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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세, 시장금융, 시장정책

라. 북관개시(北關開市)

6. 시장세, 시장금융, 시장정책

조선 시대에 시장세(市場稅)가 얼마나 가렴주구했는지에 대해서 는 앞 장에서 고찰한 바 있거니와, 일제 지배에 이르러 이는 일견 제 도화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른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한 이후, 이 나라에서 일제의 통감(統監)정치가 실시되면서부터 시장을 지도한다는 명분 아래 사 세(私稅)를 폐지한 대신 지방비로 시장세를 정식으로 징수할 것을 조치하였다. 시장세는 ‘백일세(百一稅)’라 하여 매매액의 100분의 1 을 과세하는 고율이었다. 그리하여 1910년에는 시장세 징수에 대한 조세저항운동이 전국에 번졌고, 마침내 평안도 순천(順川) 지방의 장시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다른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할 기세였다.

그런데도 합병 후 발포된 시장규제(1914)에서는 도회지의 제2호 공설시장에 대하여만 사회정책적 시설이라 하여 시장세를 면제하 고, 제1호 시장과 제3, 4호 시장에 대하여 계속 과세하도록 규정하

고 있는데, 제1호 시장인 장시에는 백일세(百一稅)를 과세토록 하 였다. 그리고 우시장의 경우 100분의 3~5에 해당하는 고율의 중개 수수료를 징수하였다.

“장날마다 수십 리 길을 걸어, 일반 백성이 가지고 나온 곡식 한 말, 채소 한 짐, 달걀 한 꾸러미, 가난한 노파가 이고 가는 건어 한 마리에도 놓치지 않고 중세를 … 과하였다(善生永助 1929, 273).” 다 른 한편 장날 외에 행해지는 일본 상인들의 대량 거래에 대하여는 한 푼의 세세(細稅)도 과하지 않으면서 영세민에 대하여서만 가혹하 고, 또한 징세에 다대한 비용과 노고를 쏟는다는 것은 형평원리상 대단히 불공정한 조치였다. 고율, 불공평한 과세는 상거래 및 국민 생활의 안정을 해치고, 조세 관념을 악화시키며, 시장거래액을 부정 하게 보고하게 하는 등 재래시장에 대한 일제의 과세제도는 어느 모로 보나 결함(欠陷)과 폐해가 컸다. 게다가 시장세의 징수에 있어 서도 중복 과세와 징수 세금의 사사로운 착복 등 폐해와 비난의 소 리가 대단히 높았다.

그리하여 1927년부터는 비난과 원성의 대상이던 상기 시장세를 폐지하고, 도(道) 지방세로서 제4호 시장에 대하여서만 특별시장세 를 부과하기로 개정하였다. 그 세율은 매매 약정액에 대하여 10만 분의 5(경기도에서는 10만 분의 3)였으며, 그 밖에 부세(府稅)와 면 특부과금(面特賦課金)이 있었다.

그러나 제1호 재래시장의 경우 시장세 외에 전부터 있던 시장사 용료 또는 입시세(入市稅)도 계속 받았다. 읍면은 시장터와 일부 시 설을 개수 정비한 후에 여기에 소요된 재원[起債]을 상환한다는 명 목으로 장옥 사용자에 대하여는 1평당 10~30전을, 그리고 노점에 대 하여는 1점당 3~5전, 기타 팔 물건을 가지고 나온 사람에게는 매물 의 대소에 관계없이 1~3전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시장 정비에 소요

된 자금을 상환한 후에도 계속 시장사용료를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노점 및 일반 출시자들에게 자주 중복 징수하여 물의를 빚었다.

우시장에서는, 읍면 관리가 장에 나오는 소 1마리에 10~20전, 돼 지는 5~10전씩 시장사용료를 징수하였다. 당시 국밥(곰탕) 한 그릇 이 10~20전, 쌀 한 되가 30전 안팎이었음에 비추어 시장사용료는 대 단히 비쌌지만 시장 외의 거래에 대하여 갖가지 탄압과 단속이 심해 일반 백성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장금융은 일명 ‘전리꾼(錢利軍)’이라고도 이르는, 장날마다 일 정한 장소에 대점(貸店)을 펴고 농촌 사람들의 자금 수요에 응하는 자, 시장의 소상인을 고객으로 하여 그 노점 또는 점포를 방문하여 대금 행위를 하는 자, 두 부류가 있었다.

시장대금업자에 의하여 대출되는 자금을 ‘시변(市邊)’ 또는 ‘장변 (場邊)’이라고 이른다. 시변은 장날마다 원리금을 회수하는데, 금리 를 복리로 계산하면 연 5할 내지 10할에 해당하였다.

우리나라의 시장금융은 그 기원이 오래이고 조선 때의 시장금융 은 전국적으로 거의 개성상인이 지배하여 그 대차(貸借), 어음 등이 상당한 발달을 이루었으나 일제하에서는 일반 금융업의 발달에 수 반하여 이들 세력이 후퇴하고 일인들이 이에 대신하여 개성상인 특 유의 시변이라는 특수 금융방식을 계속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일반 시장에서 대부분 자금력이 박약한 극하층민(極下層民)을 상대로 하 는 시장대금융(市場貸金融)은 일제에 의한 토지 및 재산 탈취의 중 요한 수단이 되었다.19

19 일제하 시장 금리는 월평균 5~6分으로부터 7~8分이 보통이며 극빈층에 는 1할이라는 고율을 적용했다. 고율 금리는 결과적으로 생산의 위축과 거래의 불공평성 및 생활의 불안정을 초래했다(善生永助 1929).

이제까지 우리는 일제하의 시장정책이 일견하여 형식상으론 근대 화를 지향하는 것 같고, 시장 형태나 물동량 그리고 시장행정도 상 당히 진전하였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일제식민지 경제정 책의 핵심 수단으로써 시장의 근대화가 전개되었으며 실제 시장형 태나 물동량의 변화가 생산력 주체인 농민의 생계안정과 생산력증 대, 나아가 일반 소비대중의 권익 증대에는 하등 기여하지 못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무릇 시장정책이란 단순히 물산의 흐름(flow)만을 증가시키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지 않고, 그 흐름이 국민 생활의 풍요와 국민생 산력의 발전에 직결됨으로써 그 실효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 미루 어볼 때 일제에 의한 시장정책은 수탈 행위 강화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듯 일제의 시장정책이 물동량의 흐름을 증대시켜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식민경제의 속성에 비추어 그 리 놀랄 바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