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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시전과 시장

고려조는 개국(916)과 더불어 지금의 개성(開城)에 도읍을 정하면 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시전[상가]을 구획하여 팔랑(八廊)의 장옥 (場屋: 장랑)을 설비하고 장옥과 장옥 사이에는 공용 도로와 상인의 거주 지대를 설치하였음이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11

그리하여 장옥의 입구마다 각 장옥의 상호를 나타내는 간판을 내 다 걸었으며 장날에는 남녀노소가 모여 쌀[米]과 옷베[布]를 사용하 여 가진바 물건을 교환하였다. 1천여 년 전인 당시에 비록 오늘날과 같은 상설 점포는 아닐지라도 정부가 직접 장옥(장랑)을 구획하고 세웠음은 처음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방대하 였고 거래 방법은 어떠했는지에 관하여는 인종(仁宗) 2년(1124) 송 의 사자 노윤적(路允迪)의 수행원이었던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 도경(高麗圖經)」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12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인용문(각주 12)이라든지 「송사(宋史)」에

“高麗上下以賈販利入爲事 日中爲市, 用米布貿易”이라는 기록 또는

「문헌통고」에 “高麗使 郭元信, 方午爲市, 不用錢, 以布米貿易”이라 한 것을 보면 고려 초에는 교환의 매개수단으로서 쌀 또는 옷베를 사용했다는 점과 아직도 시장 공지(空地)에서 거래가 주로 이루어졌 다는 점에서 신라 시대나 그 거래 형태가 크게 달라진 바 없음을 본 다. 다만 수도나 큰 도시의 시전만은 주민을 위한 상설 시장의 기능 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시장 설비는 점차 수도가 발전하고 인구가 늘며 산업이 발 달함에 따라 그 규모나 설비 내용이 더욱 확충되었음이 기록에 보인

11 “太祖己卯二年春正月, 定都干松嶽之陽), 陞其郡爲開州, 立市廛弁坊里, 分五部置六衛.” [「高麗史節要」 卷之一, 太祖己卯二年條]

12 “王城本無坊市, 惟自廣化門至府民舘, 皆爲長廊, 以蔽民居時廊閒, 榜其 坊門, 曰永通, 曰廣德, 曰興善, 曰在信, 曰資養, 曰孝義, 曰行遜, 其中實 無街蘅市井, 至有斷崖絶壁, 秦莽繁蕪, 荒墟不治之地, 特外 示觀美云耳 其俗無居肆, 唯以日中爲墟, 男女老幼, 官吏工伎, 名以其所有, 容易交易, 無泉貨之法, 惟紵布銀甁, 以準其直, 至曰甲微物不及匹兩者, 則以米計錙 銖而償之, 然民久安其俗, 自以爲便也.”[徐兢. 「高麗圖經」].

다. 즉 개국 292년째인 희종(熙宗) 4년(1208)에는 종래 개경의 시전 을 크게 개축 확장하고 큰 창고를 짓고 장옥을 새로 늘렸다. 이와 같 은 관설(官設) 상점 장옥의 확충을 위해서는 개성 오부육가(五部六 街)의 각 방리 각 계층 주민으로부터 쌀과 조를 징수하고 부역을 행 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13

그런데 이와 같은 상설적 성격의 도시 시장(坊市)은 개성 외에 경 주(동경)와 평양(서경)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향시(鄕市: 지방 시장)로는 513개의 목(牧), 부(府), 군 (郡), 현(縣), 진(鎭) 등 정치경제 중심지에 성읍시 형태로 시장이 소재한 외에, 교통의 요충지 및 화물의 집산지에 수많은 촌락시(街 路市) 또는 경계시(境界市)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이들 향 시는 왕복 1일의 행정거리, 즉 12~16km마다 설치되어 비록 장내에 상설 점포는 없어도 일정 지구의 가로에 다수의 사람이 모여 물건 을 매매 교환하였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지방시장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장날(개시일)이 정기적으로 있었다는 확실한 기록은 아 직 찾지 못하였다. 다만 고려 시대의 상인으로서 개경, 동경, 서경의 시전 상인 이외에 향시의 시장 간을 편력하는 행상인이 상당수 있었 다는 점 등에 미루어 향시가 일정한 날에 개시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고려 시대의 교환수단은 초기엔 주로 미포은(米布銀)이었으나 시

13 熙宗四年秋七月丁未, 改營大市, 左右長廊自廣化門至十字街, 凡一千八 楹, 又於廣化門內, 構大倉南廊迎休門等七十三楹, 凡五部坊里兩班, 戶鈂 米粟, 就貨共役, 兩斑坊里之役始比. [「高麗史節要」. 卷之十四 熙宗戊辰 四年條].

대에 따라 혹은 철전, 전각(錢殼), 은기폐(銀器幣), 금폐(錦幣), 견폐 (絹幣), 저화(楮貨), 주폐(鑄幣), 추포폐(麤布幣: 굵은베) 등이 상이하 게 화폐로 쓰였음이 기록에 나타난다.14

시장감독 및 행정은 신라 시대의 삼시전(三市廛)과 같이 경시서(京 市暑)를 설치하여 시전을 임검(臨檢) 단속하고 시장행정을 관장한 것 으로 사료된다. 문종(文宗) 때에는 경시서에 정칠품의 영사인(令士 人)과, 使 3인, 記官 2인을 두었다 한다. 고려조 500여 년간의 시장 정책은 특히 물가 억제에 주력하는 한편, 상업 활동을 장려한 흔적 이 많이 보이나, 타방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시장에 대한 가렴주구 또한 혹심했던 것 같다.

물가단속의 예로서 현종(顯宗) 5년, 흉작에 의해 미가가 폭등했을 때라든지, 희종(熙宗) 8년 은가(銀價)가 뛰어 상대적으로 미가가 하 락했을 때 조정은 굵은베[麤布]와 은뉴(銀鈕: 은 막대)에 대한 미곡 의 교환율을 고시하여 물가안정에 효험을 거둔 사례가 발견된다. 극 단적인 예로 고려 말기 신우(辛禑) 7년(1381)에 개경의 물가가 크게 등귀하여 상인들이 다투어 폭리를 탐하였는데, 당시의 집정(執政) 최영(崔瑩)은 이에 노하여 경시서에 하명하기를 모든 시장 출회물 (出廻物)의 가격을 사정하고 상품에는 일일이 세인(稅印)을 찍어 표 지가 있는 것에 한해 매매케 하되 도장이 찍히지 않은 물품을 판매 하는 자는 척근(脊筋)을 고리에 걸어 죽이라 한바, 상인들 모두 전율 하여 매매가 일시 중단되어 이 일은 필경 행해지지 않았던 것 같 다.15

14 예컨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攷) 제159권 재용고전화조(財用考錢貨 條)와 류자후(柳子厚)의 조선화폐고(朝鮮貨幣考) 제5장 고려 시대의 폐 제(幣制) 등을 참조할 것.

그런데 시전을 구축하고 상업과 산업을 장려하며 혹은 물가의 조 절이라는 명분 아래 이상과 같이 정부가 강권을 발동하여 상업에 간 섭하는 주된 목적은 일차로 왕실 및 관청의 제반 수요를 원활히 하 는 데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일반 백성의 생활수준이나 구매력이 극 히 낮았음을 상기할 때 상업 및 시장정책은 대수요자인 정부의 재정 안정과 지배계급의 가계 여유와 직결되는 문제였을 것으로 풀이된 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도 이 점에 대하 여 간접적이나마 기교가 빼어난 산업제품과 각 지방의 토산품은 대 개 공용에 귀속한 반면 실제 백성(농민)의 생활은 이에 미치지 못하 였음을 지적하고 있다.16

탐관오리의 시장에 대한 주구(誅求)는 관청의 수용품(需用品)을 사들일 때 부당하게 낮은 값을 지불하거나 또는 대금을 전혀 지불하 지 않는 등의 방법을 행하며, 세도가는 지방의 시장에 사람을 보내 어 권력의 행패를 부려 부당하게 낮은 값으로 빼앗다시피 사들여 오 는 사례가 많았던 것 같다.17 이러한 상태로는 국내의 산업이 발흥 (勃興)하고 상업거래가 왕성해지기를 기대할 수 없었음은 물을 바 없다.

고려 시대의 해외무역은 일종의 국영(國營: 조공과 하정(下程))방

15 “辛禑七年, 京師物價踴貴, 商賈爭利, 崔塋疾之, 凡市物令京市署評定物 價, 識以稅印, 始許賣買, 無印識者, 將鉤脊筋殺之, 於示懸大鉤於署以示 之, 市人震慄事意不行.”(高麗史節要)

16 “高麗工技至巧, 其絶藝悉歸於公, 耕作之農, 不迨工技, 州郡土産悉歸公 上(高麗圖經).”

17 “熙宗二十二年, 中贊致仕韓康秦曰……今諸司所需皆取於市, 或抑其價, 或不給直, 商不勝其苦, 宜令有司禁之. 中贊洪子藩上書曰, 豪勢之家, 送 人州郡, 將其貨幣强市民間, 請禁之). (高麗史節要 券之十四).”

식으로서 송나라와 거래가 가장 많았고, 그 밖에 거란, 여진, 몽골, 왜국 등과의 통상[진상(進上) 및 회사(回賜)]도 역시 성하였으나 특 히 아라비아 대상(隊商) 즉 사라센제국의 상인들이 적잖이 왕래한 기록이 보인다. 당시 정부의 무역방법은 쌍방의 국사가 왕래하는 편 에 서로 특산물을 주고받거나 또는 ‘호시(互市)’라 하여 외국 사신이 왔을 때 개경 또는 국경지에 특별히 큰 시장을 열어 각종 화물과 심 지어는 왕실 소유의 금은기(金銀器)까지 일부러 출품, 진열함으로써 교역을 겸하여 짐짓 외용을 과시하였다. 호시는 후에 국경 지방에 개시하여 민간무역의 방법으로도 널리 쓰였다.

외국 무역에 있어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오늘날의 밀수배(密輸輩) 에 해당하는 상인단이 당시 횡행해 조정의 골칫거리였다는 점이다.

즉 상당수의 불법적인 행상대가 있어 당시 금수품이었던 소, 말, 금, 은을 팔기 위해 중국 및 몽골 지역을 드나드는 사례가 많아 이를 금 하는 특별한 형벌이 강구되었을 정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