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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북관개시(北關開市)

4. 조선의 상인: 객주와 보부상

4.2. 보부상

보부상(褓負商, 또는 부보상)은 앞서도 말했지만 삼삼오오 떼를 지어 정기적으로 각지의 장시와 촌락을 찾아다니는 보상(봇짐장사) 과 부상(등짐장사)들로서 시장의 운행과 발전에 있어 절대적인 인자 (因子)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보상은 주로 직물, 완구, 장식물, 잡화 등을 행상하며, 부상은 소금, 도기, 칠기, 건어물, 신발류, 가내도구 (家內道具) 등을 지게로 짊어지고 시장과 촌락을 여행한다.

보부상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부상은 기자 조선(箕子朝鮮) 때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24 삼한 시대에 벌써 시장이 발달한 것으로 보아 고대 시대에 이미 비롯한 것 같다. 특히 어물과 소금은 인간 생존의 필수품이란 점을 감안할 때 소금 등짐장 수(부상)의 발생은 장시의 개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도읍지에 시장이 발생하고 시장망의 형성이 현저 하였던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읍사(井邑詞)’의 가요가 말하듯 이미 행상인이 보급됐을 것이고, 장시가 본격화된 조선에 이르러서 는 이른바 ‘장돌뱅이’의 최성 시대를 맞이하였다.

조선 시대 보부상의 중심 세력을 이룬 것은 개성(開城)의 상인이 었다. 고려조가 망하고 조선이 흥하자 전조(前朝)의 유신들은 임관 의 희망을 버리고 다른 일을 찾게 되는데, 토지가 협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자 생계를 위해 천업(賤業)인 상업에 대거 몰리게 되었다.

당시 이태조의 총애를 받던 백달원(白達元)이라는 황해도 토산(兎

24 朴元善(1965, 31)의 혜상공국서(惠商公局序)의 기록을 참조할 것. 그 외 보부상의 기원에 대하여 석왕사 건립설(釋王寺建立說), 위기 구원설(危 機救援說), 건국 공로설(建國功勞說), 정도전설(鄭道伝說), 고려유신설 (高麗遺臣說), 자위구원설(自衛救援說) 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山)이 이태조로부터 전국 시장 및 상민의 관리를 위임받아 개성 발 가산(發佳山)에 본부를 두고 행상의 두령(頭領)이 된 배경과 영합(迎 合), 드디어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개성상인은 그 단결력이 강하고, 경영 능력이 뛰어나 보부상의 특 출하고 확고부동한 조직체계 및 부기 금융방식―예; 사개부기(四開 簿記), 차인(差人) 제도, 시변(市辺), 어음[魚驗]―에 크게 기여한 것 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여 조선 시대의 보부상들이 타의 추종을 불 허하는 단결력과 조직력을 발휘하였던 이면에는 양반의 후예를 중 심으로 하는 개성상인이 그 중심 세력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믿어진 다(참고로 일제하에서 왜인이 상업상 제대로 발을 붙여 보지 못한 유일한 곳이 개성이었다.).

조선 중엽, 한창일 때는 개성상인의 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 한다.

봉건체제하의 상인 길드(guild)의 특색은 그 엄격한 규율과 단결력이 었다. 보부상들도 마찬가지로 부자형제지간에 장유 상하의 예의가 엄격하고 동료 간에 약속을 지키며, 상호부조, 상도의 준수, 대민 봉 사, 국사(國事) 협력의 규율이 엄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규율을 어 기는 자에게는 각종 사형(私刑)마저 가해졌다. 이효석의 저 유명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한 보부상이 어쩌다가 단 한 번의 정사로 인해 일생을 홀로 살며 눈을 감을 때까지 번민하는 장면은 다른 한편 당시 보부상들의 강인한 정조 규율과 정신력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 준다.

보부상들이 한창 왕성했을 때에는 전국에 그 지부가 1천여 개에 달하였고 단원은 200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조선총독부 1925, 81).

이들은 때로 사발통문으로 그 조직력을 동원, 지방의 탐관오리를 징치(懲治)하기도 했다.25 보부상들의 마지막 황금시대는 조선 말엽

정치권력 싸움에 가담 이용되면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들의 특수 한 연락망과 신속한 동원력 및 단결력은 정정(政情)이 혼미하던 당 시의 가장 마땅한 정치하수인 세력화할 수 있었다.

목화송이를 단 패랭이 모자의 이들 보부상은 이태조 때부터 정치 와는 인연이 깊었다. 태조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그 총본부(수임방 (首任房))를 개성에 두고 각 도군에 그 지부를 두어 전국의 상권을 주물렀으며,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때에는 큰 전공을 세워 사적(私 的) 특권단체화됐다.

고종 때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대원군이 「보부청(褓 負廳)」을 만들어 그 자신이 도반수(都班首: 최고 감독자)가 되었으 며,26 임오군란 때는 거꾸로 대원군에 반기를 든 공로로 고종 20년 (1883)에 「혜상공국(惠商公局: 후에 상리국(商理局))」을 설치, 처음 에는 내무부에 속하다가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 動) 때 관군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그 해(1894)는 농상아문(農商衙門) 에 귀속된 후, 1897년에는 「황국협회」에 속하여 「독립협회」를 습격 하는 데 앞장섰고, 1899년에는 육의전의 각 전과 합하여 「상무사 (商務社)」가 되더니 그 후 상민회(商民會), 진명회(進明會), 공진회 (共進會)로 전석신(轉夕身),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11년 시장으로부 터 그 단체가 축출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보부상 단체는 그 본 연의 업무인 상업에서 종종 이탈, 정치권력 다툼에까지 개입하기에

25 사발통문은 지방관헌을 응징하기 위해 그 단원에게 모든 것을 알리는 통첩문으로서 처음 서명자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원서(圓書) 함을 의미한 것이다.

26 보부상의 기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그 명칭과 기구가 다르지 만 대체로 도반수(都班首), 반수, 도접장(都接長), 접장(掌務員), 공원, 유사(有司)의 직제였던 것 같다(인조 때).

이르렀고 그때마다 권력을 빙자하여 민폐를 끼치고 상업상의 횡포 를 일삼았으며, 갑오경장 이후에는 여론에 밀려 점차 내리막길을 걸 었다. 특히 동학란 이후에는 정부로부터 장시에서의 독점판매권을 받아 일반인들이 시장에서 행매하는 것마저 금지시켰을 정도였으나 조선 멸망과 함께 쇠진해졌다.

이렇듯 보부상은 장시의 운행(運行)과 우리나라 상업 발달 및 종 래는 정치 변동에까지 무상(無常)한 영향을 끼치며 근대화의 물결에 차츰 쇠퇴의 과정을 밟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