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주조선상무서와 駐津·駐滬使館의 상응 관계

조선 정부가 설립한 주진사관·주호사관은 주조선상무서와 상응 관계에 놓여 있었다.238) 먼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1조에 따라 청이 한성에 주 조선상무서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조선 또한 톈진에 주진사관을 설 치할 수 있게 되었다. 1883년 조선 정부는 金善根을 駐津大員으로 임명한 다음,239) 주진사관을 운영하기 위한 지침을 마련하였다.240) 그러나 1884 년 김선근이 稱病하며 사임하였기 때문에 南廷哲을 새로운 대원으로 삼아 톈진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이 “우리나라가 중국에 처음으로 商辨을 둔다.”고 했던 것으로 볼 때 대원은 영사급 사절로 상정되었던 것으로 생 각된다.241)

237) 청일전쟁 이전 청의 주조선상무서와 조선 정부 사이에 오고 간 공문 왕래 양상에 대 해서는 김희신, 「근대 한중관계의 변화와 외교당안의 생성」, 중국근현대사연구 50, 2011, 48-49쪽 참고.

238) 주진사관에 관해서는 자료상의 한계로 인해 파견 경위와 활동 양상 정도만이 밝혀져 있다. (권혁수, 앞의 책, 2007 ; 한철호, 「한국 근대 주진대원의 파견과 운영 (1883-1894)」, 동학연구 23, 2007 ; 孫成旭, 「1884至1895年朝鮮駐津公館考論」, 歷 史敎學 11, 2014 ; 森萬佑子, 앞의 책, 2017, 제1, 2장 참고) 주호사관의 전모에 대해 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239) 이하에서는 1883~1886년까지 파견된 김선근, 남정철, 박제순, 이 3명의 주진대원을 대원이라 약칭하도록 한다.

240) 承政院日記 에 따르면 1883년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건의에 따라 領選使의 사례를 참고하여 주진대원과 관련된 절목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1884년 진수당이 인천상무서의 地價를 “天津之朝鮮商務公署章程에 비추어 정한다.”고 한 것으로 볼 때 朝鮮商務公署章程이라 불린 듯하다. 承政院日記 (高宗 20 年 10月 6日) ; 高宗實錄 (高宗 21年 3月 7日) 참고.

톈진에는 대원 일행이 머물 수 있는 정식 공관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1882년 김윤식 등 영선사 일행이 平化寶銀 1,000냥으로 공관 마련을 부 탁하자, 이듬해 直隸津海關道 周馥이 天津郡城 紫竹林 안의 牌汊方에 기와 집 22칸, 행랑 4칸 규모의 공관을 건립해 준 것이었다.242) 이곳은 진수당 이 말한 것처럼 朝鮮商務公署 또는 朝鮮駐津商務公署로 불렸던 것으로 보 인다.243) 조선이 청에 둔 최초의 상주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 니지만, 수도인 베이징이 아니라 톈진에 세워졌고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 다는 점에서 청과 조선의 비대칭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대원의 위상 및 역할 또한 총판상무위원 진수당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대원의 주요 교섭 상대는 津海關道 周馥으로서, 이때는 평행문 서인 照會나 信函이 사용되었다. 진해관도는 북양대신의 아래에서 해관 업 무를 담당하는 관리였음을 감안해볼 때, 대원의 낮은 위상은 조선의 속국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진수당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의 독판과 바로 교섭하던 것과도 대조적이었다. 또한 대원은 자국인 보호 및 지원이라는 영사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청에 건너온 조선 인이 많지 않기도 하였거니와, 설령 조선인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단지 문건을 작성하는 역할에 그쳤기 때문이 다.244) 이에 남정철은 保定에 유폐된 흥선대원군에게 문안하고, 신식 문물 을 수용하는 데 주력하였다. 더욱이 남정철은 중요한 안건을 직접 귀국해 서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고, 일단 귀국하고 나면 국내에서 다른 관직의 업 무를 처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245) 이처럼 주진사관은 근대적 인 영사관으로 설정되었으나, 청과 조선 사이의 상국과 번속 관계에 따라 전통적인 會同館과도 중첩되기도 하였다. 남정철이 대원으로 재임하면서 三節年貢行 부사를 겸하였던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246)

241) 承政院日記 (高宗 21年 3月 17日).

242) 「天津公館建築價銀의 歸款要請」(高宗 21年 1月 22日), 淸案 1, 31쪽.

243) 高宗實錄 (高宗 21年 3月 7日).

244) 이은자, 앞의 글, 2005, 208-210쪽.

245) 한철호, 앞의 글, 2007, 59-63쪽.

246) 손성욱, 「淸代 朝鮮使館으로 본 淸·朝관계」, 동국사학 60, 2016, 245-246쪽.

1886~1887년 주진사관에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247) 남정 철의 후임 박제순이 당초 대원으로 임명되었다가 주진독리통상사무(이하 독리)로 改差되었다.248) 대원과 독리는 주진사관의 최고 책임자였다는 점 에서 동일하였으므로, 대원은 고위 관료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 명사였고, 이것이 이 시기 독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정부가 대 원을 독리로 바꾼 이유를 보여주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1884년 진수당의 바뀐 직함인 총판조선각구교섭통상사무, 1885년 조선에 부임해 온 원세개의 직함인 총리교섭통상사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 다. 1887년에는 주진사관을 운영하는 세부 규정인 駐津督理公署章程底稿 가 마련되었다.249) 이는 앞서 주진사관이 건립될 때 통리군국사무아문이 마련한 절목은 상당히 간략하였기 때문에 보다 세부적인 지침을 마련할 필 요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국통례를 참작하여 다음과 같이 장정을 입안한다.

1. 중국조선무역장정에서는 조선이 大員을 톈진에 파견하여 주재하도록

247) 森萬佑子는 해외각국에 전권대사가 파견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續章程을 통해 대대적으로 개편되며, 주진대원이 주진독리로 바뀌는 1886~1887년을 조선 정부의 대 외 관계에 나타난 하나의 劃期로 간주하였는데, 이를 反淸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조약질서에 대한 대응 또는 조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森萬佑子, 앞의 책, 2017, 제2, 3장 참고.

248) 高宗實錄 (高宗 23年 2月 21日).

249) 駐津督理公署章程底稿 의 소장처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는 편찬 연도를 1883 년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나, 이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이 만든 초안, 즉 조선상무공서장정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진독리공서장정의 서문에서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이 啓下한 事 目이 세부 장정을 마련하지 않아 여러 후임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1887년 4월 承政院日記 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사무가 복잡하고 원 래 정한 章程이 소략한 점이 많으므로 협의하고 변통해서 영원한 정식 규정을 만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續章程을 작성하여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속장정 이 주진독리공서장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1887년 8월에는 박제순이 사임하여 2년 가까이 주진독리통상사무가 부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진독리공서장정이 마련되어 주진사관에 적용된 것은 1887년 4월에서 1887년 8월 사이의 시점이라 비정할 수 있 다. 일단 본고에서는 규장각에서 밝히고 있는 편찬 연도를 따르도록 한다. 한철호, 앞의 글, 2007, 53쪽 ; 孫成旭, 앞의 글, 2014, 24쪽 ; 承政院日記 (高宗 24年 4月 28日) 참고.

하고 각지에는 他員을 파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조선이 派員하여 톈진에 주재하도록 하는 것은 각국이 영사를 두는 명목과 같다.

1. 독리 1명과 종사관 1명은 총리대신이 주청하여 파견한다. … 서양 통 례에서 부영사를 맡은 자는 재정 사무를 겸임하는데, 종사관은 독리를 보좌하므로 각국 부영사와 체제가 서로 같다.

1. 公例는 공사와 영사를 모두 3年 1任으로 규정한다. 모든 인원은 급한 일이나 병으로 귀국한 경우 외에는 무단으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250)

주진독리공서장정은 각국통례, 즉 서양 국제법을 토대로 기초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주진사관에서 근무하는 관원의 임기를 3년으로 규정하 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주진사관의 독리와 종사관은 각각 영 사와 부영사에 비정되었다. 따라서 이는 조선 정부가 주진사관에 주외공관 의 성격을 명확히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진독리공서장정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주진사관은 확연히 영사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초대 독리 박제순이 각국영사에 자신의 취임 사실을 통지한 것은 이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전히 독리는 북 양대신 아래의 진해관도와 조회를 주고받음으로써 청과 조선 간의 상하 관 계를 반영하고 있었지만, 각국영사와 조회를 주고받음으로써 해외 각국과 는 평행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251)

그럼에도 주진사관이 주외공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많은 어려 움이 뒤따랐다. 이는 주진사관의 최고 책임자였던 독리의 임면 상황을 통 해 엿볼 수 있다.252)

250) 駐津督理公署章程底稿 .

251) 森萬佑子는 朴齊純과 李冕相 재임 기간 왕래한 문서의 날짜, 형식, 수발신인, 내용을 조사한 결과, 대원과 독리는 종속관계와 관계된 업무는 물론 영사와 유사한 업무를 함 께 추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원과 독리가 외국영사와 주고받은 문서를 영사 업무 로 분류하지 않은 탓에, 박제순과 이면상의 영사로서의 성격이 다소 강조되지 않은 문 제점이 보인다. 森萬佑子, 앞의 책, 2017, 제2장 참고.

252) 高宗實錄 (高宗 23年 1月 29日) ; 高宗實錄 (高宗 24年 6月 9日) ; 高宗實錄 (高 宗 24年 11月 14日) ; 高宗實錄 (高宗 25年 1月 29日) ; 承政院日記 (高宗 26年 5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