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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당 재임 시기 주조선상무서의 운영 양상

총판상무위원 진수당이 조선에 부임 했을 때는 아직 주조선상무서 건물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진수당은 한성에 도착한 후 임시로 南別宮에 거 처를 마련하였다.98) 남별궁은 조선 태 종 때 慶貞公主의 第宅으로 마련되어, 임진왜란 때 명군이 주둔한 이래 조선 을 방문하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곳으

로 활용되어 왔다. 청 사신 阿克敦이 남별궁의 모습을 奉使圖에 남기기도 하였다.99) 이처럼 전통적 칙사의 공간에 근대적 상주사절 진수당이 들어온 것은 전통외교와 근대외교가 중첩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판리조선상무장정은 “한성·원산·부산 세 곳에 委員公館을 건설하 여 (상국의) 체제를 높이도록 한다.”며 독립된 공간을 마련할 것을 규정하 고 있었다. 이에 진수당은 주조선상무서 건립에 착수하여, 먼저 會賢坊 駱 洞의 양반 朴氏의 가옥과 토지를 매입하였다.100) 낙동 부지는 건물 180칸 에 空地 300칸으로 제법 큰 규모였으나, 小胡洞으로 우회하여 나가야 하 는 불편함이 있었던 탓에, 이듬해인 1884년 서쪽의 기와집 11칸 반과 빈 땅 10칸, 그리고 거기서 서쪽 개울을 건너 長洞의 기와집 16칸과 빈 땅 20칸을 추가로 구매하여 큰 길과 연결하였다.101) 주조선상무서 내부에는 5칸 규모의 大堂이 세워져 辦公, 會客, 筵會, 審案 등을 한꺼번에 처리하였 다.102) 이로써 첫 번째 주조선상무서인 한성상무총서가 문을 열었다. 주조

98) 統署日記 (高宗 20年 9月 4日).

99) 정정남, 「壬辰倭亂 이후 南別宮의 公廨的 역할과 그 공간 활용」, 건축역사연구 18(4), 2009.

100) 「駱洞朴姓家屋垈地 賣契備案에 關한 照會」(高宗 20年 10月 16日), 淸案 1, 7쪽.

101) 「駱洞 家垈賣契에 關한 照會」(高宗 21年 1月 25日), 淸案 1, 33쪽.

102) 주조선상무서는 大堂, 上房, 大門, 儀門, 前後廂房, 廚房, 院墻, 園牆 등을 갖추었다. 「 稟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2年 2月 9日), 袁世凱全集 1, 123쪽 ; 「總署收北洋大臣李

[圖2-3] 奉使圖에 나타난 南別宮

선상무서는 경복궁이나 6조는 물론 鍾樓, 七牌, 梨峴과 가까웠으므로, 청이 상국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조선의 정세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 주었다.103)

주조선상무서의 조직 구성은 판리조선상무장정을 따랐다. 그런데 판리조 선상무장정은 출사장정을 원용한 것이었으므로, 주조선상무서는 미국이나 일본에 설치된 영사관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청은 조선에 대한 상국 지위를 강조하고 있었던 만큼, 주조선상무서에는 여타 주외공관과는 구분되는 특징이 두드러졌다. 판리조선상무장정과 한성상무총서의 실제 조 직 구성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104)

판리조선상무장정 한성상무총서

人員(名) 薪水(兩) 人員(名) 薪水(兩)

總辦 1 400 1 320

隨員 2 80~100 2* 100

英文繙譯 1 100~120 1 120

書識 2 40 이하 2 36

朝鮮通事 1 10~20 1 15

聽差 6 30 이하 6 27

合計 13 1000 이하 13 889

* 隨員 2명 중 1명은 幇辦으로 운영

<表2-1> 辦理朝鮮商務章程과 漢城商務總署의 조직 비교

鴻章文 附件二. 淸冊」(光緖 14年 2月 11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460-2462쪽 참 고.

103) Larsen, op. cit., 2008, p.110.

104) 「北洋通商大臣李鴻章奏遵議朝鮮通商章程摺 附件一. 辦理朝鮮通商章程」(光緖 8年 8月 29日),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 74쪽 ; 「總署收軍機處交出李鴻章抄摺 附件一. 酌擬派員 辦理朝鮮商務章程」(光緖 9年 6月 25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174쪽 ; 「總署收北洋 大臣李鴻章文」(光緖 10年 9月 2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489쪽 ; 「總署收北洋大臣 李鴻章文 附件三. 淸冊」(光緖 11年 2月 1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675-1677쪽.

이하 주한공관의 조직 및 구성은 이은상의 연구를 참고한 위에 각종 사료를 통해 보완 하여 작성하였다.

이 시기 청이 해외 각국에 설립한 영사관의 조직 구성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1876년 제정된 출사장정은 영사관의 조직 구성과 관련하여 별다 른 내용을 명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영사관은 청국인의 수, 지정학적 중요성, 재정 상태, 본국과의 거리 등 현지 상황을 고려하여 관원을 재량껏 고용하였다.105) 예컨대 싱가포르총영사관은 총영사와 수원 각 1명으로 구성되었지만, 요코하마총영사관은 총영사, 수원, 번역 각 1명 에 通事 1명까지 추가하였다. 청이 영사관을 개설하던 초기에는 주로 현지 상인을 영사로 삼아 그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 체 영사관의 조직 구성을 획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판리조선상무장정은 주조선상무서의 조직 규모를 구 체적으로 명시하였고, 이는 가장 먼저 한성상무총서에 적용되었다. 판리조 선상무장정과 한성상무총서를 비교해보면 직급별 인원수는 정확히 일치하 였고, 관원에게 지급하는 신수 또한 허용 범위 안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한성상무총서는 청이 주외공관의 조직 구성을 구체적으로 설 계한 첫 사례로서 주목된다. 이는 주외공관을 국가적 통제 범위 안에 둔다 는 데서 합리성을 담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험은 훗날 청 이 출사장정을 개정할 때 주외공관의 조직 구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변 화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성상무총서는 판리조선상무장정을 그 허용 범위 안에서 다소 유연하게 적용하였다. 특히 총판상무위원 진수당의 신수가 20% 가량 줄어 든 것이 눈에 띈다. 이는 한성상무총서를 신축하는 데 이미 많은 재정이 투입된 상황을 감안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총판상무위원은 공식 적인 신수를 제외하더라도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얼마든지 蓄財할 수 있 었으므로,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진수당은 族人을 통해 원산의 미곡 판매업에 직접 가담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 한 私利 추구 경향은 별다른 감시와 통제를 받지도 않았다.106) 따라서 한

105) 趙高峰, 앞의 글, 2011, 36쪽.

성상무총서가 판리조선상무장정을 준수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것이 곧 청 정부가 한성상무총서를 엄격히 통제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성상무총서가 개설된 후 청 상인의 활동 범위는 인천·부산·원산 등의 개항장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1884년 진수당은 이내영을 仁川, 陳爲焜과 劉家驄을 각각 부산과 원산의 商務委員으로 임명하였다. 진수당이 조선 측 에 보낸 조회에서 상무위원이 “조선 관원이나 각국 영사와 일체 평행하니 예를 다하여 상대할 것”이라고 한 것에서 볼 때, 이들은 총영사 아래 영사 의 직책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107) 이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총영사관 이 여러 영사관을 관할하는 방식이 조선에도 똑같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 인천·부산·원산에 상무서가 연 이어 개설되었다.108) 먼저 청의 對岸이 자 한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중요성 을 지닌 인천에 상무서의 건립이 이루어 졌다. 당시 인천상무서의 中門을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이 남아 있는데,109) 여기서 서양식 건축 기법이 활용된 것은

주조선상무서가 다분히 근대외교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한편 인천에 청국조계가 획정되자 인천 지역의 청 상인들은 平地工事를 감독할 董事를 선출하고 공무 처리를 위한 中華會館을 건립하였다.110) 이 후 청 상인의 활동은 본격화되었는데, 1883년 33명, 1885년 50명에 불과 하던 인천 지역의 청 상인의 수는 1886년 205명으로 급증하였다. 반면 부

106) 진수당의 私利 추구가 署理坐探委員 劉家驤의 自盡으로 이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권 인용, 「1886년 元山 劉家驤 ‘自盡案’ 初考」, 명청사연구 50, 2018 참고.

107) 「仁川駐理淸商事務官 李乃榮의 充用通報」(高宗 21年 1月 12日), 淸案 1, 27쪽 ; 「 劉家驄의 元山理事官, 陳爲焜의 釜山理事官 充當에 關한 照會」(高宗 21年 5月 14日), 淸案 1, 101쪽.

108) 인천상무서와 청국조계는 현재 인천 선린동 일대에 해당한다. 인천상무서가 있던 곳 에는 화교중산소학교가 세워져있다. 부산상무서는 현재 부산 초량동 일대에 해당한다.

109) 손장원 外, 건축으로 보는 도시 인천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09, 56-57쪽.

110) 김희신, 「淸末 駐漢城 商務公署와 華商組織」, 동북아역사논총 35, 2012, 295쪽.

[圖2-4] 仁川商務署의 전경

산과 원산 지역의 청 상인의 활동은 계속 부진하였다. 부산에서는 1883년 청 상인 2명이 일본 상인에게 점포를 빌려 영업을 시도한 것이 가장 이른 기록인데, 부산상무서가 건립되는 1884년에도 15명 수준에 머물렀다. 원 산에서는 1885년 청 상인 5, 6명이 일본인의 가옥을 빌려 영업하려고 한 것이 시초인데, 이는 원산상무서가 개설된 이후의 상황이었다.111) 이처럼 1880년대 조선에서의 청 상인의 활동은 한성과 인천에 집중적으로 이루어 졌다.112)

따라서 청이 인천상무서를 개설한 배경에는 인천의 지정학적 중요성, 조 계 건설, 청 상인의 활발한 활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 상인이 거의 없다시피 한 부산과 원산에까지 상무서를 설치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당시 청 정부는 싱가포르나 사이공과 같이 중요 한 요충지이거나 청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을 신중히 선택하여 불과 9곳 에만 영사관을 설립하고 있었다.113) 환산해 보면 주조선상무서는 이 시기 청이 설립한 주외영사관의 약 30%에 달하였다.

선행 연구에서는 청이 부산과 원산에 설치된 상무서를 주로 경제적 관점 에서 접근해 왔다. 이는 조선에서 청 상인과 일본 상인이 무역 경쟁이 격 화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청의 대외무역 에서 조선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고, 조선에서 활동하는

111) 이은상은 원산 지역에서 활동한 청 상인에 주목함으로써 華僑史의 연구 범위를 확장 하였다. 이 글에서는 원산 지역에 청 상인이 건너온 것이 1883년이라는 중화민국 원산 부영사관의 기록이 오류임을 밝히고, 실제로는 1885년 이후일 것이라 추론하였다. 이은 상, 「중일전쟁 이전 시기(1912~1936) 조선의 원산화교」, 인문과학 60, 2016, 113쪽 참고.

112) 조선에 건너온 청 상인의 상황을 개괄한 연구로는 楊昭全·孫玉梅, 朝鮮華僑史 , 北 京: 中國華僑出版公司, 1991 ; 리싱콴, 「19세기말 조선에서의 淸商 활동 연구 - 1882~1894년을 중심으로 -」, 전북사학 32, 2008이 있다. 개별 도시를 단위로 한 대 표적인 연구로는 문은정, 「20세기 전반기 馬山地域 華僑의 이주와 정착」, 대구사학 68, 2002 ; 이정희, 「20세기 전반기 대구지역 화교의 경제적 활동(1905-1955)」, 대구 사학 80, 2005 ; 이옥련, 인천 화교 사회의 형성과 전개 , 인천문화재단, 2008 ; 김태 웅, 「日帝下 群山府 華僑의 存在形態와 活動樣相」, 지방사와 지방문화 13(2), 2010 ; 조세현, 「개항기 부산의 청국조계지와 淸商들」, 동북아문화연구 25, 2010이 있다.

113) 靑山治世, 앞의 글, 2009, 101-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