의 장날에는 그 상설시장 에 사람이 더욱 붐비어 왕시의 정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정기성은 뭐니 뭐니 해도 교통조건에 의해서 그 존 재성이 더욱 자세히 설명될 것 같다. 아무리 생산자 및 소비자의 수

요공급 규모가 긴급하고 많아서 매일 장을 볼 만큼 크다 하더라도 교통 조건이 불량하고 수송 및 왕복시설이 불비하면 시장권은 협소 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 대신 곳곳에 정기시장이 개설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품의 수요지역과 시장 간에 거리상 빚어지는 마찰은 소비자(및 이동상인)가 1일에 왕복할 수 있는 노정을 반경으로 하여 하나의 원형 내지는 육각형의 시장권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1개 정기시장은 경제외적 반강제에 의해 개시된 시장을 제외 하고는 대개 20~30리(8~12km)를 기준으로 하여 존립하고, 인구와 산업이 비교적 저조한 지역(예; 강원도)에서는 30~40리에 개시되는 것을 본다. 이와 같은 노정은 인간의 생리적 기능(걷는 능력)에서 비 롯하기 때문에 현재 정기시장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들에 공통되는 현상이다(예; 중국과 모로코의 경우 40~50리 평균).

이상에서 우리는 이동상인의 영업규모의 경제성(economy of scale), 생산구조의 영세성, 총수요 규모의 왜소와 인구 분포의 확대 성, 전통적 소비관습과 가치관, 소비가계의 빈약성, 나아가서 교통조 건의 불비(不備)가 정기시장의 운행을 어떻게 필요로 하고 합리화하 는가를 살펴보았다.

아무튼 이동상인과 농촌 주민이 정기시장에 수렴하는 경제활동의 맥박은 전통적인 농촌사회에 있어서 규칙적인 하나의 생활 리듬을 형성하고 있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5일장은 농촌에 있어 생활 리듬의 근원을 이루며 초근 인생(草根人生)에 대하여 경제․문화․

사회생활의 구심점을 형성한다.

농촌생활에 있어 맥박과 리듬을 형성하는 장날(시일)은 천체의 원 리에 따라 정해진 것과 인위적으로 편리를 좇아 정해진 것, 둘로 나 눠볼 수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것이 이른바 ‘10간 12지(十干十二支)’, 보름(음력 15일), 24절기법(二十四節氣)이다. 후자의 경우가 7일 간

격의 주시(유럽), 3~7일시(아프리카), 육제시[六齊市: 일본 추고황(推古 皇) 시대], 5일시(한국과 일부 중국) 등이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10일 (10干)마다 한 번 또는 매 12일(支)에 한 번씩 개시해 온 것 같다.8 그러다가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旬’(순: 10 일)마다 또는 12支마다 2~4회의 장이 서게 된 것 중 하나가 5日市 (순마다 2회)가 되고 大市(旬마다 2, 4, 7, 9일 같이 4회)가 된 것 같 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엽에 이르러 전국 장시망이 확립되었기 때문 에 당시 중국의 중북부에 발달된 시장제도인 ‘旬’ 단위의 개시일(開 市日)을 도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하여 당시 우리나라의 장은 대개 5일 간격, 10일 간격, 보름 간격의 개시일이 보편화 됐으 며 그 중에서도 5일시가 가장 많았다(다음 章의 통계 참조). 즉 旬마 다 1회 開市가 2회 開市로 변천한 것이다.

인근 정기시장 간의 순환적인 장날(시일)의 결정은 대개 기초시장 들이 속하는 1개의 중급시장 또는 대시장의 장날을 기본으로 먼저 그와 상충되지 않도록 각 기초시장의 장날을 정하고, 그 연후에 되 도록 한 시장권 안에 있는 기초시장끼리의 순서적인 연계성을 도모 했던 것 같다.9

8 니드햄(Needham 1958, 396)에 의하면 간지법(干支法)은 상(商) 시대부 터 사용되었으며 前漢 말기에 와서 음력에 의한 월력 및 연력이 보편화 되었다는바, 場의 개시일은 일찍이 간지법을 따른 것 같다.

9 흔히 한 시장권(중급시장권)의 순환적인 장날의 순위에 대해 이웃 기초 시장끼리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 일차 목적인 것처럼 운운하는 사람 이 있으나, 이동(移動) 상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영업 활동의 기지 (base)로 삼고 있는 중급 또는 대시장(大市場)에 5일 중 최소 하루는 돌 아갈 수 있어야 그 밖의 일에 영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속론이 피상적인 관찰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시장을 찾아 이동하는 이동상인들로 하여금 순차로 대 시장 또는 중급시장의 한 곳과 여러 개의 기초시장을 순환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농촌 주민은 크고 작은 수요의 발생에 맞 추어 자유로이 대소시장을 선택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듯 정기시장의 성립과 그 기능은 전통적 소농사회의 제반 생 산력과 생산관계에 비추어볼 때, 지극히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논 리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하여 경제제력과 사회관계의 변 증법적 발전에 부응해 상설시장화에로의 합리적인 자기 개편을 스 스로 조정해(built-in adjustment) 왔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다시 말해 정기시장의 진화발전은 시장권의 인구의 크기, 부(wealth)의 상태, 산업 및 교통조건과의 밀접한 관련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단순 한 행정명령 하나로 상설화(근대화)되거나 폐쇄될 성질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가 괄목할 근대화가 이루어진 이 시점에 있 어서도 정기시장의 상설화가 획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따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가 괄목할 근대화가 이루어진 이 시점에 있 어서도 정기시장의 상설화가 획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