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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理交涉通商事宜 원세개의 위상과 활동

19세기 후반 청의 변경 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이에 청에서는 군사력 을 동원하여 藩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서북 방면의 伊犁 지역과 동남 방면의 베트남에 대한 청의 대응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 례라 할 수 있다. 1870년대 초 코칸드의 야쿱 벡(Yaqub Bek)이 이리 지 역을 점거하여 청의 판도로부터 이탈하였다. 러시아 또한 자국 상인 보호 를 명목으로 이리 지역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청은 左宗棠을 흠차대신으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야쿱 벡 세력을 축출하였으나, 1879년 청의 전권대신 숭후가 리바디아조약에서 러시아에 광활한 영토를 넘겨주는 데 합의하고 말았다. 이에 청은 1881년 증기택이 체결한 상트페테르부르크조 약으로 이리 지역을 회수한 후 新疆省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변경 지역에 대한 청의 통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119) 그동안 청은 서북 지역을 번부로 삼아 理藩院을 통해 간접 지 배해 왔다. 따라서 이곳에 정식 省을 설치한 것은 內地로 삼아 직접 지배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1885년 臺灣省, 1907년 東三省이 설치되었다.

청이 이리 문제를 해결하느라 분주한 시기 프랑스가 베트남으로의 진출 을 본격화하였다. 1862년과 1874년의 사이공조약으로 베트남은 다낭(Đà Nẵng), 꽝옌(Quang Yên), 바랏(Ba Lạt)을 개항하고 프랑스에 코친차이나 지역을 할양하였다. 이에 베트남은 청에 조공사절을 보내 옛 중화질서의 힘을 빌리는 한편, 劉永福이 거느리는 黑旗軍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군을 驅逐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때도 이홍장이 海防의 미비를 이유로 외교

119) Immanuel Hsü. The Ili crisis; a study of Sino-Russian diplomacy, 1871-1881, London : Oxford Univ. Press, 1965, pp.189-196 ;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 과 좌절 , 사계절, 1999, 3-6장.

협상을 통한 사태 해결을 꾀하자, 이홍장을 탄핵하고 전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때마침 공친왕이 실각하면서 주전 파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고, 결국 청은 프랑스와의 개전을 결정하였다.

청군은 일시적으로 鎭南關과 諒山 등지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기도 하였으 나, 복건함대가 궤멸하고 복주선정국이 파괴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 다. 결국 양국은 톈진조약을 맺어 전쟁을 종결하였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청의 조선 정책에는 질적 변화가 나타났다.120) 그동 안 청은 조선에 대한 상국 지위를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하면서도, 조 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주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청이 번속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왕위 계승 분쟁이나 반란 등의 사안에 국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을 藩屛으로 유지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서, 청은 조선을 서양 국제법상 상국에 의존하는 半主之國, 즉 근대적 속국으로 삼으려는 움직임 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진수당의 직함이 총판상무위원에서 總辦朝鮮各口交涉通商 事務(the Chinese Commissioner for Diplomatic and Commercial Affairs)로 변경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84년 이홍장은 진수당이 현재 직함으로는 열강과의 교섭에 나서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새 직함이 새겨진 關防을 내려주었다.121) 그런데 광서제나 총리아문 선에서 논의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오로지 “奉北洋大臣行知”라고 한 것으로 볼 때122), 이것은 이홍장의 독단적인 조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프랑스와 개전한 직 후의 상황에서 베트남과 유사한 상황이 조선에서 벌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 지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주조선일본대리공사 시마무라 히사시(島村 久)는 “단순히 그 명칭만이 바뀐 것이고 職掌은 여전히 예전처럼 총영사에

120) 김형종, 앞의 글, 2017, 240쪽.

121)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0年 9月 2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490쪽.

122) 統署日記 (高宗 21年 8月 26日).

해당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평가하였지만,123) 이홍장은 진수당이 통상뿐 만 아니라 교섭 사무까지 처리할 것을 기대하였다.

이 무렵 한성상무총서에 幇辦이 신설되어 譚賡堯가 임명된 것도 진수당 의 위상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124) 방판은 參贊과도 통하는 말이었는데, 참찬은 공사관에서 공사를 보좌하는 직책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방판이 용 산상무위원을 겸임하여 통상 사무를 담당하면서, 총판조선각구교섭통상사 무는 교섭 사무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는 총판조선각구 교섭통상사무 진수당이 공사, 용산상무위원 담갱요가 영사로 분화될 가능 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조선상무서의 위상 변화는 조선 측에도 포착되었던 것으로 보 인다. 1885년 統署日記 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각국공관에 조회를 보낸 사실에 대해 “照會于中日德美各公館”라 기록하였다.125) 주조선상무서 를 陳館이라 하지 않고 中館이라 불러 각국공사관과 평행하게 기재하고 있 음이 눈에 띈다. 김윤식 또한 “각국은 조약에 따라 공사를 파견하여 주재 하도록 하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은 공사라 하지 않고, 독리상무위원을 파 견하여 주재하도록 한다.”라고 하였다.126) 조선에서도 진수당을 외교 교섭 권한을 가진 공사라 인식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수당은 청 정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진수당은 양무를 추진한 경험은 있었으나 복잡한 외교 현안을 처리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1884년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진수당은 사건 현장을 목격했던 만큼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수당은 형세를 관망하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진수당의 태도는 주조선미국공사로부터 “일본인이 곧 전쟁의 단초를 열지 않을까 크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혹평을 받았다.127) 원세개가 독단적으로

123) 「陳總辦의 關防刊換에 對한 照會」(高宗 21年 9月 5日), 日案 1, 157쪽.

124) 「譚賡堯의 幇辦任命에 關한 照會」(高宗 21年 7月 5日), 淸案 1, 159쪽.

125) 統署日記 (高宗 22年 5月 15日).

126) 「追補陰晴史」, 續陰晴史 下, 563쪽.

127) 尹致昊日記 (1884年 10月 25日).

청군을 이끌고 급진개화파를 무력 진압한 다음에도, 진수당은 “일본과 싸 워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며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128) 1885 년에는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하였다.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를 위해 조선에 군사 교관을 파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대외 정세의 변 화는 청의 상국 지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으므로, 이홍장은 진수당 으로 하여금 사건 조사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진수당은

“거문도 문제와 러시아 스페이에르의 來韓조차 보고하지 않을 정도로 재능 과 기력이 없는 인물”이라 비판받을 정도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 다.129) 그의 별명 ‘無骨海蔘’은 이러한 우유부단함에서 유래하였다.130)

이때 일본 外務卿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는 청 정부에 조선을 공동 보 호하자는 요지의 「朝鮮外務辦法」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청은 조선이 속국 이라는 것이 한낱 허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으므로, 일본 의 공동 보호 제안을 모두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진수당보다 유능 한 인물을 파견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조선외무판법」 6항의 내용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131) 이는 청 정부에서도 그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고,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될 위험성도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주재하고 있는 道員 진수당은 근후하고 신중하고 침착하나 재주 가 부족하고 스스로만 옳다고 판단합니다. 앞서 진수당을 파견한 것은 오 로지 통상 문제를 돌보기 위함이었지 국정에 간여하도록 하지는 않았습 니다. 조선은 번속이지만 만약 大員을 파견하면 조선 왕은 이를 기피하여 체제 역시 합의되지 않을 것이고, 한성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 모두의 구 설수에 오를 것입니다. 마땅히 현재 의논하는 바가 결정되기를 기다려 서 서히 바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132)

128) 尹致昊日記 (1884年 11月 15日).

129) 「先後商議」, 日淸交際史提要 . 130) 「甲申日錄」(1884.11.03.).

131) 구선희, 「청일전쟁과 조선」, 구대열 外,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 동북아역사재 단, 2018, 467-469쪽.

132) 「復總署 論朝鮮國政」(光緖 11年 5月 26日), 李鴻章全集 33, 504쪽.

1885년 진수당은 본국에 소환된 후 즉각 경질되었다. 이에 따라 진수당 은 3년 임기를 모두 채우지 못한 채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진수당은 조선 에서 근무한 공적을 인정받아 2품으로 승진하였다고 전하지만,133) 새로운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청 정부로부터 중용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후 주조선상무서에 부임한 원세개, 당소의 가 귀국한 후 고위 관료로 임명되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홍장은 진수당의 후임으로 원세개를 낙점하였다. “오장경과 함께 군사 를 이끌고 건너가 왕경에 오래 머물면서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진압하여 조선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134) 그 밖에 崔藥局命案 등 조선과의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기에,135) 오장 경 휘하에 있던 인사들은 그가 “北洋의 이름을 빌려 조선의 用人과 모든 행정의 권리를 간섭하려 든다.”며 견제할 정도였다.136) 이홍장은 원세개로 하여금 흥선대원군과 함께 조선에 가도록 하였다. 이는 흥선대원군을 통해 원세개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면서도 고종과 왕비 민씨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는데, 독일총영사 부들러(Hermann Budler) 또한 “청은 조선에서 보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라고 전망하였다.137) 이처 럼 원세개에는 진수당과는 다른 역할이 기대되었으므로, 그의 직함 변경이 논의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번속에는 영사를 설립하는 전례가 없지만, 서양 각국 통례에서 대다수는 133) 「附 淸單」(光緖 11年 9月 28日), 李鴻章全集 11, 209쪽.

134) 「派員接辦朝鮮事務摺」(光緖 11年 9月 21日), 李鴻章全集 11, 203쪽.

135) 권인용은 1884년의 ‘崔藥局 命案’과 ‘李範晉 毆打事件’을 진수당과 원세개의 권력 관 계가 변화하는 중요한 계기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진수당과 원세개는 서로 다 른 계열의 직책에 있었기에 동일선상에서 권력 관계를 비교할 수 없다는 점, 1884년 말 원세개가 자국 장수들의 비난을 받는 과정에서 모친의 병을 핑계로 귀국하였다는 점 을 고려해볼 때, 원세개가 조선에 파견된 인사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권인용, 「1884년 ‘崔藥局命案’의 재구성」, 아세아연구 57(1), 2014a ; 권인용, 앞의 글, 2014b 참고.

136) 김성남, 「吳長慶軍營과 그 막료들」, 대동문화연구 74, 2011, 335-336쪽.

137) 「인물들 및 정치정세에 관한 메모(부들러 → 비스마르크)」(1885.10.12.), 독일외교 문서 한국편: 1874~1910 3,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