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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서양 국가와 일본이 조선에 접근해 왔다. 그러나 이들 열강 은 청이 조선에 대한 宗主權을 지니고 있음을 의식하여, 먼저 청에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관해 문의하였다.1) 병인양요, 신미양요, 그리고 강화도조약 을 전후한 시기 청에 주재하던 프랑스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 미 국공사 로우(Frederich Low),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禮)가 모두 그 러하였다. 이에 대한 청의 답변은 “조선은 屬邦이나 自主이다.”라는 것이 었다. 베이징에 주재하던 러시아공사 또한 “중국은 이웃국가로서 (서양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불쾌감을 인정하면서도 조선 정부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라고 보고한 바 있다.2) 이는 명백히 상국이 번속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중화질서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3)

1)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는 조공과 책봉이라는 외교 행위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이 각각 上 國과 屬國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주변국에 대해 포괄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를 전통적 의미의 종주권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서양에서 종주권 (suzerainty)은 19세기 오스만제국이 약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이 시기 오 스만제국은 서구 열강에 의해 막대한 영토를 빼앗겼는데, 이처럼 실질적인 주권을 상실 하는 과정에서 관념적인 종주권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근대적인 종주권 개념은 만국공 법 이나 공법회통 등의 서양 국제법 서적의 번역을 통해 동아시아에 유입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종주국에는 ‘上國’, 종속국에는 ‘屬國’, ‘屛藩’, ‘藩屬’, ‘屬邦’ 등 다양한 번역 어가 사용되었다. (岡本隆司 編, 앞의 책, 2014, 2-3장 참고) 이러한 ‘번역의 중층성’은 중화질서와 조약질서의 혼동을 일으켜 양자의 혼재와 변용을 초래하였다. (정동연, 앞의 글, 2018a, 4장 참고) 청과 조선의 관계에서는 전통적 종주권이 주로 쟁점이 되었으므 로, 본고에서는 ‘종주권’이라는 용어가 지닌 문제점을 의식하면서도 이를 중화질서의 맥 락에 따른 전통적 종주권의 의미로 사용하도록 한다.

2) 「북경주재 러시아 공사가 재상에게 발신한 지급공보 사본」(1871.07.14.), 근대 동아시 아 외교문서 해제 1, 203쪽.

3) 선행 연구에서는 청이 전통적인 중화질서에 따른 ‘屬邦自主’로 일관했다는 시각이 지배

1870년대 들어 일본과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청 정 부에서는 外藩盡削의 위기감이 한껏 고조되었다. 이에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 측 대신 李裕元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서양 국가와의 수교를 권유하 기 시작하였다.4) 이후 청은 “藩封을 돌보아 살피고자 한다면 모른 척 내버 려 둘 수 없는 법”이라며 조선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5) 이는 곧 조선에 대한 列國立約勸導策으로 나타났다.6) 서양 국제법 질서를 활용 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하는 한편 일종의 以夷制夷를 달성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청의 수교 권유에 대한 조선 측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유원은 이홍장에 보내는 답신에서, 조선은 외교를 돌볼 여유가 없을 뿐 아니라 일 본에 병합된 류큐의 사례에서 보듯 공법에 의지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 겠냐고 반문하였다. 이처럼 조선 측이 회의적인 입장을 내비치자,7) 이홍장 은 “형세가 바뀌면 다시 기회를 엿보아 권고할 일이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기는 곤란하다.”며 조선 문제에 즉각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물러 섰다.8)

이때 청과 조선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주일공사 何

적이었다. (신기석, 韓末外交史硏究 , 일조각, 1967, 44-58쪽 ; 권석봉, 淸末對朝鮮政 策史硏究 , 일조각, 1986, 80쪽 ; 권혁수, 근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 , 혜안, 2007 참 고) 최근에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청이 서양 국제법에 근거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연구가 제출되었다. (유바다, 「1876년 朝日修好條規의 체결과 조선 의 국제법적 지위」, 한국근현대사연구 78, 2016 참고) 그러나 이 시기 청이 서양 국제 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는지, 청의 종주권이 유효한 상황인데도 굳이 서양 국제 법에 의존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4) 이홍장과 이유원 사이의 서신 교류에 관해서는 송병기, 近代韓中關係史硏究 , 단대출판 부, 1985, 12-23쪽 ; 권석봉, 위의 책, 1986, 85-104쪽 ; 권혁수, 위의 책, 2007, 79-108쪽 ; 권혁수, 19世紀末 韓中關係史硏究 , 백산자료원, 2000, 35-44쪽 참고.

5) 「總署收軍機處交上諭」(光緖 5年 7月 5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361쪽.

6) 이홍장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列國立約勸導策에 관해서는 송병기, 앞의 책, 1985, 23-44쪽 ; 권석봉, 앞의 책, 1986, 105-112쪽 ; 김원모, 「李鴻章의 列國立約通商勸告 策과 朝鮮의 對應(1879~1881)」, 동양학 24, 1994 참고.

7) 이유원은 통상외교보다는 자급자족을 지향하였는데, 이는 일본에 인천을 개항하는 것에 적극 반대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유원의 주장은 조선 관료층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 었다. 김태웅, 「李裕元의 經世論과 國際情勢 認識」, 진단학보 128, 2017, 147쪽 참고.

8)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函」(光緖 6年 2月 9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397쪽.

如璋이었다. 그는 1877년 일본에 부임한 이래, 각국의 외교사절과 교유하 고 신문·잡지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여장은 일개 주외공사에 불과하였지만 최소한 동아시아 정세에서만큼은 청 정부의 풍향 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880년 청 정부가 러시아나 일본이 조선을 침 탈할 것을 우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의 걱정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 니라 러시아에 있습니다.”라고 하여 러시아 대비를 우선할 것을 주장하였 다.9) 이후 청 정부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일본과는 타협하는 쪽으로 대외 정책을 수정하였다.

곧 이어 하여장은 미국의 슈펠트가 조선과의 수교를 타진하고 있다는 정 보를 입수하였다. 하여장은 본국 정부에 「三策」을 제출하여 조선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주장하였다.10) 여기서 하여장은 조선을 군현으로 삼아 領土化하는 것을 上策, 판사대신을 파견하여 藩部化하는 것을 中策, 단지 조약 체결에만 간여하는 것을 下策으로 제시하였다. 상책과 중책을 전통적인 제국성이라고 한다면, 하책은 근대적인 제국성이라는 점에서 눈 길을 끈다. 이는 조선의 외교를 自主에 맡길 것이 아니라 청의 관할 아래 두자는 주장으로, 조선을 서양 국제법 서적에 명시된 屬國, 半主之國으로 대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청 정부는 하여장으로 하여금 수신사 김홍집에게 미국과의 수교를 권고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아직까지는 청 정 부가 소극적인 勸導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하여장은 청국공사관을 찾아온 김홍집에게 러시아를 방비하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할 것을 역설하였 다. 그리고 이 내용을 「朝鮮策略」이라는 문서에 담아 전달하였다. 앞서 이 홍장도 조선의 조약 체결을 勸導하기 위해 이유원과의 사적인 서신 교환이 라는 방식을 활용한 바 있다. 이때 총리아문 또한 하여장에게 개인 의견인 것처럼 수교를 권유하라고 지시하였다.11) 그래서 하여장은 참찬 황준헌을

9) 「總署總辦收出使大臣何如璋函」(光緖 6年 4月 1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403쪽.

10) 「淸詹事府少詹何公傳」, 109쪽.

11) 「總署收出使大臣何如璋等函」(光緖 7年 1月 2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457쪽.

앞세우는 한편, ‘조선책략’ 앞에 ‘私擬’라는 두 글자를 넣어 청 정부의 공식 적인 의견이 아닌 듯 포장하였다. 그러나 김홍집이 귀국하여 고종에 復命 할 때 「조선책략」을 공식 제출하면서 “현재의 여론이 아직은 통하여 깨우 쳤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라고 할 만 큼 조선의 집권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이후 조선과 미국의 수교는 급물 살을 타게 되었다.13)

그런데 하여장이 「조선책략」에서 미국과의 수교를 권유한 것은 어디까지 나 청이 조선의 상국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는 “중국이 아끼 는 나라로는 조선만한 것이 없다. 조선이 우리 藩屬이 된 지 이미 천년이 지났다. … 서양의 통례는 양국이 전쟁을 할 때 局外의 나라는 그 사이에 서 중립하고 치우쳐 도울 수 없지만 속국만은 이 사례에 있지 않다.”고 하 였다.14) 여기서 하여장이 조선을 전통적인 속국, 즉 번속이라고 하면서도, 이를 서양 국제법에 따른 속국과 동일시하여 청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음 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전통외교와 근대외교의 관념이 착종된 당 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윽고 하여장은 조선으로부터 재차 파견된 李東仁으로부터 미국과의 수 교 의사를 공식 확인받았다. 이로써 조선 정부를 설득했다고 판단한 하여 장은 청 정부에 「主持朝鮮外交議」를 제출하여 조선 정책을 전환할 것을 재 차 촉구하였다.15) 그러나 앞서 「삼책」이 기각되었음을 감안하여 주장의 수 위는 다소 낮추었다. 조선을 군현으로 삼는다는 상책은 폐기되었고, 그 대 신 판사대신을 주재토록 한다는 중책이 상책으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상책 이 실행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단 조선이 외국과 통상하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는데, 이는 본디 하책에 불과하던 것이었다.16) 그럼에도 총리아문

12)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函. 附件一之附件」(光緖 7年 2月 3日),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463쪽.

13) 「조선책략」의 작성 및 전달 경위와 그 영향에 대해서는 송병기, 앞의 책, 1985, 59-86쪽 ; 권석봉, 앞의 책, 1986, 4장 참고.

14) 「朝鮮策略」, 49쪽.

15) 「總署收出使大臣何如璋函 附件一. 何如璋「主持朝鮮外交議」」(光緖 6年 10月 16日), 淸 季中日韓關係史料 , 439-4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