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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동화

문서에서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페이지 56-67)

벤야민은 마치 쓰지 않는 듯 쓰는 발저의 글쓰기에서 ‘언어 황무지화 Sprachverwilderung’라는 독특한 언어적 실천을 읽어낸다. 그것은 작가의 분명 한 의도에 따라 부려지지 않고, 오히려 황야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듯 한 발저 언어의 기묘한 운동을 가리킨다. 로베르트 발저 (1929) 비평문에 따르 면 이러한 언어 운동이 유독 기이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발저의 글쓰기가 아무 런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은 듯 보임에도, 역설적으로 (어떤) 독자들을 매우 강력 하게 끌어당기고 매혹한다는 점에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소수의 지조 있는 독 자들―예컨대 ‘싸구려 시 die feile Glosse’를 제멋대로 재단하거나 세련되게 만 들려고 하지 않는 독자들―은 이른바 ‘거대 양식의 문학 große Literatur’으로부 터 얼마나 많은 희망의 나비들 Hoffnungsfalter이 이 ‘보잘 것 없는 형식 kleine Form’으로 날아들었는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129) 달리 말해 그들은 언어의

‘황무지 속에서 피어난 가녀리거나 혹은 가시 돋친 꽃들 zarten oder stachlichen Blüten in der Öde’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30)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언어 황무지화’라는 발저의 언어 기법은 어떻게 구현되며, 또한 어떠한 마법적인 힘을 내재하고 있을까? 벤야민은 이러 한 질문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로베르트 발저 비평문에서 ‘언어 황무지화’를 크게 세 가지 차원과 결부하여 서술한다.

첫째, ‘언어 황무지화’는 ‘언어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방치되어 있는 상태 Sprachverwahrlosung’ 혹은 ‘자기방임 Sichgehenlassen’의 상황과 관련된다.131) 여기서 벤야민은 ‘자신의 작품을 단 한 줄도 더 좋게 고친 적이 없다고 한 발저 의 고백 das Eingeständnis von Walser, […] er habe in seinen Sachen nie eine Zeile verbessert’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이 말을 믿는다면 발저의 이러한

128) 베른트 비테: 발터 벤야민. 윤미애 옮김. 한길사 2004, 38면.

129) Vgl. W. Benjamin: Robert Walser, S. 126.

130) Vgl. Ebd.

131) Vgl. Ebd.

글쓰기야말로 ‘극도의 의도 없음과 최고도의 의도가 서로 완벽하게 합치되는 지 점 die vollkommene Durchdringung äüßerster Absichtslosigkeit und höchster Absicht’임을 통찰하게 된다고 역설한다.132) 이와 같은 벤야민의 언급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수다스럽게 이어지는 발저의 말하기 는 기실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수행한다.

그것은 발저 자신이 열정적으로 ‘그저’ 걷던 와중에서와 같이 무수히 많은 지나 감의 흔적들을 남기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이러한 지나감의 흔적들이야말로 발저에게는 이미 존재해온 여러 의미의 경계선들을 넘어가거나 지우는 장치들 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 황무지화’ 기법은 극도의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기존 의 법과 폭력의 서사를 무화시키는 전복적이며 급진적인 말하기인 것이다. 이처 럼 작가가 언어 자체를 위하여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우는 미메시스적 글 쓰기 방식은 다름 아닌 세계 자체의 역동적인 변화 가능성과 조응한다. 마법에 걸려 있는 세계는 마법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발저 의 글쓰기는 신화의 마법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계 상황 속에서도, 이로부터 깨 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흔들거리는 불빛을 쉬이 꺼뜨리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산책과도 같은 글쓰기와 관련하여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은 2005년 3월 베를린의 한 예술 아카데미에서 행한 짧은 강연― 로베르트 발저는 왜 그토록 중요했고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가? Warum war und ist Robert Walser so wichtig?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스피노자의 작품들에는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모국어가 사용된 곳이 유일하게 딱 한 군데 있습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것은 여기서 스피노자가 내재적 원인의 의 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능동적인 측면에서든 수동적인 측면에서든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행위자 자신과 관련되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 말입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이 개념의 예를 들기 위해, 스피노자는 자신의 모국어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산책가다’라는 말은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쓰는 스페인어로는 pasearse, [독일어로는] sich-promenieren으 로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산책을 ‘자신을 산책으로 이끈다’, ‘스스로를 가 게 내버려둔다’로 이해한 것이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은 행 위와 비행위, 능동성과 수동성,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 다. 산책은 발저의 피조물들이 인류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메시아적 범례인 것입 니다.133)

132) Vgl. W. Benjamin: Robert Walser, S. 126 f.

133) Giorgio Agamben: Warum war und ist Robert Walser so wichtig?. In: robert walser

이처럼 이미 구분된 양 극단을 마치 양 극단이 아닌 것처럼 지우는 발저의 말하기는 벤야민에 따르면, 모든 글쓰기 형식을 아우르고 있지만 단 한 가지 예 외적 형식에 직면한다. ‘내용만을 중요시하고 그밖에 다른 것은 도외시하는 가 장 흔한 형식에 Nämlich dieser einen geläufigsten [Form], der es auf den Inhalt ankommt, und sonst auf nichts’ 말이다.134) 바꾸어 말하면 “발저의 작품 들에서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어서, 그가 말해야하는 모든 것이 글쓰기 자체의 의미와 맞닥뜨릴 경우 그에게서 완 전히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말해야하는 모든 것이 글쓰기를 하는 와중에 바닥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135) 이처럼 벤야민이 보았을 때 발저에게 있어 글쓰기 방식 자체는 다른 그 무엇보 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벤야민은 발저의 독특한 문학적 전략의 근저를 이루는 것으로, ‘그 가 지닌 너무나도 스위스적인 면모 etwas sehr Schweizerisches an diesem Dichter’에 주목한다. 그것은 바로 ‘수줍어하는 태도 Scham’,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어에 대한 수줍음 Sprachscham’을 가리킨다.136) 이와 관련하여 벤야 민은 다음과 같은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아놀트 뵈클린과 그의 아들 카를로 그리고 고트프리트 켈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들은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객줏집에 앉아있었다.

mikrogramme das kleine welttheater. (http://www.mikrogramme.de/e945/e935): “In den Werken Spinozas gibt es nur eine einzige Stelle, an der er sich der Muttersprache der sephardischen Juden bedient.... Es handelt sich um eine Passage, in der Spinoza die Bedeutung der immanenten Ursache erklärt, das heißt einer Handlung, die sich auf den Handelnden selbst bezieht, in der aktiv und passiv ein und dieselbe Person sind. Um ein Beispiel für diesen sehr wichtigen Begriff zu finden, sieht sich Spinoza gezwungen, auf seine Muttersprache zurückzugreifen. Spazierengehen heißt in jenem Spanisch, das die Sepharden sprechen, pasearse ­ sich­promenieren, also den Spaziergang begreifen als ein Sich-spazieren-führen, ein Sich-gehen-lassen. In diesem Sinn ist der Spaziergang Robert Walsers ein Mittelwesen zwischen Tun und Nichttun, Aktivität und Passivität, Sein und Nicht-Sein. Der Spaziergang ist das messianische Paradigma, das Walsers Kreaturen der Menschheit als Erbe hinterlassen.”

134) Vgl. W. Benjamin: Robert Walser, S. 127.

135) Ebd.: “Walsern ist das Wie der Arbeit so wenig Nebensache, daß ihm alles, was er zu sagen hat, gegen die Bedeutung des Schreibens völlig zurücktritt. Man möchte sagen, daß es beim Schreiben draufgeht.”

136) Vgl. Ebd.

그들이 늘 앉는 자리는 이 술손님들이 보여주는 으레 말 없고 과묵한 분위기로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이 날도 이 무리는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아들 뵈클린이 말했다. “덥군요.” 그리고는 15분이 더 지 나자 아버지 뵈클린이 말했다. “바람도 잠잠하구나.” 켈러는 얼마간 그대로 가만 히 있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불쑥 꺼냈다. “수다쟁이들하고는 술 마시고 싶지 않 아.” 여기서 유별난 재담으로 정곡을 찌르고 있는 저 시골 농부다운 언어[에 대 한] 수줍음이야말로 발저의 본령이다.137)

여기서 ‘언어-수줍음 Sprachscham’은 우선 위의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언어를 마주대할 때에 드는 수줍음을 가리킨다. 이는 유창한 언변이 쏟아져 나올 때조차도 자신이 방금 내뱉은 말이 잊히도록 해야 한다는 듯이 다 른 말들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발저의 말하기에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처럼 ‘언 어 앞에서 vor der Sprache’에서 느끼는 수줍음은 벤야민의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934)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참조할 때 다른 차원으 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수줍음은 이중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수줍음 은 인간의 내적인 반응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요구를 지니고 있다. 수줍음은 다 른 사람들 앞에서 느끼는 수줍음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느끼는 수줍 음이기도 한 것이다.”138) (인용자 강조) 강조된 문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언어 Sprache’라는 말로 치환해 본다면, 언어-수줍음은 언어 앞에서 느끼는 수줍음뿐 만 아니라 ‘언어를 위한 수줍음 Scham für die Sprache’으로도 해석될 여지를 확보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왜소하 고 빈약한 자아가 스스로의 자신 없는 언어들 앞에서 느끼는 수줍음이 어떠한 연유로 돌연 그 언어를 ‘위한’, 그 언어를 ‘배려할 수 있는’ 수줍음으로 비약할

137) Ebd.: “Von Arnold Böcklin, seinem Sohn Carlo und Gottfried Keller erzählt man diese Geschichte: Sie saßen eines Tages wie des öftern im Wirtshaus. Ihr Stammtisch war durch die wortkarge, verschlossene Art seiner Zechgenossen seit langem berühmt.

Auch diesmal saß die Gesellschaft schweigend beisammen. Da bemerkte, nach Ablauf einer langen Zeit, der junge Böcklin: »Heiß ist’s«, und nachdem eine Viertelstunde vergangen war, der ältere: »Und windstill.« Keller seinerseits wartete eine Weile; dann erhob er sich mit den Worten: »Unter Schwätzern will ich nicht trinken.« Die bäuerische Sprachscham, die hier von einem exzentrischen Witzwort getroffen wird, ist Walsers Sache.”

138) W. Benjamin: Franz Kafka. In: Gesammelte Schriften Bd. 2-2. Frankfurt a. M. 1991, S. 428: “Sie[Die Scham] hat aber ein doppeltes Gesicht. Die Scham, die eine intime Reaktion des Menschen ist, ist zugleich eine gesellschaftlich anspruchsvolle. Scham ist nicht nur Scham vor den andern, sondern kann auch Scham für sie sein.”

수 있는가? 자신의 말을 자꾸만 지우게끔 하는 ‘언어 앞에서의 수줍음’은 다른 한편 당당하게 구획 짓는 세계에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무능력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능력은 능력이기도 한데, 바로 이러한 무능력을 통해 관습화되고 규범화된 언어,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언어, 다시 말해 법과 신화의 언어가 힘을 잃고, 오히려 변방으로 밀려난 언어를 위한 공간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언어-수줍음이라는 좁은 문(門)을 통해 황무지화 된 언어가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언어-수줍음의 이면에 존재하는 무능력의 능력은 벤야민의 언어를 참조한다면 ‘메시아적’139) 능력이라 명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벤야민은 발저 언어의 ‘수줍어하면서도 정교한 서투름 keusche, kunstvolle Ungeschick’이 다름 아닌 ‘광기Wahnsinn’의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라 고 진단한다.140) 하지만 그에 따르면 발저의 이야기는 ‘몰락하는 삶의 신경과민 아니라 [광기로부터] 소생 중인 삶의 순수하고도 생기발랄한 분위기 nicht die Nervenspannung des dekadenten, sondern die reine und rege Stimmung des genesenden Lebens’를 보여준다.141) 말하자면 발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들은 광기를 겪었고, 바로 그러한 까닭에 병으로부터 회복 중에 있는 사람이 느 끼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142) 그리고 벤 야민은 바로 이러한 발저의 인물들이 ‘동화 Märchen’ 속 인물들과 접점―“순진 무구한 고매함 kindlichen Adel”143)―을 공유한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이후의 논 의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벤야민이 ‘신화와의 거대하고 세속적인 대결 과정 속 에서’ 모색되어야 할 형식으로 ‘동화’를 꼽았다는 사실이다.

동화는 일반적으로 현실적이지 않은 환상적인 이야기로 간주된다. 그런데 “모 든 동화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고향세계에 대한 꿈”144)이라는 노발리 스의 생각에 비추어보면, 동화는 단순히 공상적인 방식으로 소망을 충족시켜주 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경험지평 안에서는 결코 온전히 실현될 수 없

139) Vgl. W. Benjamin: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In: Gesammelte Schriften Bd.

1-2. Frankfurt a. M. 1991, S. 704.

140) Vgl. W. Benjamin: Robert Walser, S. 127 f.

141) Vgl. W. Benjamin: Robert Walser, S. 129.

142) Vgl. Ebd.

143) Ebd.

144) Novalis: Werke. Tagebücher und Briefe Friedrich von Hardenbergs. In:

Hans-Joachim Mähl (Hg.): Das philosophisch-theoretische Werk. Bd. 2. Darmstadt 1999, S. 353: “Alle Märchen sind nur Träume von jener heimatlichen Welt, die überall und nirgends 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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