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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한청통상조약을 통해 청과 대한제국은 주외공관을 설치할 수 있 는 규정을 새롭게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비해 평등성이 대폭 강화된 것이었으므로, 이후 한청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 어들기 시작하였다. 한청통상조약에 포함된 주외공관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2관. 이번에 통상 우호 조약을 맺은 뒤 양국은 각자 秉權大臣을 파견하 여 피차 수도에 주재시키고 아울러 통상항구에 영사 등의 관원을 보내는데 모두 편의에 따를 수 있다.

제5관. 한국에 있는 중국 인민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중국영사관이 중 국의 법률에 따라 심판하여 처리하고, 중국에 있는 한국 인민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한국영사관이 한국의 법률에 따라 심판하여 처리한다.95)

한청통상조약은 서수붕이 대한제국으로 건너올 때 준비해 온 韓國通商約 稿를 底本으로 하였다. 그리고 한국통상약고는 조선이 서양 각국과 체결한 조약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었다.96) 청 정부가 대한제국과의 수교를 신속히 처리하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청통상조약은 서 구 열강의 조약을 참고하여 합리성을 대폭 강화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외교사절은 톈진이 아니라 수도 베이징에 상주하게 되었고, 청과 대한제국 은 片務的이 아닌 雙務的 영사재판권을 행사하게 되었다.97) 이로써 그동안 계속되어 온 양국 관계의 비대칭성은 원칙적으로 부정되었고, 한청관계가 수직적인 중화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인 조약질서에 토대를 둘 수 있는 여건 도 함께 마련되었다.98)

95) 「韓淸條約卷」(01-41-055-06), 駐韓使館保存檔案 .

96) 「出使韓國大臣徐壽朋奏擬具與韓通商約稿繕單呈覽摺」(光緖 24年 9月 24日), 淸光緖朝 中日交涉史料 , 997쪽.

97) 조미수호통상조약, 한청통상약고, 한청통상조약의 구성 체계를 비교한 연구는 이재석,

「한청통상조약 연구」, 대한정치학회보 19(2), 2011 참고.

98) 20세기 초 청에서는 종주권이 아니라 주권에 의존하여 국가 안위를 지켜가려는 움직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서수붕은 전권대신에서 주한공사로 바뀌어 임 명되었다. 대한제국 外部가 議約大臣을 곧장 駐紮使臣으로 인정할 수 없다 고 항의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의 직함은 ‘駐紮韓國大臣’, ‘出使韓國大臣’

으로 변경되었다.99) 그런데 여기서도 서수붕의 직함에 공사의 등급이 드러 나지 않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管見으로는 주한공사의 등급이 명시된 사료를 찾아볼 수 없다. 당초 청 정부는 서수붕을 4등공사로 상정하였지 만, 서수붕이 고종에 직접 국서를 봉정하고 조약을 체결하였으므로 사실상 2등공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수붕을 4등공사라 명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만, 이것이 곧 2등공사임을 명시하는 것으로 이어지 지는 않았다. 이는 마치 청 정부가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캬흐타조약을 체 결한 후 한문 번역본에서 양국 간의 상호 대등한 관계를 은폐한 것을 연상 케 하는 것으로,100) 옛 속국이었던 대한제국과 상호 대등한 관계를 체결하 고서도 이를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으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청의 주한공관은 서수붕이 말한 바와 같이 “이제는 정식으로 국 교가 확립되었으므로 한국과 중국 간의 교섭 사무는 중국인 관원이 처리하 도록 하며, 거듭 영국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101) 또한 이 시기 청 에서 본격화된 외교 제도 개편은 주한공관에 합리성을 더해주었다. 이는 먼저 청의 주한공사 임면 상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02)

임이 두드러졌다. 1904년 청은 영국과 티베트를 둘러싼 협상을 전개하면서 종주권이 아니라 주권을 명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만약 청이 주권 대신 종주권을 지닌다면 명목 상으로는 상국의 지위를 갖게 되겠지만, 과거의 한국, 베트남, 류큐 등의 속국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티베트를 잃게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때 청측 대표가 다름 아 닌 당소의였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청의 안위를 지키 기 위해서는 번부와 속국에 대해 종주권이 아니라 주권을 지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카모토 다카시, 「“主權”의 형성」, 중국근현대사연구 54, 2012, 31쪽 참고.

99) 「總署奏片」(光緖 25年 11月 9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284쪽 ; 「總署奏片 附件一.

總署擬致韓國國書」(光緖 25年 11月 9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284-5285쪽.

100) 구범진, 앞의 책, 2012, 4장.

101) 「爲派員責送約本由」(01-41-055-03), 駐韓使館保存檔案 , 7면.

102) 淸季中外使領年表 , 30쪽.

1899年 1900年 1901年 1902年 1903年 1904年 1905年

12月 8月 1月

徐壽朋 許台身 曾廣銓

<表3-3> 駐韓公使의 임면

초대공사 서수붕은 3년 임기를 마치기 직전 외무부 좌시랑으로 전출되었 다. 그러나 서수붕은 앞서 대한제국과 수교 협상을 진행하느라 1년 이상 머물렀기 때문에, 이를 포함하면 사실상 3년가량 근무한 셈이었다. 서수붕 의 후임 허태신은 3년 임기를 모두 마쳤다. 허태신의 후임 증광전이 1년 만에 귀국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전적으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 탈하고 각국공사관을 철수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의 주한공사 파 견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한공사의 관 품은 조금씩 낮아졌다. 서수붕은 조약 체결을 위해 파견되었을 때는 3품이 었다가 주한공사로 임명되면서 2품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허태신은 4품, 증광전은 5품의 하급 관료에 불과하였다. 이는 청에 있어 대한제국이 갖는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주한공사의 출신 배경에서도 유의미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주한공사는 모두 유학을 공부한 전통적 지식인 출신이었다. 서수붕은 貢生으로서 捐納 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安徽按察使를 지냈다. 허태신은 監生 출신으로 候補知府에 올랐다. 증국번의 손자이자 증기택의 아들이었던 증광전은 候 補五品京堂이었다. 같은 시기 주일공사 裕庚, 楊樞도 모두 국자감 출신이 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103) 청은 대한제국과 일본을 同文同種으로 인식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한공사 모두 서양 국제법 분야에 풍부한 경 험을 갖춘 인물이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주한공사로 부임 하기 전 이미 주외공관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수붕은 1881~1884년 주미참찬, 곧이어 1884~1886년 주페루참찬을 지냈다. 허 태신은 1898년 서수붕이 주한공사로 부임할 때 주한참찬을 맡았고, 1900 년 서수붕이 자리를 비웠을 때는 잠시 그를 대리하였다. 증광전은 어린 시

103) 김종성, 「淸末 중국 외교관들의 교육배경」, 인문과학 47, 2011, 212-213쪽.

절 부친 증기택을 따라 유럽 각지에서 생활하였고, 1894~1896년에는 주 영참찬을 지낸 후 귀국하여 1901년 이홍장과 함께 신축조약의 체결을 이 끌어 낸 바 있다.104) 이처럼 참찬을 지냈거나 외교 사무에 능숙한 자를 공 사로 임명하는 것은 여타 공사관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러한 흐름 은 주한공사관에도 이어져 외교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사가 주한공사에 임명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주한공사들이 대한제국과의 교섭 사무 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서양 국제법과 한청통상조약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이는 진수당, 원세개, 당소의가 청의 종주권에 의존하던 것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이를 주한공사의 활동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주한공사는 청일전쟁으로 급격히 위축된 청 상인을 지원하는 데 힘 썼다. 이 과정에서 청과 대한제국 사이에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청 상인의 內地通商 문제였다.105) 한청통상조약 제8관은 “중국 인민이 여권을 수령하 고 한국의 내지에 가서 유람하고 통상하는 것을 허가한다. 다만 坐肆는 허 락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청 상인의 내지통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 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제4관 제4절 “양국 상민은 양국의 通商口岸 경 계 밖에서 토지를 빌리거나 가옥을 임차하거나 점포를 개설할 수 없다.”에 도 포함되었다.106) 서수붕은 “대한제국 백성이 원치 않아 각종 방법을 동 원하여 방해할 것이지만 조약에 이미 명시되어 있으므로 거스를 수 없을 것”이라 낙관하고 있었지만,107) ‘좌사’와 ‘통상구안’은 양측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한 단어였으므로, 향후 일어날 격렬한 분쟁 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00년 대한제국의 外部는 청 상인이 통상구안 밖에서 점포를 개설하거

104) 서수붕, 허태신, 증광전의 경력은 臺灣中央硏究院의 人名權威檢索系統 데이터베이 스(http://archdtsu.mh.sinica.edu.tw/imhkmc/imhkm) 참고.

105) 未開口岸 통상 문제에 관한 청과 대한제국 간의 분쟁에 대해서는 구범진, 앞의 글, 2006 참고.

106) 「出使大臣太僕寺卿徐壽朋奏報議定中韓商約摺 附件一. 中韓商約淸單」(光緖 25年 6月 19日),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 1008-1009쪽.

107) 「總署收出使大臣徐壽朋函」(光緖 26年 1月 27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302쪽.

나 가옥을 임차하는 경우 관련 규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이 에 서수붕은 한청통상조약 제8관에 따라 점포 개설은 금지되는 것이지만 가옥 임차까지 금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항의하였다. 그러자 외부서리대신 민종묵은 한청통상조약 제4관 제4절을 근거로 점포 개설은 물론 가옥 임 차까지 금지되는 것이라 반박하였다.

이윽고 양측의 논쟁은 ‘통상구안’에 대한 해석으로 확대되었다. 서수붕은 한청통상조약 제4관 제4절이 통상구안에만 적용되는 것이지 내지에 적용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민종묵은 통상구안뿐만 아니라 내지까지 모두 적용되는 것이라고 논박하였다. 이후에도 양측의 설전은 계속되었지만 명 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청과 대한제국이 동일 한 조항을 놓고도 각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양측의 입장 차가 좁혀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02년 내지통상의 불씨가 재차 발화하였다. 安城郡官이 청 상인의 洋貨에 과세하는 과정에서 洋布를 압수한 일이 발단이 되었다. 허 태신이 이를 해관에서 납세한 물품에 대한 중복 과세라고 항의하자, 외부 서리대신 조병식은 坐肆로 인한 벌금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자 허태신은

‘本郡場市各項稅錢’이라 적힌 引文과 안성군수의 訓令을 증거로 제출하며, 이것이 벌금이 아니라 과세의 성격임을 입증하였다. 영국 물품에 대해 과 세한 것은 주조선영국공사관에서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조병식은 안성군수가 벌금을 과세로 착각한 것은 사실이나, 청 상 인이 조약을 위반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성군수가 미숙하게 업무를 처리한 정황이 입증되었고, 영국과의 분쟁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양포를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제국은 청 상인의 내지통상을 강경하게 단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108) 이 로써 증광전이 “일본 상인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상업 규모가 가장 큽니 다.”라고 보고할 만큼 청 상인의 활동 범위는 날로 확대되었다.109)

108) 구범진, 앞의 글, 2006, 196-205쪽.

109) 「外務部收駐韓曾大臣文 附件一. 出使大臣曾廣銓奏摺」(光緖 31年 8月 2日), 淸季中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