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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 재임 시기 주조선상무서의 운영 양상

1885년 원세개가 총리교섭통상사의로 임명되었을 때 진수당 재임 시기 의 주조선상무서 조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총리교섭통상사 의는 총판상무위원보다 더욱 확대된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원세개로서도 자신의 측근 세력을 적극적으로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원세개는 부 임 직후 주조선상무서의 조직 개편에 착수하였다.

진수당이 조선에 있을 때는 중국의 公事만을 처리하였지만, 이제 조선의 내외국정에 참여하려면 유능한 인물 한두 명을 구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이에 隨員은 마땅히 늘려야 합니다. 각국이 모두 한 성에 있는데, 유독 상국만이 매사에 인색하고 비루하여 제대로 관찰하거 나 청취할 수 없습니다.211)

총판상무위원 진수당은 청 상인의 통상 업무를 주로 처리해 왔다. 여기 에 총리교섭통상사의 원세개에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여하는 일이 추 가되었으므로, 통상 업무를 보조해줄 인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원세 개는 1886년 용산상무서를 신설하였다. 당시 원세개는 한성에 있는 청 상 인의 점포를 용산으로 옮길 것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명칭을 ‘용 산상무서’라 하면서도 일단 한성상무총서 안에 添設되었다.212) 그러나 용 산상무서가 商務를 처리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인근의 가옥을 빌려 사용했으 므로, “나눠진 곳이 산만하고 업무 처리에 불편함이 많다.”는 문제점이 있 었다. 이에 1889년 용산상무서 건물의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청 상인의 점포를 용산으로 이전하려는 계획은 사실상 백지화된 상태였으 므로, 용산상무서는 한성상무총서 바로 北隣에 지어져 한성의 통상 업무를

210) 「정치 상황(켐퍼만 → 비스마르크)」(1886.09.14.), 독일외교문서 한국편: 1874~1910 3, 265쪽.

211) 「稟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1年 10月 26日), 袁世凱全集 1, 67쪽.

212) 「稟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2年 8月 23日), 袁世凱全集 1, 224쪽.

관장하였다. 용산상무서가 용산이 아니라 한성상무총서 바로 옆에 지어진 데는 이러 한 사정이 있었다. 용산상무서의 평면도를 살펴보면 공식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물론 관원이 머물 공간이 확보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13) 이후 조선의 내정, 외교와 관련 된 중요한 업무는 한성상무총서, 청국인과 관련된 일상적인 업무는 용산상무서가 나누 어 맡는 경향이 나타났다.

용산상무서가 신설됨에 따라 원산상무서는 잠시 축소되었다. 주조선상무 서가 운용할 수 있는 재정은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산상무서의 상 무위원은 坐探委員으로 격하되었고, 관원의 수와 급료도 줄어들었다. 그러 나 원산에서 활동하는 청 상인이 점차 늘어나면서, 좌탐위원이라 하더라도 결국 상무위원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좌탐위원이 商務委員 또 는 坐探委員兼理商務라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이를 방증하는 것이 라 생각된다.214) 결국 1893년에는 좌탐위원의 급료가 여타 상무위원과 동 일하게 조정되었다.

이처럼 주조선상무서의 업무량이 늘어남에 따라 상무위원 아래의 하급 관원의 수는 대폭 늘어났다. 청의 제국성을 충실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주 조선상무서의 조직 개편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원세개 재임 시기 주조선

213) 주조선상무서의 안팎 구조를 보여주는 자료는 극히 드물다. 이러한 의미에서 용산상무 서의 실측도는 사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稟北洋大臣李鴻章文」 (光緖 15年 5月 16日), 袁世凱全集 2, 104쪽 ; 「建造龍山分署卷」(01-41-033-03), 駐韓使館保存檔案 , 2-3면 ; 「龍署新添壹識件作衙役等卷」(01-41-045-03), 駐韓使館 保存檔案 ; 이순우, 정동과 각국공사관 , 하늘재, 2012, 290쪽 참고.

214) 1890년을 전후한 시기 좌탐위원이 사실상 상무위원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원산상무위원이라는 표현이 자주 발견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 다. 「致朝鮮署理督辦交涉通商事務趙秉稷函」(光緖 15年 3月 18日), 袁世凱全集 2, 80쪽

; 「元山署豫備用空白護照發給要請의 件」(高宗 28年 4月 23日), 淸案 2, 33쪽 ; 「元山 駐在淸商務委員臨時代理委囑件通報」(高宗 29年 5月 15日), 淸案 2, 99쪽 「稟北洋大臣 李鴻章文」(光緖 18年 6月 3日), 袁世凱全集 2, 497쪽 ; 統署日記 (高宗 30年 3月 2 日), 78쪽 ; 統署日記 (高宗 30年 5月 28日), 125쪽 참고.

<圖2-5> 龍山商務署의 평면도

상무서의 인원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15)

地域

職銜 漢城 龍山 仁川 釜山 元山

總理/分瓣/坐探 1 1 1 1 1

隨員 2→3 0 0 0 0

英文繙譯 1→2 0→1 1 1 1→0

日本通事 1 0→1 1 1 1→0→1

朝鮮通事 2 0→1 1 1 1→0→1

書識 2 1→2 1→2→3→4 1 1→0

聽差 11→18 2→4 4→6 5 5→2

文案 2 0 0 0 0

電報學生 1 0 0 0 0

勇丁 0→18 0 0 0 0

衙役 0 0→6 0 0 0

仵作 0 0→1 0 0 0

合計 23→30→48

→49→50 4→8→9→17 9→10→11

→13→14 10 10→1→5

※ 1892년 설치된 마포계사국의 인원은 제외하였음.

<表2-4> 袁世凱 재임 시기 駐朝鮮商務署의 관원 구성

원세개 재임 시기 주조선상무서에서는 인사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진수당 재임 시기와 달라진 점은 상무위원이 빈번하게 교체되었다는

215)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2年 1月 17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030쪽 ;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2年 1月 17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031-2035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2年 5月 15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117쪽 ; 「總 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3年 4月 12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253쪽 ; 「總署收 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3年 閏4月 20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269쪽 ; 「總署收北 洋大臣李鴻章文」(光緖 13年 8月 2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369쪽 ; 「總署收北洋大 臣李鴻章文」(光緖 14年 6月 29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499쪽 ; 「總署收北洋大臣李 鴻章文」(光緖 15年 3月 10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571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 文」(光緖 15年 11月 18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686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

(光緖 17年 3月 10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888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 緖 18年 6月 10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992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8年 閏6月 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2994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8 年 10月 5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3060쪽 ;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19年 11月 15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3230쪽.

점이었다. 원세개는 조선에 부임한 직후 인천과 부산의 상무위원이던 이내 영과 진위혼을 “사람과 지역 모두 알맞지 않다.”는 이유로 경질하고, 이들 을 각각 李蔭梧, 유가총으로 교체하였다. 유가총의 전근으로 공석이 된 원 산좌탐위원에는 姚文藻를 임명하였다. 1886년 신설된 용산상무위원은 인 천상무위원에서 한성상무총서의 양판으로 옮겨와 있던 이음오가 맡았다.

그런데 주조선상무서의 관원들 중에서는 질병, 빈곤, 결혼 등의 개인 신 상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는 무엇보다 근무 환경이 열 악한 데서 기인하였는데, 주조선상무서의 한 관원이 휴가를 신청하며 올린 공문에는 이러한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본인은 이미 오랫동안 외국에서 일을 하다 보니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하 였습니다. … 비록 외국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지만 아직 그 어떠한 저 금도 하지 못하였으며 빚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 부임한 지 3년 동안 단지 3개월의 급여만을 받았고, 이 3개월의 급여 역시 그 액수가 매 우 적습니다.216)

이 시기 주조선상무서의 규모가 확장되었음에도 재정 수입은 그다지 늘 어나지 않았으므로, 결과적으로 관원에 대한 대우는 점차 열악해졌다. 윗 글에서 보듯 관원의 급료가 삭감되거나 체불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으리 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조선상무서의 관원들 은 3년이라는 근무 기간을 채우려 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청 의 출사장정에서 “각 관원 역시 출사대신과 마찬가지로 3년을 임기로 하 여 기한이 차면 奏獎한다.”고 하였고, 판리조선상무장정에서도 “총판과 분 판위원은 出使外洋의 3년 임기 규정에 따라 북양대신이 심사하여 공로가 뛰어난 자는 淸獎한다.”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여타 주외공관과 마찬가지로 주조선상무서에서 3년간 근무하면 승진이 보장되 었던 것이다.

216) 「朝鮮派員駐津無庸具奏卷」(01-41-036-03), 駐韓使館保存檔案 .

조선에 보내 상무를 처리하거나 방어를 위해 파견한 병사, 해관 등 문무 관원들은 3년 만기가 되면 상을 주어야 합니다. 文職 32명으로 이미 20 명을 초과하였으므로 12명에 대해서는 취소를 해야 합니다. … 서양의 20명보다는 많은 인원이지만, 본디 조선은 동서양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 조선은 그 세력이 매우 빈약하고 인접한 국가들은 모두 강하므로 조 선 사무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서양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일하는 강도는 훨씬 강합니다. … 조선에서 3년 만기가 된 관원 들에 대해서는 그 수의 제한을 두지 말고 이력서를 제출하여 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217)

이 시기 청의 관료층 사이에서 주외공관은 일종의 출세 경로로 인식되어 정실에 따른 인사가 이루어지거나 불필요한 인원이 늘어나는 폐단을 일으 키고 있었다. 이러한 주외공관의 폐단을 지적하는 여론도 점차 고조되었 다.218) 이에 청 정부는 주외공관에서 근무한 관원을 우대하면서도 그 숫자 에 제한을 두었다. 그러나 주조선상무서에서 근무한 관원에 대해서는 별도 의 제한을 두지 않고 포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서도 3년을 채우려고 했고, 3년을 채우고 나면 빠른 기간 내에 귀국하려 하였다.

그러나 英文飜譯에서 시작하여 각각 용산상무위원과 원산좌탐위원으로 승진한 唐紹儀와 吳仲賢은 다소 예외적 인물이었다. 당소의와 오중현은 모 두 留美幼童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예일대학에서 修學하였다, 귀국한 후인 1882년 묄렌도르프를 따라 조선에 들어와 통역 및 해관 사무에 종사 하였다.219) 특히 당소의는 갑신정변 당시 총을 들고 묄렌도르프 집 앞을 지키는 모습으로 원세개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220) 이를 계기로 1886년

217) 「商署人員請獎敘案」(01-41-045-02), 駐韓使館保存檔案 , 50-51면.

218) 箱田惠子, 앞의 글, 2009, 129-130쪽.

219) 「중국 학생 梁如灝 등의 송환에 관한 회답」(高宗 21年 5月 4日), 淸案 1, 364-365 쪽.

220) 당소의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유학할 때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인 아이아스(ajax)라 는 별명으로 불렸다. 당소의가 체구가 작았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小아이아스를 가리키 는 것으로 보인다. 小아이아스는 트로이전쟁의 영웅으로, 걸음이 날래고 창던지기의 명 수이며 오만불손하고 호전적인 성격을 지녔다. 첸강·후징초(이정선·김승룡 譯), 유미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