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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의 재임 시기 주조선영사서의 운영 양상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당소의가 귀국한 동안 주조선상무서 건물은 방치되 어 있었다. 이는 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 여주는 장면이다. 1896년 총상동으로 파견된 당소의는 일단 옛 인천상무 서로 들어가 대외 활동을 자제한 채 건물 내외의 수리에 몰두하였다. 다음 은 일본영사관 관원이 당소의의 동정을 보고한 내용이다.

인천으로 와 처음에 영국영사관으로 들어간 후, 淸國理事府에 들어가서 현재 오로지 府廳 내외의 수리에 종사하고 있다. 근래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본관이 방문했더니, 깊이 그 실례를 사과하고 청사가 낡아서 방문 객의 引見이 불편하여 일부러 방문을 지연했다는 뜻으로 답하였다.48)

이 시기 특정 지역의 영사로 부임하는 경우 각국사절에 통지하고 순방하 는 것이 일반적인 외교 관례로 정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소의의 공식 직 책은 아직 총상동에 불과하였으므로 각국사절과 회동하는 대신 옛 인천상 무서를 수리하면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이어 당소의는 한 성으로 이동하여 옛 한성상무총서 건물도 수리하였다. 이로써 당소의는 주 조선상무서를 복원할 준비를 마쳤다.

인천에 체류 중이던 당소의는 지난달 잠깐 上京했다. … 그가 京城에 온 무렵부터 종래 폐쇄해 두었던 洛洞의 領事館의 문□□□(특별히 잠겨 문 이 열리지 않는다) 이래 館中의 수리 등에 □□□.49) (□은 지워진 부분)

이 무렵 당소의가 총영사로 임명되면서 주조선상무서는 주조선영사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먼저 한성상무총서는 한성총영사서로 바뀌었다. 한성

48) 「仁川港 情況報告書 送付 件」(1896.6.24.), 駐韓日本公使館記錄 . 49) 「施政一班 등 보고」(1896.8.5.), 駐韓日本公使館記錄 .

총영사서와 지척에 있다는 이유로 용산상무서는 폐쇄되었는데, 이는 원세 개에 비해 당소의의 위상과 역할이 축소된 것을 방증하고 있다. 곧 이어 부산과 원산의 상무서도 복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산좌탐위원은 원산상 무위원으로 조정되었다.

그런데 청이 용산상무서를 폐쇄하고 원산상무서를 인천·부산상무서와 같 은 규모로 개설한 배경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조선에 건너온 청 상인의 활동 무대는 여전히 한성이 중심이었고 인 천과 부산이 그 뒤를 따랐다. 원산은 뱃길로도 멀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와 일본 상인과의 경쟁이 불가피한 곳이었으므로 극소수의 청 상인만이 활동 하고 있었다. 따라서 용산상무서를 폐쇄하고 원산상무서를 설치했다는 것 을 볼 때, 주조선영사서 설립에 있어 청 상인보다는 개항장이라는 요소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었고, 이는 앞서 당소의를 총영사를 일방적으로 파견했 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과의 관계를 영사 수준으로 묶어두기 위한 임시 조치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주조선영사서는 주조선상무서와 비슷한 조직 형태를 갖추고 있었 다. 이에 따라 주조선영사서는 바로 앞의 원세개 재임 시기보다, 그 앞의 진수당 재임 시기 주조선상무서와 비슷해졌다. 진수당 재임 시기의 주조선 상무서와 당소의 재임 시기의 주조선영사서의 조직 형태를 비교해보면 다 음과 같다.50)

50) 「酌擬派員辦理朝鮮商務章程」(光緖 9年 6月 25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174쪽 ;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0年 9月 2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489-1490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 附件三. 淸冊」(光緖 11年 2月 1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675-1679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0年 3月 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355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0年 4月 5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359 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0年 8月 1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478-1482 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 附件六. 淸冊」(光緖 11年 2月 13日), 淸季中日韓關係史 料 , 1687-1688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 附件七. 淸冊」(光緖 11年 2月 13日), 淸 季中日韓關係史料 , 1689-1691쪽 ; 「總署收北洋大臣王文韶文 附件一. 駐韓唐總領事呈報 淸冊」(光緖 24年 閏3月 22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05-5110쪽.

人員(薪水)

漢城 仁川·釜山·元山

總辦 隨員 英文

繙譯 書識 朝鮮

通事聽差 日本

通事 文案 稽査

委員 商務 委員

英文

繙譯 書識 朝鮮

通事 日本

通事 聽差

總領事

駐朝鮮商務署 (320)1 (100)2 (120)1 (36)2 (15)1 (27)6 - - - 1 (200)

1 (100)

1 (36)

1 (15)

1 (30)

4~5 (27) 駐朝鮮領事署 (300)1 - 1

(100) 2 (36)

1 (15)

8 (27)

1 (30)

1 (50)

1 (70)

1 (200)

1 (80)

1 (36)

1 (12)

1 (25)

2~3 (27)

<表3-1> 駐朝鮮商務署와 駐朝鮮領事署의 조직 비교

이를 통해 한성총영사서는 물론 인천·부산·원산상무서까지 모두 진수당 재임 시기 주조선상무서의 조직 규모와 유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성총영사서는 실무를 담당하는 관원을 다소 늘렸고 인천·부산·원산상무서 는 청차를 다소 줄였으며, 이 과정에서 신수를 다소 조정한 것 외에는 별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당소의 재임 시기 주조선영사서가 진수당 재임 시기 주조선상무서와 유사한 조직 구조를 갖추었다는 것은, 여전히 판리조선상무장정의 적용을 받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처럼 청일전쟁 이후 에도 전통외교의 흔적은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주조선영사서를 통해 근대외교의 발판이 마련된 측면도 있다. 이 는 특히 주조선영사서의 관원 구성에서 잘 나타난다. 인천상무위원 唐榮浩 는 留美幼童 출신으로 서양 국제법을 잘 알고 있었다. 부산상무위원 湯肇 賢과 원산상무위원 汪豫源은 주조선상무서 시기 書識과 通事의 한직을 거 치며 외교 실무 경력을 쌓았다. 이처럼 상무위원에 외교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 등용되었다는 것은, 이와 똑같이 留美幼童 출신이면서 주조선 상무서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당소의의 영향이 상당 부분 작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51) 주조선영사서의 하급 관원의 명단은 자료상 확인되지 않는다.

청일전쟁 과정에서 주조선상무서 조직이 와해되었던 만큼, 상당수는 새로 운 인물로 채워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51) 留美幼童 출신으로 주한공관에서 활동한 인물은 唐紹儀, 吳仲賢, 唐榮浩, 吳其藻, 梁如 浩로 총 5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모두 廣東 출신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중 오중현만 四會人이었고 당소의를 포함한 나머지 4명은 모두 香山人이었다.

그러나 1898년 청 정부는 대한제국과 수교할 것을 결정하였고, 때마침 부친상을 당한 당소의는 귀국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52) 이로써 한국과 의 수교를 저지한다는 주조선영사서의 임무는 유효성을 잃게 되었고, 당소 의도 대한제국을 떠나게 되었다.53) 이후 조약 체결을 위해 파견된 서수붕 은 주조선영사서가 동순태호에 많은 빚을 지고 있고 대한제국과의 조약이 언제 체결될지 모르므로, 한성총영사서를 제외한 나머지 상무서는 잠시 폐 쇄할 것을 주청하였다.54) 그러나 당소의와 함께 근무를 시작했던 관원들은 앞으로 1년만 더 근무하면 승진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레 상무서를 폐쇄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55) 결국 서수붕은 한성 총영사서와 인천상무서는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다는 이유로 남겨두고, 다 른 곳의 관원들은 이곳으로 옮겨오도록 하였다.56) 이는 주조선영사서에서 근무한 관원 중 상당수가 한청수교 이후에도 주한공사관·영사관에서 활동 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상 살펴본 바를 토대로 주조선영사서의 구조와 위상을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57)

52) 「總署收代理朝鮮總領事湯肇賢呈」(光緖 24年 9月 26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67 쪽.

53) 臺灣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에 소장된 駐韓使館保存檔案 중 1894년 말부터 1898년 말에 이르는 약 4년간의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김희신, 앞의 글, 2011, 71쪽 참고) 1894년에서 1896년 사이는 주조선상무서가 철수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기 공식적 으로 생산된 문서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1896년에서 1898년 사이의 문서가 부재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 주조선영사서가 영사재판권을 공식적으 로 행사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도 별다른 인사이동이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리 많은 문서가 생산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54) 「出使朝鮮大臣徐壽朋奏韓國內亂與使署無礙擬卽迅速前往摺 附件一. 徐壽朋請撤駐紮仁川

等處各員以節經費片」(光緖 24年 12月 7日),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 1002쪽 ; 「總署收 出使大臣徐壽朋文」(光緖 24年 12月 8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96쪽.

55) 「總署收出使大臣徐壽朋函」(光緖 24年 12月 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91쪽.

56) 「總署收軍機處交出徐壽朋抄摺」(光緖 25年 2月 18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207쪽.

57) 淸季中日韓關係史料 에는 부산상무위원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1896년 당소 의가 조선에 건너올 때 湯肇賢, 唐榮浩, 葛式燕, 汪豫源, 唐恩桐, 梁誥均을 대동하였는 데, 그중에서 당영호는 인천상무위원, 왕예원은 원산상무위원이었으므로, 나머지 중에서 한 명이 부산상무위원을 맡았을 것이다. 그런데 駐韓使館保存檔案 에는 1899년 부산에 서 청 상인에 의한 구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총영사 吳廣霈가 前 부산상무위원 湯에게

職銜 位相 [總領事] 漢城總領事署 【總領事】

唐紹儀(1896.10~)

[商務委員] 【領事】

仁川商務署 釜山商務署 元山商務署

唐榮浩(1896.10~) 湯肇賢(1896.10~) 汪豫源(1896.10~)

<表3-2> 駐朝鮮領事署의 조직도

주조선영사서의 구조는 주조선상무서와 주한공사관·영사관 사이의 과도 기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성에는 총영사서가 세워져 있었지만, 그 아래 인천·부산·원산에는 영사서가 아니라 상무서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 다.58) 한성총영사서는 총영사 당소의가 관장하였으므로, 그 직함과 위상이 비로소 일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천·부산·원산상무서는 영사적 위상을 지 닌 상무위원이 관장하였으므로, 그 직함과 위상이 여전히 괴리되어 있었 다. 따라서 주조선영사서에는 주조선상무서의 흔적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 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한성총영사서와 총영사가 등장한 것은 한청수교 이후 주한·주조선영사관이 설립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는 점 에서 의미심장하다.

사태 수습을 지시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부산상무위원은 탕조현이었 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89~1894년 용산상무서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1898년 당소의가 갑자기 귀국하였을 때는 대리총영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總署收代 理總領事湯肇賢呈」(光緖 24年 9月 26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67쪽 ; 「總署收軍機 處交出徐壽朋抄摺」(光緖 25年 2月 18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208쪽 ; 「人事履歷、

請獎」(01-41-059-22), 駐韓使館保存檔案 ; 「釜山朝鮮通事稟控華商曲姓父子毆辱案」

(01-41-073-05), 駐韓使館保存檔案 ; 淸季中外使領年表 참고.

58) 「總署收北洋大臣王文韶文」(光緖 24年 閏3月 22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5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