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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왜관개시(倭館開市)

왜관(倭館)은 지금으로부터 약 550년 전 조선 세종(世宗) 왕이 왜 국의 족리막부(足利幕府) 때 이들로부터 조공을 받기 위해 이른바 삼포(경상도 울산군 염포, 웅천군 제포(薺浦), 동래군 부산포)를 개

19 宜五穀, 俗饒蚕桑, 善作縑布, 乘駕牛馬嫁娶 禮俗男女有別, 行者相逢, 皆佳讓路(동국통감 辰韓章).

항하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20 1510년 왜인의 삼포변란으로 두 곳 은 폐지되고 부산포만이 존속하여 부산진에 왜관의 개시를 보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교가 단절되고 왜관은 폐지되었으나 덕천가강(德川家康) 때에 이르러 다시 왜관을 복구하고 옛 왜관 자 리에 두모포(豆毛浦) 왜관을 재건하였으나 거류통상에 불편하여 후 에 현재의 용두산 아래쪽으로 이전하여 조선 말에 이르렀던 것이다.

왜관에 있어서의 한일 간의 거래는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성하기 도 하였고 쇠하기도 하며 한결같지 않았으나, 덕천막부(德川幕府)의 쇄국정책에 의하여 조선 말경에는 세력을 잃고 심히 부진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년 전 왜관개시에 따라 행해진 양국의 무역 개황을 「증보문헌비고」에 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양국의 무역을 ‘공무(公貿)’라 일렀고, 주로 면, 직물, 쌀, 인 삼 등을 수출하였으며, 일본에서 주로 구리, 납(鑞), 초각(椒角) 등을 수입하였다.

왜관 개시 당초의 수출품은 면포에 한하였고 또 개시 횟수를 처음 에는 1월 3회로 했으나 후에 6회로 늘렸는데, 당시 후진국이었던 왜 국은 통상으로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횟수를 늘려줄 것을 여러 차례 청원하여 조정은 배가 들러올 때마다 개시를 허락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수출하는 면직물은 공목(公木)이라 칭하여 인조 때에 이르 러서는 매년의 수출공목수를 1,121동 44필, 33척 3촌(1동은 100필, 1필은 60척)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21

20 世宗朝 馬島人初請來寓三浦互市, 釣魚事畢則還, 因綠居留漸至滋繁, 命 島主刷還 (증보문헌비고 제164권).

21 당시의 일본인을 묘사한 문헌을 보면 체구가 왜소하고 의복정장을 갖추 지 않은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원시림에 사는 야만인 같아 왜인이라 칭 했으며 당시 일본은 직물이 귀해 거의 우리나라에 의존했던 것 같다. 오

당시의 대 일본 무역은 오로지 종대마도수(宗對馬島守)를 상대로 하는 국영이었고, 국영무역품인 공목은 경상도의 산지(産地) 17읍에 할당하였는바, 전조미(田租米)에 대신하여 쌀 한 석당 목(木) 3필을 징수하여 수출품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쌀에 대신하여 수납한 면직물은 자연히 품질 나 빠져 일본 측으로부터 불만과 항의(오늘날의 클레임)가 자주 제기되 었다. 이에 각 군의 수령은 이의 징수에 고심이 많았던바 인조 때에 이르러 다시 면직물 일부에 대신하여 쌀을 징수하고 이를 매각하여 그 금전을 일본 측에 인도하고 왜인들로 하여금 당시의 국금품(國禁 品)인 인삼을 매입케 했는데 왜국인들은 이를 크게 기뻐하였다.

효종(孝宗) 때에는 일본 측에서 사신을 보내어 종래 공무(公貿)였 던 공목의 반을 쌀로 바꿔줄 것을 신청하여 조정에서 이를 승낙함으 로 쌀이 이때부터 공무품으로 등장하였다. 이를 공작미(公作米)라 칭했는데, 이 수출 공작미가 가장 많았을 때는 1만 6천 석에 달했다.

왜관에서 무역은 국법상으로는 공무에 한하고 후술한 바와 같이 사무를 금했으나, 사실은 양국의 상고(商賈) 간에 사역이 성행하였 다. 사무에서 교역되는 물건은 일본 측은 은, 정(錠), 칼(刀), 거울, 완구류이었고, 우리나라 측은 인삼, 사(絲) 등이었다. 또 당시 조선 에는 서북 지방에 은이 많이 산출되었으나 이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거의 수출하고 국내용은 일본에서 이를 수입하였고, 또 구리(銅)가 나는 산도 많았으나 채광하고 야금 주조하는 기술이 모자라 이를 일 본 측에서 구하였다.22

늘날 섬유류의 세계 시장을 일본인이 석권하고 있는 것도 이때 우리나 라에서 기술을 배워 간 것이 동기가 된 듯하다.

22 男與倭人互市, 國有公賣, 私有私易, 公貿此以來, 彼以銅, 鑞, 私易此以 人蔘, 絲線, 彼以銀, 錠, 刀, 鏡, 若巧器奇玩, 我方西北亦多銀鑛, 晝輸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