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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의 위축과 조선의 생산력

라. 북관개시(北關開市)

6. 시장경제의 위축과 조선의 생산력

조선 시대의 장시는 실로 이와 같은 환경에서 시장경제의 확대에 의한 상품 생산의 적극적인 증대를 유발하지 못하고, 반대로 상품유 통에 대한 갖가지 토색(討索)으로 인해 농업생산 및 수공업을 위축 케 했음은 물론, 일반 백성은 산업에 진작할 의욕을 잃고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최하 수준의 자연경제생활에 안주할 수밖에 없었다.

맹자는 일찍이 “시장을 심히 기찰하면 장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 다. 고로 상인에게 함부로 징세(徵稅)하지 말 것이라―開市譏而不 征, 以此見之, 商賈之類不可徵稅故―”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유도(儒道)를 숭상하던 당시의 관리와 조정은 상업을 “말(末) 을 좇는 행위”라고 천시하면서도 시장에 대한 과징을 서슴지 않았으 며 농공어민에 대한 직접 간접의 토색(討索)이 절정을 이루었다.

시장 및 유통기능의 원활한 발전만이 경제성장과 민생안정을 도 모해 준다는 원리를 간과한 형식주의 유교정권은 경제활동의 주축 을 부정하고 그를 천시하며 그러면서도 가혹하게 수탈함으로써 마 침내 조선 정권의 생산력 기틀마저도 스스로 손상시키기에 이르렀 다. 예컨대 1960년대에 들어 적지적산주의(適地適産主義)에 힘입어 오늘날 새로이 왕성하기 시작한 제주도의 감귤 재배와 전라남도 장 성(長城) 지방의 상묘(桑苗) 및 양잠업은 일찍이 조선 중엽까지만 해 도 그곳에서 꽤 번성하였던 것이었으나 공물제도에 의한 직접적 수 탈과 부등가(不等價)적 착취의 결과 일시에 폐허화했던 것이다. 즉 가혹한 공납과 수탈을 감당할 수 없었던 당시의 농민들은 나무뿌리 에 독즙(毒汁)을 몰래 주입하여 귤나무와 뽕나무를 자연 고사케 함 으로써 관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질책을 피하면서 폐농했는데 하루아

침에 감귤 농토가 폐허가 되고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었을 정 도였다.31 그뿐만 아니라 개성사람들로 하여금 인삼을 “병민지초(病 民之草)”라고 개탄케 했으며, 평안도민은 초피(貂皮: 담비 종류 동물 의 모피) 공물 때문에 떠돌이들이 되었다.

수차에 걸친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500년을 통해 화폐 경제가 정립하지 못한 것도 따지고 보면 시장경제의 억압과 생산력 이 저조하였던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화폐경제의 미발달은 다시 시장경제의 원시성과 생산력의 정체를 수반하여 조선 시대의 국민경제는 자급자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다.32

그뿐만 아니라 잉여생산물의 태반이 직접 조세 및 공물의 형태로 서 정부에 흡수되어 문무(文武) 제관에게 현물봉록(現物俸祿)으로 재분배됨으로써 일반 시장에 유통될 물품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거기에 외국과의 수출입은 조정의 전유물에 속했기 때문에 조선 관리들에게 시장은 수요하고 남는 잉여물을 처분 내지는 부족분을 보충하는 의미밖에 없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상에서 보듯 일반 백 성은 자급자족의 경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지배층은 현물 유 통의 자기체제(自己體制)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시장경제 는 더욱 위축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상업 및 시장경제가 어찌하여 이렇듯 부진했는지에 대해 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으나, 조선총독부 당시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꼽았다.33

31 金漢周(1946)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32 崔虎鎭(1942; 1964)은 조선사회의 아시아적 정체성과 상업의 부진 및 고리대업(高利貸業)의 악영향 등에 관하여 자세히 해설하고 있다.

33 조선총독부(1925, 9-10; 1929, 453-456)와 四方博(1932), 河合弘民

1) 고래로 상업에 대한 보호 장려의 제도와 시설이 불비하며 오히 려 여러 가지 간섭과 억압을 가했다는 점

2) 교통이 불편하고 산업이 유치(幼稚)하여 물자의 공급이 부족했 다는 점

3) 인구의 도시 집중이 적었고 국민의 경제력과 생활 정도가 낮아 물자의 구매력이 미약했다는 점

4) 고립 폐쇄의 경제체제로 인해 외국무역이 부진하고 자급자족 경제가 영속(永續)하였다는 점

5) 고래로 상업을 천시하여 상업경영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점 6) 상업상의 과세가 혹독했으며 가렴주구가 심하고, 공조(貢租)제

도가 문란하여 상업 및 일반산업의 발전이 위축되었다는 점 7) 도시에서는 어용상인인 육의전과 유분전, 그리고 지방시장에서

는 특수상인(예; 객주, 보부상 등)에게 부당하게 상업상의 특권 (난전금지권)을 부여하여 일반상가(인)의 존립을 불가능케 했 다는 점

8) 예부터 화폐 및 도량형 제도가 발달되지 않아 자연 오랫동안 물물교환의 관습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점

9) 일반상가와 상설점포의 부진은 보부상과 같은 행상제도의 촉 진을 유발했으며 이는 다시 상설상가의 성립을 저해했다는 점 10) 시장은 단지 매매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기구에 그치지 않고 사 교, 오락, 유흥, 통신, 공사(工事) 등 단조로운 농촌사회생활에 유용한 작용을 했기 때문에 이는 도리어 근대적인 상가와 상업 도시의 형성을 방해했다는 점이다.

(1909), 文定昌(1941)은 조선상업의 부진 이유에 대하여 거의 비슷하게 진단을 내렸다.

조선 시대의 상업을 연구한 여러 학자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정 기시장의 성립과 시장활동이 마치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근대상 업의 변태”라고 주저 없이 속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이미 밝힌 바 있거니와 정기시장의 합리성과 필 요성은 근대경제에서도 널리 증명되고 있으며, 다만 생산력의 발전 에 따라 실제 그 거래의 상태는 근대화되어 가면서도 외형적인 정 기성은 사회관습상 상당 기간 존속하는 것인데도 당시의 거래 상태 가 원시적이라 하여 현재에도 정기시장의 형태가 농촌에 존재하는 것이 마치 전근대적인 것인 양 오판하는 어리석음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속단은 현재 일부 위정자와 몇몇 학자들 간에도 종종 보는 바이나, 시장 근대화의 본질이 그 내실에 있지 외형(정기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章에서, 우리의 관심은 조선 봉건체제가 생산 및 시장 기구에 대하여 가혹하게 착취를 일삼은 결과, 조선 정권과 그에 부화뇌동한 특수 상업자본이 기저(基底)로 삼던 생산력의 극단한 쇠퇴를 초래함 으로써 정권, 상권, 생산 주체의 삼자가 고스란히 일제 침탈의 도구 로 전락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렇듯 경제의 혈관인 ‘시장(市場:

교환(交換))’이라는 경제발전의 도약대를 잃은 조선경제가 말기에 이르러 침체의 심연(深淵)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은 경제법칙의 우연 한 결과라고만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