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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上古時代) 시장의 등장

우리나라에서 ‘시장(市場)’에 관한 기록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한(三韓) 시대부터이며, 이 당시 국내 다수의 시장에 한인(韓 人)은 물론 멀리 왜국인(倭國人)까지 찾아와서 철을 화폐로 사용하 여 오곡―기장[黍], 조, 보리, 콩, 벼―과 누에고치․면(棉) 등을 원 료로 하는 방적물의 매매교환이 성행했다 한다.6

삼한 시대의 시장은 일반 사회 및 산업의 발달에 의한 물자의 교 역 범위가 광대하여 상당히 보급 발전되었는데 그 종류는 대체로 다 음 네 가지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1) 촌락시(村落市) : 촌락과 촌락 사이의 교통이 편리한 장소 또 는 인구가 밀집한 촌락에 소재한 시장을 말한다. 가로시라고도 한다.

2) 경계시(境界市) : 나라와 나라 사이에 존재한 시장으로서 삼한 시대에는 78개의 소읍이 있었는바 각 읍은 부족국가의 형태와 주권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 주권국가 간의 매매교환은 마치 오 늘날의 지방간의 경계시(예; 장호원장)와 같이 읍 경계에 소재 하는 시장에서 행해졌다.

6 文定昌(1941) 씨의 인용문에 의하면 “國出鐵, 韓ㆍ濊ㆍ倭 皆從取之, 諸 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後漢書 권40 與服志第三十)”이 라 했다. 이 기회에 밝혀 두고 싶은 점은 이 章의 한국의 시장사(市場史) 를 집필함에 있어 필자의 천학비재로 인해 원전을 일일이 섭렵하지 못하 고 대부분 文定昌(1941), 白南雲(1933), 조선총독부 자료 제8집, 11집, 27집, 그리고 金漢周(1946) 씨의 연구 등을 종합하여 기술했다는 점이 다. 이 점 후일에 새로이 고증 연구해야 할 분야로 남겨 놓는다.

3) 성읍시(城邑市): 앞에 말한 78개 읍국에 있어서는 그 중심지인 성읍에 인근 주민들이 모여 물자를 교환하던 시장을 말한다.

4) 제전시(祭典市): 상고시대의 촌락민 또는 국민은 산천초목 및 천지태양 등 자연신을 숭배하였는데 이들이 공동으로 제례를 행할 때 제단 부근에는 동시에 시장이 성립하여 물자를 교환하 였다.7

그 후 삼국정립 시대에 들어서 일반 사회경제의 진보에 따라 시장 은 삼한 시대보다 훨씬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서 시장에 대한 제반 시책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삼국사기 (三國史記)」 신라본기 제3’에 의하면 신라의 경우 소지왕(炤知王) 12 년(490년)에 “初開京師市, 以通四方之貨”라 하였듯 그 수도인 경주 에 경사시를 개설하여 널리 국내 물자를 교역했으며, 이어 지증왕 (智證王) 10년(508년)에 이르러서는 경주에 동시(東市)를 개설하고 시전(市典: 시장감독청)을 설치하였다. 그 후 효소왕(孝昭王) 4년 (695년)에는 서남쪽에 두 시장을 더 개설하여 ‘동시’와 마찬가지로 감독관(각 시전에 監 2인, 舍 2인)을 파견, 시장운영을 관장하였다.8

신라의 왕도(王都)에 본격적인 시장이 개시된 이래 200년을 경과 하여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이 3개소 설치된 것을 보면 그간의 국내 인구의 증가와 시장 거래의 번성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권1’에 의하면 신라가 전성하였을 때 수도 경주에는 17

7 白南雲(1933, 300). 이상의 분류는 文定昌(1941) 씨의 소론에 근거했다.

8 “智證王 十年, 置東市典, 設官以監之, 孝昭王 四年, 置西南二市典, 置官 如東市, 號三市典.” [「증보문헌비고」: 조선 고종 때 박용대 등 편찬 제 163권.]

만 8,936戶, 1,363坊이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은 경사시(수도에 있는 대시장) 외에 삼한 시대와 같은 각 종류의 지방시 즉 향시가 섰던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으나 이에 관 한 확실한 기록을 문헌상에 접할 수 없음이 유감이다. 그런데 「증보 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제163권에 의하면 「신당서(新唐書)」와 「계 림유사(鷄林類事)」(宋孫穆 편찬)는 “장에 나오는 사람은 대부분 부녀 자들로서 이들은 아침 일찍 농산물 등 팔 물건을 보따리에 싸거나 휴대하고 나와 쌀[粺米]을 물가의 표준으로 삼아 교환을 했다”고 하 였다.9 이것을 보면 당시 국내의 교통이 불편하고 남자들은 대부분 수렵, 운반 등 힘든 일에 종사하였고 부녀자들은 농경이나 무판(貿 販: 교역)에 많이 관계한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에서는 관이 수도[고마성(固麻城)]에 시장을 개설하여 시장감 (市場監)을 두고 시장의 개폐, 시장 질서의 유지, 분쟁 조정, 불법매 매 단속, 점포 상인들로부터의 세금 징수, 어용품의 조달 등을 수행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白南雲 1933, 300). 그리고 「악학궤범(樂學軌 範)」에 수록되어 있는 정읍사는 당시 시장에 간(일설로는 행상에 나 선) 남편의 안부를 근심하는 백제 아낙네의 애절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데,10 이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정읍(井邑)을 포함한 백제의 147 군현(郡縣)에 성읍시(城邑市) 또는 지방시(地方市: 鄕市)가 섰었음을

9 唐書曰, 新羅市 皆婦貿販, 鷄林類事云, 日早晩爲市, 皆婦人契一柳箱一 小升, 有六合爲一刀, 以粺米定物之價. 而貿易之, 其他皆視此爲價文之 高下.

10 현재 전해 내려오는 한글로 적힌 가장 오래된 백제 가요 ‘정읍사(井邑 詞)’의 본문은 “달아 높이 높이 돋아서 멀리 멀리 비추어 다오. 저자[場]

에 가 계신가요? 궂은 곳을 밟으실까 두렵구려. 어느 곳에나 쉬시지요.

낭군 가시는 곳에 어두울까 두려워요”라는 뜻이다(필자 의역).

짐작할 수 있다.

문헌에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당시 고구려 또한 국내성(國 內城)과 164개 군현에 경시와 향시가 활발히 교역 활동을 행하였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신라와 백제에 비하여 철과 소금의 생 산이 풍부한 고구려는 중국의 한(漢), 위(魏),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주(周), 수(隨), 당(唐) 등과도 교역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백제 또한 다른 나라와 교역할 때 정치적 교린 관계가 두 텁던 수, 당, 왜국 등과 상당히 빈번한 물자의 왕래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신라 통일 이후의 시장은 삼경시(三京市)와 426개 주읍(州邑)에 가로시(街路市) 등이 있었고 외국 무역은 국영으로서 주로 당나라와 문물의 교환이 빈번했음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 있다.

이상 삼국시대의 시장에 관한 기록에서 특징되는 것은 앞서 말한 시장 행정이 일찍부터 계발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 주요 임무의 하나가 어용품의 조달이었지만 기타 공정한 거래질서의 확립과 백 성의 잉여물과 필요 물자의 교환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당시 문물제 도의 발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