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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淸通商條約의 체결과 근대외교의 개시

1898년 한청수교로 양국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59) 이 무렵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圜丘壇을 세워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는 대내 적 최고성과 대외적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서, 皇室의 尊崇을 강조 하였다는 점에서 중화질서를, 공법회통 등의 서양 국제법을 참고하였다 는 점에서 조약질서를 모두 활용한 것이었다.60) 이제 대한제국으로서는 과 거 상국이었던 청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한제국은 열강을 끌어들여 수교 압력을 가하였다.61) 러시아는 청 정부에 “귀국 정부가 어느 때, 어느 만큼의 인원을 파견할 것인지를 알려 줄 것”을 요청하였고,62) 일본도 “청국정부의 뜻이 어떠한지를 알려줄 것”

을 요청하였다.63) 곧 이어 대한제국은 2등공사를 선제적으로 파견하는 방 안을 검토하였다. 이는 당소의와의 조율 과정을 생략하고, 베이징에서 곧 장 협상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대한제국은 각국사절을 통한 우회적 압력을 동시에 가하였다.

대한제국의 전략은 주효하였다. 당소의는 대한제국과의 수교를 더 이상 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 정부가 먼저 사신을 보내 “옛 主僕의 구 분을 보일 것”을 건의하였다.64) 그러자 청 정부는 대한제국이 기어코 외교 사절을 파견하겠다면 4등공사를 보낼 수 있다고 하였다.65) 설령 대한제국

59) 한청수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유용태, 앞의 글, 2012b ; 이은자, 앞의 글, 2013 참고.

60) 이욱, 「근대 국가의 모색과 국가의례의 변화」, 정신문화연구 27(2), 2004, 70-71쪽 ; 김태웅, 「高宗政府의 獨逸帝國 인식과 近代政治體制 모색」, 역사교육 150, 2019, 231 쪽.

61) 陳尙勝, 「徐壽朋與近代中韓關係轉型」, 歷史硏究 2013(3), 2013, 57-58쪽.

62) 「總署收俄國署公使巴照會」(光緖 24年 2月 10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083쪽.

63) 「總署收日本公使矢野文雄函」(光緖 24年 4月 24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18쪽.

64) 「駐朝鮮總領事唐紹儀來電」(光緖 24年 4月 14日),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 988쪽.

과 수교하게 되더라도, 과거에 조공사절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제국의 외 교사절이 먼저 파견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4등공사를 파견하면 만국공법 에 규정된 바와 같이 군주가 아니라 陪臣이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이처럼 청 정부 가 대한제국에 근대외교를 적용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은 전통적인 상국 의식이 여전히 남아있었음을 보여준다.66)

당소의도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인식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것 때문 에라도 대한제국이 먼저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대한제국이 먼저 2등공사를 파견한다면, 청은 여타국가와 동일 선상 에 놓이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국공법 에서도 2등공사는 군주를 접 견하여 신임장을 제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당소의는 청이 선제적으로 외교사절을 파견할 것을 재차 건의하였다.

한국이 먼저 사신을 파견하면 체제에 맞는 것 같지만, 중국이 4등공사를 파견하여 조약을 상의함으로써 조정이 옛 번속을 우대하는 지극한 뜻을 보이고, 한국이 사신을 베이징에 보내 조약을 모색하려는 말을 하지 못하 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 중국은 大國이므로 한국이 먼저 사신을 京師 에 보내 조약 체결을 요구하도록 둘 수 없습니다.67)

이처럼 당소의는 청이 조선보다 먼저 4등공사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앞서 청이 일방적으로 당소의를 총상동, 그리고 총영

65) 「發駐朝鮮總領事唐紹儀電」(光緖 24年 5月 20日),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 990쪽.

66) 청은 과거의 영토, 번부, 번속에 근대외교를 적용하는 것을 기피하였다. 예컨대, 청과 대한제국의 수교 논의가 진행되던 1897년 연해주에 상무위원을 파견하였다. 이는 앞서 조선에서 상무위원을 파견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영사가 아니라 상무위원을 파견한 것은 연해주가 청의 옛 영토였기 때문이다. 비록 1860년 베이징조약의 체결로 연해주를 할양하기는 하였으나, 영사를 파견하게 되면 이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셈 이 되었다. 그러나 연해주의 상실을 되돌리기 어려워졌고 이곳에서 활동하는 청 상인이 늘어나자, 결국 1909년 상무위원을 총영사로 바꾸게 되었다. 淸季中外使領年表 , 81쪽

; 「請速議定改設領事由」(02-12-047-01-002), 出使設領 참고.

67) 「駐朝鮮總領事唐紹儀來電」(光緖 24年 6月 11日),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 991쪽 ; 「 總署奏摺」(光緖 24年 6月 2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33쪽.

사로 파견한 것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서, 청이 상국이자 대국이므로 대한 제국과의 관계를 대등하게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밖 으로는 러시아가 旅順·大連을 강점하며 瓜分의 위기가 고조되었고, 안으로 는 康有爲, 梁啓超 등을 중심으로 戊戌變法이 전개되며 체제 전반의 혁신 이 강조되었다.68)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청 정부는 대한제국에 먼저 외교사 절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69) 이로써 대한제국이 먼저 외교사절을 파견하 려던 움직임은 일단 보류되었다.

청 정부 차원의 수교 준비는 기민하게 이루어졌다. 총리아문은 대한제국 에 4등공사를 파견한다는 계획을 수립한 다음, 후보자 17명을 추려 그 명 단을 상주하였다. 이때 청 정부가 4등공사를 파견하기로 한 것은 앞서 원 세개를 4등공사로 삼은 전례를 참고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시모 노세키조약 체결 이후 서양 각국이 조선에 3등공사를 많이 파견하고 있다 는 것을 참작한 것이기도 하였다.70) 이는 청이 여전히 대한제국을 속국으 로 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이 시기 청이 해외에 파견하는 주 외공사는 모두 2등공사였기 때문이다. 즉, 청은 대한제국과 마지못해 수교 하면서도 대한제국을 상대적으로 낮은 반열에 위치시켰던 것이다. 청의 제 국성이 지닌 관성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71)

당초 광서제는 翰林院 編修 張亨嘉를 駐紮朝鮮國四等公使로 낙점하였

68) 은정태, 「1899년 韓·淸通商條約 締結과 大韓帝國」, 역사학보 186, 2005, 33쪽 ; 岡 本隆司, 「韓國の獨立と淸朝の外交」, 岡本隆司·川島眞 編, 앞의 책, 2009, 175쪽.

69) 「上諭」(光緖 24年 6月 24日),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 992쪽.

70) 17명의 후보자는 徐建寅, 黃遵憲, 徐壽朋, 楊兆鋆, 志銳, 蔡鈞, 曾廣鈞, 江標, 王同愈, 陳寶琛, 梁誠, 傅雲龍, 孫寶琦, 袁昶, 黃紹箕, 張亨嘉, 壽富였다. 黃遵憲, 徐壽朋, 梁誠 등 주외공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들이 포함되었음이 눈에 띈다. 「總署奏摺 附件一.

總署呈報淸單」(光緖 24年 6月 2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33-5134쪽 참고.

71) 청의 天朝 관념이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은 태국과의 수교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98년 주한독일영사 크리엔(Ferdinand Krien)이 태국은 중립국이고 청 상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왜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지를 묻자, 당소의는 청 정부에서 알아 서 할 일이므로 알지 못한다고 답변을 회피하였다. 중화민국 시기 태국과의 수교 협상 이 본격화되었을 때도 중화민국은 태국 군주를 ‘황제’라 지칭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總 署收駐韓唐總領事稟 附件二. 唐紹儀與俄日法德各使問答」(光緖 24年 7月 12日), 淸季中 日韓關係史料 , 5149쪽 ; 유용태, 앞의 글, 2012b, 5-7쪽 참고.

다.72) 장형가는 유학을 공부한 전통적 지식인에 속했지만, 閩學會를 통해 무술변법에 참여하는 등 개혁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장형가가 노모 봉양을 핑계로 출사를 사양하자, 광서제는 駐美參贊으로 근무한 경력 이 있는 安徽按察使 徐壽朋을 駐紮朝鮮國欽差大臣으로 임명하였다.73) 이 과정에서 직함이 4등공사에서 흠차대신으로 바뀐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디 ‘흠차대신’은 황제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고위 관료를 뜻하는 용어 였지만, 외국에 파견되는 경우에는 주외공사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 고, 그 자체로는 특정한 등급을 내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수붕 또한 4등공사였음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장형가의 사 임과 서수붕의 임명이 동일한 날 이루어지면서 공사의 등급을 논의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이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보는 인식에 변화가 나 타나지 않았던 상황에서 공사의 등급을 달리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서 수붕을 4등공사라고 명시하는 경우 대한제국은 물론 각국공사로부터 항의 를 받을 것은 明若觀火한 사실이었다. 이에 청은 서수붕의 직함에 ‘흠차대 신’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하여,74) 대한제국에 4등공사를 파견한다는 의도를 은폐하였다. 이는 같은 시기 주일공사로 임명된 황준헌의 직함을

‘2등흠차대신’으로 명시하였던 것과 대조적이다.75)

이 시기 청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대한제국 의 해관 업무를 담당하던 영국인 브라운(John Brown)이었다.76) 사실 대한 제국이 먼저 외교사절을 파견하려던 것도 브라운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청이 외교사절을 파견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대한제국의 외교 사절 파견 계획은 보류되었고 브라운의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 다. 이에 브라운은 당소의를 만난 자리에서 각종 불만을 쏟아냈다.

72) 「總署奉上諭」(光緖 24年 6月 24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35쪽.

73) 「總署奉上諭」(光緖 24年 6月 26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35쪽.

74) 「總署發各國公使照會」(光緖 24年 7月 2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39쪽.

75) 「上諭」(光緖 24年 6月 24日),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 993쪽.

76) 한국은 상당수의 서양인을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이들은 한국에 서양의 선진 제도 및 문물을 이식하는 한편, 자국의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김현숙, 근대 한국의 서양인 고문관들 , 한국연구원, 2008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