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청에서는 辛酉政變이 일어나 공친왕이 서태후와 함께 정치적 실 권을 장악하였다. 공친왕은 본래 배외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으나, 제2차 아 편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열강과의 화친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되었 다. 이후 공친왕은 열강과 이른바 ‘協助政策’을 추진하여, 동문관에서 외국 의 언어와 학문에 능통한 인재를 양성하고, 총세무사 하트에 해관사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은 상주사절은 물론이고 일회성 외 교사절을 파견하는 데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청이 외교사절을 파견하 면 필시 상대국 군주를 접견하게 될 것인데, 이때 상호 대등한 예법을 행 하면 서양 국가에 굴복하였다는 국내의 비판을, 상호 대등한 예법을 거부 하면 서양 국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국외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을 우려했 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의 소극적인 태도는 당시 출간된 만국공법 을 통 해서도 정당화되었다.
自主之國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싶으면 사신을 파견하거나 받아들일 권리를 지니고, 타국은 이를 막을 수 없다. 만약 사신 파견을 원하지 않 으면 다른 나라가 강제할 수 없다 … 사신 파견이 비록 당연히 행해야 할 예이기는 하지만, 결코 반드시 행해야할 것은 아니다. 이것을 행할 지 여부는 마땅히 교분이 두터운 정도와 사무의 긴요한 정도에 따라 정한 다.84)
이처럼 만국공법 은 외교사절을 파견하거나 받아들이는 것 모두 자주국 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고 규정하였다. 설령 외교사절의 왕래가 일반화된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를 모든 나라에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
84) 萬國公法 , 275-276쪽.
서 스스로를 자주국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청은, 톈진조약과 베이징조약으 로 외국공사의 주재를 허용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곧 청의 공사 파견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청에서 활 동하던 몇몇 서양인은 청이 더 이상 공사 파견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주장 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 1865년 총세무사 하트가 총리아문에 「局外旁 觀論」을 제출하였다. 여기서 하트는 국제 정세를 방관하고 있는 청의 소극 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외국에 공사를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다.
중국만큼 오래된 나라는 없지만, 세계 각국이 볼 때 필시 중국만큼 약한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 현재 조약을 맺은 나라는 십여 국이고, 수도에 는 외국이 파견한 대신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새롭게 설치한 아문이 각국 사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년 간 몇 차례 사건이 있었는데, 이 는 외국이 요청하여 통상조약을 맺은 것으로, 대개 중국의 본의가 아니라 외국이 정한 것입니다. … 대신을 파견하여 외국에 상주하도록 하십시오.
중국에 유익한 면이 있을 것입니다. 수도에 머무는 대신이 만약 이치에 맞는 일을 처리할 것을 요청하면, 중국은 응당 살펴보고 처리하면 됩니 다. 만약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처리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중국이 그 나 라에 상주하는 대신이 없다면, 그대로 받아들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제가 권유한 바는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85)
당시 하트는 청 정부 내에서 신뢰받는 서양인 중 한 명이었기에 그의 주 장이 지닌 파급력은 상당히 컸다. 그러나 청 정부는 공사 파견을 시기상조 라 판단하고, 그 대신 斌椿을 대표로 하는 시찰단을 유럽 각국에 파견하기 로 하였다.86) 그리고 외국 군주를 접견하고 상호 대등한 예법을 취하는 상 황을 피하기 위해, 이들이 외교사절단이 아니라 문물시찰단임을 분명히 하 였다. 그러나 고위 관료를 대표로 하는 시찰단이 유럽을 순방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청의 관료층 사이에서 공사 파견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은 상당히
85) 「總稅司赫德呈遞局外旁觀論」, 籌辦夷務始末 (同治)40, 13-22면.
86) 빈춘시찰단이 관찰한 서양 문물에 대해서는 조세현,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 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동북아문화연구 48, 2016a 참고.
경감되었다.
1866년에는 영국공사관에서 參贊으로 근무하던 웨이드(Thomas Wade) 가 「新議略論」을 제출하였다. 웨이드는 하트보다 한층 강경한 어조로 청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였다.
각국의 형세를 보면 중국은 단 하루도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 중국이 이득을 온전히 취할 수 있는 길은 代國大臣을 각국 수도에 파견하여 상 주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 중국은 다른 나라에 대신을 상주하도록 한 적이 없습니다. … 중국이 시험 삼아 한 번 해보려 한다면, 먼저 외국인 과 서로 돕기로 잠시 약정해야 하고, 훗날 익숙해진 다음에는 그를 물러 나게 할 수 있습니다. … 곧 머지않아 중국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 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외국을 불러들여 함께 폐단을 제거하고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자주권을 영구히 보전하든지, 예전과 같이 의심을 품고 철 저히 막아 외국 또한 의심으로 상대하게 하든지 말입니다.87)
여기서 ‘代國大臣’은 이 시기 출간된 만국공법 의 2·3·4등공사를 가리키 는 것이라 짐작된다. 즉, 웨이드 또한 청이 외국에 공사를 파견해야 한다 고 주장한 것이었다. 비록 웨이드는 영국공사관의 중간급 관리에 불과하였 지만, 1868년으로 예정된 영국과의 톈진조약 개정 협상이 임박한 상황에 서, 그의 주장은 영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 다.
결국 1866년 청은 하트와 웨이드의 의견서를 함께 배포하고 지방관의 의견을 널리 구하였다. 그러나 공사 파견에 대해 三口通商大臣 崇厚는 찬 성하였으나 江西巡撫 劉坤一, 浙江巡撫 馬新胎는 반대하는 등 여론이 하나 로 모아지지 않았다.88) 이듬해인 1867년 청은 톈진조약 개정 협상에서 예 상되는 열강의 요구 사항을 6가지로 간추린 후, 다시 한 번 지방관의 의견 을 청취하였다. 그러자 상당수의 지방관이 遣使, 즉 공사 파견에 찬성하고 나섰다.89) 좌종당은 “駐京公使가 방자하게 제멋대로 행동함에도 우리가 힐
87) 「威妥瑪新議略論」, 籌辦夷務始末 (同治)40, 23-37면.
88) 坂野正高, 앞의 책, 1970, 226-231쪽.
책할 수 없으니, 遣使로써 각국의 사정을 염탐하고 공사들의 전횡을 막 자.”고 하였다.90) 李瀚章은 “중국에 온 외국 사신들이 가혹한 요구를 하거 나 힐책하는 일이 해당 국가의 군주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를 살필 수 있 다.”고 하였다.91) 吳棠은 “공사들이 고집을 부리면 힐책할 수 있다.”고 하 였으며,92) 이홍장은 “각국의 兵制, 船政, 軍火, 器械는 정교하여 중국보다 우월하니, 왕래가 익숙해진 후 샅샅이 살피면 … 자강의 기반이 될 것이 다.”라고 하였다.93) 톈진조약 개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그동안 중화질서에 따라 공사 파견을 기피해 온 청의 관료층에서도 공사 파견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홍장은 공사 파견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丁日昌의 의견서 를 함께 첨부하였다. 여기서 정일창은 영사 파견론의 효시라 할 만한 주장 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市舶司를 설립하십시오. 각국으로 건너간 華人들이 학대받고 있습니다.
화인을 관리하십시오. 서양에서는 모두 관에서 상인을 관리합니다. … 만 약 중국이 충성스럽고 용감한 재주를 지닌 관원을 그 나라의 영사와 같 게 한다면 … 중국에서 떠난 사람들이 필시 고향을 그리워하여 외국에 이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 현재 싱가포르에서 러시아가 영사로 쓰고 있 는 자는 중국 番禺人 胡氏 성을 가진 자로, 싱가포르 십여만 화인이 모두 그의 명령과 지휘를 받고 있습니다. … 호씨와 같은 부류는 필시 적지 않 을 것입니다. 우리 중국 사신이 연락하여 고무한다면 반드시 흔쾌히 명을 따를 것이고 중국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94)
정일창은 해외에 도항한 자국민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호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청 정부가 고수해 온 棄民政策의 폐기를 의미한
89) 총리아문의 ‘條說六條’에 대한 각 지방관의 회신에 대해서는 李文杰, 앞의 책, 2017, 52-54쪽 참고.
90) 「陝甘總督左宗棠奏」, 籌辦夷務始末 (同治)51, 21면.
91) 「署湖廣總督江蘇巡撫李瀚章奏」, 籌辦夷務始末 (同治)52, 33면.
92) 「閩浙總督吴棠奏」, 籌辦夷務始末 (同治)55, 3면.
93) 「湖廣總督李鴻章奏」, 籌辦夷務始末 (同治)55, 12면.
94) 「李鴻章附呈藩司丁日昌條款」, 籌辦夷務始末 (同治)55, 21-22면.
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唐代부터 淸初까지 대외 교역을 관장하던 시박사를 복설하여 여기에 해외 청국인 보호라는 임무를 추가하 려고 했던 것을 볼 때, 그의 인식은 중화질서를 토대로 하여 출발한 것이 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상주사절 파견론이 점차 확산하던 1868년, 청은 마침 임기를 끝 내고 귀국하려는 미국공사 벌링게임을 대표로 삼고 總理衙門章京인 志剛과 孫家穀을 수행원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서양 각국에 파견하였다. 이때 굳 이 외국인인 벌링게임을 대표로 삼은 것은 “중국인을 사신으로 삼으면 곤 란함을 면치 못하지만, 외국인을 사신으로 삼으면 난처하지 않을 것입니 다.”95)라는 말에서 보듯, 해외에 파견된 청의 관료가 직면하게 될 의례 문 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청은 벌링게임사절단을 파견하여 서양 각 국의 무리한 조약 개정 요구를 사전에 차단하고, ‘협조정책’의 완만한 기조 를 이어 나가고자 하였다.96)
따라서 1860년대 후반은 상주사절 파견론이 대두한 것과 더불어, 일회 성 외교사절의 파견을 시도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天文算學館 설치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드러나듯, 배외주의가 공개적으로 표출된 시 기이기도 하였다.97) 이처럼 보수 관료층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총리아문의 활동은 점차 위축되었고 청의 상주사절 파견에도 제동이 걸렸다.98)
1870년이 되어 청을 둘러싼 외교 환경은 급변하였다. 특히 톈진에서는 프랑스영사가 살해되고 교회가 파괴되는 대규모 敎案이 발생하였다.99) 이
95) 「總理各國事務恭親王等奏」, 籌辦夷務始末 (同治)51, 27면.
96) 王立誠, 앞의 책, 1991, 122쪽 ; 箱田惠子, 앞의 책, 2012, 19-22쪽.
97) 장의식, 「淸末의 同文館 天文·算學館 증설 논쟁」, 대구사학 78, 2005.
98) 특정 국가의 신념체계는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데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친다. 첫째, 국제 정치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의 인식 틀을 형성한다. 둘째, 외교 정책의 선택 범위를 규정한다. 셋째, 외교 정책의 지속성을 제공한다. 넷째, 외교 정책의 선택 을 합리화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다섯째, 결정된 정책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여섯째, 신념체계를 추종하는 국민 사이의 단결을 강화한다. (로이 드 젠슨(김기정 譯), 앞의 책, 1994, 99-102쪽 참고) 이를 통해 볼 때, 수천 년간 지속 하여 온 중화질서에 따라 청이 외교 정책을 바꾸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음을 짐 작할 수 있다.
99) 1860~70년대 중국에 들어온 서양 크리스트교의 활동에 관해서는 Paul A. Coh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