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조선상무서의 위상은 조선 정부가 대외 교섭을 총괄하도록 한 統理交 涉通商事務衙門, 그리고 청과의 긴밀한 의사소통을 위해 톈진에 설립한 駐 津使館과의 관련성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전자는 주조선상무서 와 교섭하는 창구였고, 후자는 주조선상무서에 상응하는 기구였다는 점에 서 그러하다. 따라서 주조선상무서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진사관과의 관련성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이 시기 한청 근대외교의 성격을 더욱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1881년 조선 정부는 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핵 심 기구로 삼았다. 이는 임오군란으로 잠시 폐지되었다가 곧 內·外衙門으 로 분설되었는데, 그 중 외아문에 해당하는 것이 統理衙門이었다. 1883년 통리아문은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개칭된 이래 갑오개혁으로 8衙門 체제가 갖춰져 外務衙門이 생겨날 때까지 존속하였다.224) 이때 고종이 “외 교 업무가 시작된 이 시기에 관할하는 관청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듯,225) 외국과의 조약 체결이 본격화되는 상황 속에서 통리교섭 통상사무아문과 같이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를 두는 것은 불가피한 일 이었다.
224) 統理機務衙門에 관한 연구는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전해종, 「統理機務衙門 設置의 經緯에 대하여」, 역사학보 17·18, 1962 ; 이종춘, 「統理機務衙門에 對한 考察」, 제주 교육대학교 논문집 3, 1968 참고) 이를 토대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진행되었다. (전미란,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關한 硏究」, 이대사원 24·25, 1989 ; 구선희, 「개항기 관제개혁을 통해본 권력구조의 변화」, 한국사학보 12, 2002 ; 酒井裕美, 開港期朝鮮の戰略的外交(1882~1884) , 大阪大學出版會, 2016 ; 森萬佑子, 앞의 책, 2017 ; 김수암, 「근대 외교제도 및 관서의 발전」, 구대열 外, 앞의 책, 2018 ; 유바다, 「交隣에서 外交로 :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外交의 국제법적 권능과 한계」, 한 국사학보 77, 2019 참고)
225) 高宗實錄 (高宗 19年 11月 17日) ; 高宗實錄 (高宗 19年 12月 4日).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4司1學(掌交司·征榷司·富敎司·郵程司·同 文學) 체제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 중 장교사만이 대외 교섭과 외교사절 파견, 조약 개정을 담당하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海關·鑄貨·電報·學校 등 근대 문물 수용과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의 모델이 되었던 청의 총리아문이 洋務를 처리하는 기구로서의 성격이 강 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갑신정변 이후 郵政 局·鑛務局 등 근대 문물 수용을 담당하는 기구를 별도로 창설하기 시작하 는 과정에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또한 외교 기구로 발전할 수 있는 환 경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887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체제는 대폭 개편되었다. 이때 조선 정 부가 마련한 續章程에 따르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6司(總務司·通商司·
交涉司·飜譯司·記錄司·會計司)로 구성되었다. 6사는 통상·조약·주외공관·번 역 등 외교 관련 사무만을 나누어 맡았으므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외 교 기구로서의 위상을 한층 더 갖출 수 있었다. 그 밖에 외교 실무를 담당 하는 主事가 늘어나는 변화도 있었다. 이 시기 內務府에 소속된 職制司가 주진대원과 주미공사 파견을 처리하는 등, 조선 정부의 외교 사무가 모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통해서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226) 그러나 이것 을 단지 反淸自主外交의 노력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외교채널 이 多元化되어 있는 것은 전통외교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227) 아직까 지 청에서도 총리아문 외에 禮部, 북양대신 등이 외교 사무를 나누어 맡고 있었다.
그러나 청이 제국성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자주 성이 침해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진수당 재임 시기에 비해 원세개 재임 시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이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226) 한철호, 「閔氏戚族政權期(1885~1894) 內務府의 組織과 機能」, 한국사연구 90, 1995, 28-32쪽.
227) 내무부가 통사권을 행사한 것에 대해 조선의 외교가 여전히 중세적 틀 안에서 운영 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유바다, 앞의 글, 2019, 19쪽 참고.
거쳐 간 督辦들의 면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228)
督辦 任期 海外派遣 自體昇進 總辦·總理
趙寧夏 1883.1.~1883.2. 淸(陳奏使)
陳樹棠 閔泳穆 1883.2.~1884.4. 淸(冬至使)
金炳始 1884.4.~1884.10. 淸(陳奏使) 金弘集 1884.10.~1884.12. 日(修信使)
淸(陳奏使) ○
趙秉鎬 1884.12.~1885.1. 日(修信使)
金允植 1885.1.~1887.7. 淸(領選使) ○
袁世凱 徐相雨 1887.7.~1887.9. 日(全權大臣)
淸(冬至使) ○
趙秉式 1887.9.~1888.8. 淸(陳奏使) 閔種默 1889.7.~1892.11. 淸(冬至使·陳奏使)
日(朝士視察團)
趙秉稷 1892.11.~1893.5. 日(朝士視察團) ○ 南廷哲 1893.5.~1893.12. 淸(駐津大員) ○ 趙秉稷 1894.1.~1894.7. 日(朝士視察團) ○
<表2-6>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督辦의 임면
조선 정부가 임명한 독판은 모두 양반 신분으로 문과에 합격한 전통적 지식인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청이나 일본을 다녀온 경력을 토 대로 대외 교섭을 책임지는 독판에 임명되었다. 한편 원세개 재임 시기에 는 협판을 거쳐 독판으로 자체 승진한 인물이 늘어났다. 통리교섭통상사무 아문이 외교 실무에 익숙한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근대외교의 흐름에 발맞 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독판이 친청적 경향을 띠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조 영하와 민영목은 갑신정변 때 수구파로 지목되어 피살되었다. 김윤식은 원 세개와 친분이 두터워 그의 비호를 받으며 가장 오랫동안 독판으로 재임하 였다.229) 김홍집과 김병시는 고종이 박정양을 주미공사로 파견하는 것을
228) 전미란, 앞의 글, 1989, 228쪽을 토대로 독판의 경력을 추가 조사하여 작성.
반대하였고, 조병식은 ‘乳兒拉致’ 소문이 돌 때 고종 대신 원세개가 유언비 어를 금하는 榜文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며,230) 조병직은 조선 정부가 데니의 힘을 빌려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원세 개에 밀고하였다.231) 이에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유력 인물이 모두 “공공연히 청을 추종하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232) 이 처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이 지닌 친청적 경향은 조선이 청과 관 련된 사안에서 협상력을 갖추기 어렵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독판이 단기간 재임하고 교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는 대내적으 로는 정치적 격변이 빈발하고, 대외적으로는 열강의 압력이 거세지고 있었 기 때문이다. 또한 청의 조선에 대한 간섭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독판의 운 신의 폭이 제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 윤치호는 “외 아문은 다른 아문에 비하여 공무가 배가 많고 외국과 교섭 통상하는 이해 를 판결하는 아문입니다. … 외국인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일을 의논하는 자는 외아문에 가서 독판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고 모두 묄렌도르프와 의논 하여 결정합니다.”라고 술회하였다.233) 독일총영사 켐퍼만도 “외국 대표가 외아문에서 사소한 도움이나 정보를 얻으려 하는 경우에도 그 관청의 수장 에게서는 거의 뜻을 이루기 어렵습니다.”라며 불만을 표시하였다.234) 이처 럼 독판이 빈번하게 교체되는 상황에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제대로 된 협상력을 갖추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처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독립된 외교 기구로 나아가기 어려웠던 현실은 주조선상무서와의 관계 속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판리조 선상무장정에 따르면 총판상무위원은 통리아문과 평행조회를 주고받도록
229) 박은숙, 「김윤식과 원세개·이홍장·주복의 교류(1881~1887)」, 한국사학보 61, 2015b.
230) 정경민, 「조선의 초대 주미조선공사 파견과 친청노선 강화」, 역사와 현실 96, 2015
; 박한민, 「1888년 ‘유아납치’ 소동의 전말과 각국의 대응」, 역사와 현실 109, 2018.
231) 「北洋大臣來電」(光緖 15年 6月 1日),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 212-213쪽.
232) 井上角五郞, 漢城之殘夢 , 31쪽.
233) 尹致昊日記 (1884年 5月 2日).
234) 「조선 국왕의 자주성에 대한 청국 공사의 공격(켐퍼만 → 비스마르크)」(1886.08.24.), 독일외교문서 한국편: 1874~1910 3, 234쪽.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원세개가 총리교섭통상사의로 부임한 이후에도 마 찬가지였다. 그런데 청과 조선의 관제로 보자면, 총리아문과 통리아문이 군주 직속의 대외 교섭 기구라는 점에서 동일한 반열에 놓였다. 그리고 총 리아문과 북양대신이 평행하였으므로, 북양대신의 지휘를 받는 한성상무총 서는 통리아문보다는 하급 기구에 해당하였다. 더욱이 총판상무위원 진수 당은 총영사, 총리교섭통상사의 원세개는 총영사 겸 4등공사에 불과하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성상무총서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평행조회 를 주고받도록 한 것은 청과 조선 간의 상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로 써 전통적 咨文을 사용하는 일이 점차 사라지고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조회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광서제를 지칭할 때 臺頭하는 형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원세개가 호조 발급을 요청할 때는 조회 대신 信函이 라는 비공식 수단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235) 이는 편의를 위한 것이 기도 하였지만 주조선상무서의 실질적 위상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압 도해 간 사정을 방증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프랑스공사 플랑시가 본국에 보낸 보고문에서도 “북경의 總理衙門을 본받아서 만들어진 이 관청은 총리 아문처럼 계급의 최고 등급인 사람 중의 한 명인 왕자가 담당하여 관리하 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때로는 2품에 속하는 관리가 우두머리로 있 고, 현재로는 3품에 속하여 자연히 모든 대신들과 정승들의 밑에 있게 됩 니다.”라고 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지위가 낮은 문제를 지적하였 다.236)
한편 원세개가 한성상무총서에 부임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주지하는 데 주력하면서, 한성의 商務는 신설된 용산상무서가 처리하였다. 이 시기 한성에 주재하던 외국총영사는 漢城府 判尹과 평행조회를 주고받고 있었 다. 그런데 한성부 판윤은 正2品에 해당하는 고위관료였으므로, 외국총영
235) 조선과 청이 주고받은 외교문서의 형식과 내용 변화에 대해서는 김봉준, 「近代 朝淸 關係 外交文書의 基礎硏究 :『華案』(1883-1905)을 中心으로」,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7 참고.
236) 플랑시, 「외아문 독판의 낮은 직위와 그로 인한 어려움에 대한 보고」(1889.07.10.), 프랑스외무부문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