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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商董·總領事 당소의의 위상과 활동

1894년 古阜蜂起를 계기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였다. 전봉준이 이끄 는 동학농민군은 관군을 격파하고 전라도 각지로 진출하였다. 사태 해결에 고심하던 조선 정부는 청에 파병을 요청하는 방안을 고려하였다.1) 이는 열 강의 군사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철회된 바 있지만,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상황이 위급해지면서 조정 여론이 급변하 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壬午와 甲申의 두 차례 내란을 모두 중국 병사에 기대어 대신 진압하였다.”며 청이 군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 다.2) 이에 청은 “상국이 속국을 보호하는 오랜 관례”라며 즉각 파병하였 다.3) 청과 조선 사이에 조약질서가 시도되고 있었지만, 중화질서는 여전히 손쉽게 喚起하여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였던 것이다.4)

청은 톈진조약에서 합의한 대로 파병 사실을 일본 측에도 통보하였다.

그러자 일본 또한 톈진조약을 근거로 즉각 출병하였다.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여 동학농민군의 북상을 저지하려 한 것과 달리,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한 후 곧장 한성으로 진입하여 청과의 대결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이처 럼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조선은 한성이 평안한 상태이므로 일본군이 진입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공관과 자국민을 보호하 는 것은 조선 정부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일축하였다. 이처럼 일본은

1)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 군대 파병 문제를 專論한 연구는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淸軍」, 동학연구 17, 2004 참고.

2) 「大淸欽差出使日本大臣汪」(1894年 6月 7日), 日本外交文書 27(2), 167쪽.

3) 「寄譯署」(光緖 20年 5月 3日), 李鴻章全集 24, 47쪽.

4) 森萬佑子, 앞의 책, 2017, 149쪽.

청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청과 조선 사이의 상국과 속국 관계를 문제 삼고 나 섰다. 사실 이것은 청일수호조규를 전후한 시점부터 논란이 되어온 것으로 서, 청은 조선이 번속이지만 內治外交는 자주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일본 은 조선이 자주할 수 있으면 번속이든 속국이든 될 수 없다고 보았던 만 큼, 양측의 견해차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채 언제라도 발화할 수 있는 불씨로 남아 있었다. 일본은 청이 파병하여 조선의 자주를 침해하고 있다 고 비난하는 한편, 조선 정부에게도 명확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조선이 내정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청은 조선에 속방의 명분만을 지니고 있으나, 일본은 내정 개혁을 주지함으로써 속방의 실권을 갖는 것입니다,”라는 이홍장의 보고는 청의 종주권이 곧 유명무실해질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5)

이러한 상황에서 원세개는 청의 종주권을 유지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막 는 데 분주하였다. 그러나 전쟁 분위기는 갈수록 고조되어 “조금 더 늦으 면 청국인은 모두 피난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았다.6) 결국 원세개는 병을 칭하고 귀국해 버렸고, 이로써 10여 년에 걸친 그의 조선 체류도 막 을 내렸다. 원세개가 맡고 있던 총리교섭통상사의는 용산상무위원 당소의 가 대신하였다.7) 당소의는 조선에 건너온 지 10년이 넘었고 용산상무위원 또한 5년째 맡고 있었기 때문에, 원세개를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 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 이 한성상무총서와 용산상무서를 공격하는 한편 청과의 개전을 선포하였기 때문에, 당소의 또한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인이 갑작스레 병사 천여 명을 일으켜 총리공서 및 용산분서, 한성전보 총국의 수비를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저희는 즉시 인원을 이끌고 후원의 5) 「寄譯署」(光緖 20年 5月 21日), 李鴻章全集 24, 79쪽.

6) 「寄譯署」(光緖 20年 6月 14日), 李鴻章全集 24, 136쪽.

7) 統署日記 (高宗 31年 6月 18日), 351-352쪽.

조선인 민가를 거쳐 영국총영사서로 잠시 도피하였습니다. 다행히 총리교 섭통상사의와 용산상무위원의 관방과 공문서를 가지고 포위망을 빠져나 왔으나, 그 나머지 기물과 은량은 모두 빼앗겼습니다. … 인천으로 가 영 국 군함에 올라탔습니다. … 일찍이 공문 내에 기밀이 담겨 있어 가져갈 수 없는 것은 모두 태워버렸고, 관례적인 것들은 영국총영사서에 보존하 였습니다.8)

일본이 한성상무총서와 용산상무서를 공격한 것은 청과 조선의 교섭 창 구를 봉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일본이 청의 종주권 타도를 내세우고 있었 던 만큼, 그 상징물인 주조선상무서를 장악하는 일만큼 개전의 명분에 부 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9) 당소의는 기밀문서를 모두 태워버린 후 주조 선영국총영사관을 통해 황급히 귀국하였다. 며칠 뒤 일본의 강요로 조선 정부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폐기를 선언하면서, 총리교섭통상사의는 물론 각지의 상무위원이 주재할 법적 근거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청과 조선 간의 중화질서는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시점부터 붕괴하였다.10)

그러나 조선에는 아직도 상당수의 청국인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설령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생업에 종사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이에 당소의는 귀 국하기 전 주조선영국총영사관에 청국인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로써 청국인 보호 권한은 주조선영사서에서 주조선영국총영사관으로 임시

8)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光緖 20年 7月 12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3456-3457쪽.

9) 일본 특명전권공사 오도리 케이스케(大鳥圭介)는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에 보낸 보고문에서 “청국 공사관·영사관의 고용인들도 우리 군대가 불의의 습격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점차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지난 23일 아침 대궐의 사변으 로 그들은 크게 놀라 모두 그날로 도망하였기에, 袁의 대리 唐도 부득이 國旗를 그대로 淸署에 남겨 둔 채 영국총영사관으로 가서 머물고 있습니다. … 어제 아침 唐紹儀가 본 관에게는 별도의 아무런 통지도 하지 않고 경성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고 합니 다.”라고 하여 일본군이 주조선상무서를 공격하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淸使 歸國에 따른 英總領事의 公館 및 人民保護의 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 참고) 이후 일 본 메이지 정부는 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사실을 날조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국민을 선 동하는 데 힘썼다. (김태웅, 「淸日戰爭 前後 일제의 戰爭 捏造와 일본 언론의 煽動」, 역사교육 119, 2012 참고)

10) 유바다,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과 조선의 속국 지위 청산」, 대동문화연구 98, 2017a, 356-363쪽.

이양되었다.11) 그러나 주조선영국총영사관이 청국인을 보호하는 데는 한계 가 있었다. 청일전쟁으로 주조선상무서가 철수한 사이에, 조선이 청 상인 의 내지 진입을 금지하고 영사재판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담은 保護淸商規 則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주조선영국총영사관은 청국인 보호 권한을 위임 받은 사실을 근거로 보호청상규칙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정부 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폐기되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청일전쟁은 일본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평양 등지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압록강을 넘어 랴오둥반도까지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이 30여 년 동안 양무운동을 통해 양성한 신식 군대는 철저히 패배하였고, 결국 1895년 청은 시모노세키조약에 합의하였다.12) 이로써 주조선상무서가 복원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그러나 전쟁을 피해 귀국했 던 청국인이 조선으로 속속 돌아오면서 이들을 보호하고 관리할 필요성은 더욱 증대하였다. 이에 당소의는 주조선영국총영사관에 청국인 보호 권한 을 정식으로 위임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총리아문은 정식 공 문을 발송하였다. 그런데 주조선영국총영사관이 청국인 보호에 관한 권한 을 정식으로 갖게 된 것은 조선이 제정한 보호청상규칙과 정면으로 충돌하 는 것이었다. 결국 영국과 조선은 보호청상규칙을 폐지하는 데 합의하였 고, 이후 주조선영국총영사관은 “영국과 조선이 체결한 조약”, 즉 조영수 호통상조약에 근거하여 청국인을 보호하기 시작하였다.13)

그러나 주조선영국총영사관이 청국인을 자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동아시아에서의 권익을 확보 하려고 했을 뿐이다. 더욱이 주조선영국총영사관에는 소수의 인력만이 근

11) 1880년대 중반 이후 청과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공동 목표를 위해 동아시아 지 역에서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었다. (김현수, 「해리 파크스와 이홍장」, 영국연구 15, 2006 참고) 당소의가 주조선영국총영사관에 의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 다.

12) 청일전쟁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박종근(박영재 譯), 淸日戰爭과 朝鮮 : 外侵과 抵抗 , 일조각, 1989 ; 후지무라 미치오(허남린 譯), 청일전쟁 , 소화, 1997 참고.

13) 「總署收駐韓徐大臣文 附件一. 出使大臣徐壽朋奏摺」(光緖 25年 12月 18日), 淸季中日 韓關係史料 , 5291쪽 ; 이은자, 앞의 글, 2008a, 29-31쪽 ; 김종성, 「淸의 對朝鮮 영사 파견에 관한 연구」, 중국근현대사연구 46, 2010, 84-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