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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후반은 청이 일회성 외교사절만으로는 대외적 위기에 대처하 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시기였다. 西北과 東南 변방의 위기가 가속 화되고 외교 분쟁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상황에서, 열강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여 신속하게 교섭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청 정부는 곽숭도를 주영공사로, 호선택을 싱가포르영사로 임명함으로써 주외공관 제도를 공식 화하였다. 그런데 청에서 주외공관 제도는 처음 도입되는 것이었으므로, 이를 운영하기 위한 규정을 먼저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청 정부는 1876년 서구 열강이 주청공관을 운영하는 방식과 서양 국제법 서적의 내 용을 참고로 하여 出使章程을 제정하였다. 출사장정은 청 정부가 주외공관 제도를 운영하는 기본적인 원칙으로 활용되었는데,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하 자면 다음과 같다.

1. 禮部가 주조한 구리관방을 出使各國大臣에게 하나씩 발급하여 잘 보관 하도록 하고, “大淸欽差出使大臣關防”이라 새긴다. 아직 발급되기 전에 는 먼저 목질관방을 새겨 사용한다.

2. 출사각국대신은 해당 국가에 도착한 날로부터 3년을 기한으로 하고,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미리 총리아문이 대신을 파견하여 인수인계할 것을 청한다. 副使 또한 마찬가지로 처리한다.

3. 출사각국대신을 頭, 二, 三等의 명목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번부터 시작 하고, 이미 파견된 각국대신은 모두 잠시 二等으로 한다.

4. 출사각국대신이 대동한 參贊, 領事, 翻譯 등의 관원은 각 대신이 인원 수를 정한 다음, 姓名 등의 사항을 총리아문에 보내 살피도록 한다. 이 들 관원 또한 출사대신과 함께 3년을 기한으로 하고, 기간이 만료되면 奏獎한다.

5. 출사각국대신이 각국에 도착한 후, 긴요한 일은 즉시 陳奏하지만, 일상 적인 일은 총리아문에 函咨하여 주청하도록 한다.

6. 출사각국대신으로 여러 국가의 사무를 맡은 자는 分所를 어떻게 할 것 인지를 결정한 후 총리아문에 조회하여 살피도록 한다.

11. 출사각국대신의 매년 급료와 왕래 비용, 각국에 주재하는 데 드는 일 체의 비용은 매년 각 대신이 분명히 밝혀 총리아문에 보고하여 살피도 록 한다.

12. 출사각국대신 등의 급료 및 왕래비용, 각국에 주재하는 데 드는 비용 은 江海關에서 모아서 보낸다. 얼마씩 나누어 보내야 할 것인지는 총 리아문이 총세무사에 알려 처리하도록 한다.116)

출사장정은 만국공법 과 성초지장 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공사의 등 급을 頭, 二, 三等으로 나눈 것, 2등공사를 파견하기로 한 것, 공사를 비롯 한 관원의 임기를 3년으로 정한 것이 모두 그 사례에 해당한다.117) 따라서 출사장정은 근대외교의 진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출사장정에서는 전통외교의 관념이 잔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 대, 正使와 副使를 함께 파견하도록 한 것은 大淸會典 에서 번속에 파견 하는 칙사를 정사·부사 각 1명으로 정한 것과 동일한 방식이었다. 이에 따 라 주외공사관 설립 초기에는 한동안 정사와 부사가 함께 파견되었다. 주 영공사관은 곽숭도와 許鈐信(이후 劉錫鴻으로 변경), 주미공사관은 진란빈 과 容宏, 주일공사관은 何如璋과 張士桂가 각각 정사와 부사로 활동하였 다.118) 한편 총리아문이 아니라 주외공사가 參贊, 領事, 翻譯의 인사권을 지닌 것은 마치 지방관이 幕友를 거느린 것과 같았다. 그러나 출사장정은 주외공관 제도의 대강만을 규정하였을 뿐 세부적인 내용은 명시하지 않았 다. 예컨대, 출사장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경비와 관련한 조항에서도 주외공사의 관품, 봉급만이 명시되었고 그 밖의 관원에 대한 내용은 생략 되었다. 또한 주외공관의 인적, 공간적 구성에 대한 규정도 포함되지 않았 다. 따라서 출사장정만으로 모든 주외공관을 동일하게 운영할 수 없었다.

116) 「總理衙門擬出使章程十二條淸單」(光緖 2年 9月 12日), 軍機處錄副奏摺 . 117) 星軺指掌 第1卷 第3章, 17면 ; 星軺指掌 第1卷 第3章, 21면.

118) 正使와 副使를 함께 파견함으로써 서로 간에 감시와 견제가 이뤄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주영공사관에서는 곽숭도와 유석홍 사이에 알력이 생겨나는 부작용이 있었다.

(岡本隆司·箱田惠子·靑山治世, 앞의 책, 2014, 55쪽 ; 李文杰, 앞의 책, 2017, 64쪽 참 고) 1880년 이후부터는 부사가 파견되지 않았고, 비로소 청의 주외공관은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공사 한 명을 최고 직책으로 두게 되었다.

이윽고 청은 영국을 시작으로 해외 각국에 공사관을 설립하였다. 청말 주외공사관의 개설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19)

年度 開設國家(兼任國家) 公使館 國家

1877 英 德 日 3 3

1878 英

(法) 德 日 美

(西·秘) 俄 5 8

1880 英

(法·俄) 德 日 美

(西·秘) 4 8

1881 英 (法·俄)

(意·奧·荷) 日 美

(西·秘) 4 11

1884 英 (俄)

德 (法·奧·

荷·意)

日 美

(西·秘) 4 11

1885 英 (俄)

德 (法·奧·荷·

意·比)

日 美

(西·秘) 4 12

1887 英 (法·比·意)

(荷·德·奧) 日 美

(西·秘) 4 12

1895 英 (比·意)

(荷·德·奧) 日 美

(西·秘) 法 5 12

1896 英 (比·意)

(荷·奧) 日 美

(西·秘) 法 德 6 12

1897 英 (比)

(奧) 日 美

(西·秘) 法 德

(意·荷) 6 12

1899 英 (比)

(奧) 日 美

(西·秘) 法 德

(意·荷) 韓 7 13

1902 英 俄 日 美

(西·秘·古) 法 德

(荷) 韓 意 比 奧 10 14

1903 英 俄 日 美

(秘·古·墨) 法 (西)

(荷) 韓 意 比 奧 10 15

1905 英 俄 日 美

(秘·古·墨) 法

(西·葡) 德 荷 意 比 奧 10 15

※ 國名: 英(영국), 德(독일), 日(일본), 美(미국), 法(프랑스), 俄(러시아), 西(스페인), 秘 (페루), 荷(네덜란드), 奧(오스만제국), 比(벨기에), 意(이탈리아), 韓(한국), 古 (쿠바), 墨(멕시코)

<表1-9> 淸의 駐外公使館 개설

119) 淸季中外使領年表 , 3-30쪽.

이를 통해 주외공사관 설립 초기에는 공사관의 수, 그리고 공사관이 담 당하는 국가의 수가 많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영국, 미국, 일 본에 개설된 공사관은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이들 공사관이 상대적으 로 이른 시기에 개설되었거나, 다른 지역을 함께 관할하는 임무를 맡았다 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애초에 주영공사관이 마가리 피살사건을, 주미 공사관은 華工虐待問題를, 주일공사관은 일본의 대만출병 이후 번속 상실 을 방지한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개설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 러던 것이 1895년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반환받으며 프랑스와 독 일의 중요성이 새롭게 강조되어 이를 전담하는 공사관이 개설되었고,120) 1901년 외무부가 창설된 이후에는 공사관의 수가 대폭 늘어 하나의 국가 만을 담당하는 專館이 여러 국가를 함께 담당하는 兼館을 초과하였다.

청이 설립한 공사관에는 公使를 필두로 參贊, 隨員, 飜譯, 供事, 學生 등 의 관원들이 배속되었다. 公使는 특히 중요한 직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인선에 있어 여러 요소가 고려되었다. 예컨대 영국에는 고위 관료만이 공사로 파견되었다. 영국은 아편전쟁 이후 줄곧 까다로운 외교 상대였고, 마가리 피살사건 등의 외교 현안도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음을 고려한 것이 었다. 그리고 미국에는 주로 광둥 출신의 관료가 공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청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광둥 출신이었기 때문 에 廣東語를 구사할 수 있는 관료를 파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에는 상대적으로 관직이 낮고 漢學에 능한 관료가 공사로 파견되었다.

이는 일본의 유학자들로부터 환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는데, 최소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청이 전통문화의 종주국이라는 인식의 소산이 었다고 할 수 있다.121) 이처럼 청은 공사 양성을 위한 교육 체계를 갖추지 못했으므로, 공사를 선발하는 데 있어 해당 인물의 외교적 능력보다는 해 당 국가와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청이 해외에 설치한 공사관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중 가장 기

120) 王立誠, 앞의 책, 1991, 127쪽.

121) 李文杰, 앞의 책, 2017, 253-261쪽.

본적인 업무는 상대국과 외교 협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청 의 외교 정책을 조율하거나 국제 사회의 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하는 등, 청 정부의 눈과 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공사관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사관은 상대국과 관련된 각종 외교 현안을 처리하였다. 이전까지 는 외교 분쟁이 일어나면 청이 보낸 특사나 청에 주재한 외국공사를 통해 협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협상이 신속히 전개되기도 어려 웠고, 열강이 외국공사 보호를 빌미로 압력을 가해오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청국공사가 상대국에 주재하게 되었으므로, 외교 사 안이 발생하는 경우 신속히, 그것도 청 바깥에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이 新疆 지역에 영사를 파견하였을 때, 그리고 일본이 류큐를 병탄하 려 하였을 때, 주영공사 곽숭도와 주일공사 하여장이 서양 국제법을 토대 로 즉각 항의하였던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122) 한편 주외공사 는 조약 체결에도 관여하였다. 주영공사로서 주러공사를 겸한 증기택이 상 트페테르부르크조약을 체결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러시아 측에서 는 全權大臣 숭후가 체결한 리바디아조약을 2등공사인 증기택이 개정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증기택은 숭후가 본국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체결 한 조약은 서양 국제법에 따라 무효라고 반박하였다. 결국 증기택은 러시 아와의 협상을 통해 伊犁 지역을 수복하는 데 성공하였다.123)

둘째, 공사관은 본국의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 개입하였다. 청 정부는 외 교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주외공사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청취하였다.

상대 국가와의 즉각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현지에 나 가 있는 주외공사가 더욱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었 다. 이에 따라 주외공사는 본국의 외교 정책이 입안되거나 수정되는 과정 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다. 예컨대, 주영공사로서 駐佛公使까지 겸했던 증기택은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갈등이 고조되자 주전론을

122) 夏泉, 「試論晩淸早期駐外公使的國際法意識」, 江西社會科學 1998(10), 1998, 67쪽.

123) 증기택의 생애 및 활동에 대해서는 李恩涵, 앞의 책, 1982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