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immernde, goldene, göttliche Gerechtigkeit. Ja, Kraus ist ein Bild rechtlichen, ganz, ganz eintönigen, einsilbigen und eindeutigen Wesens. Niemand wird die Schlichtheit dieses Menschen verkennen, und deshalb wird ihn auch niemand achten, und er wird durchaus erfolglos bleiben.
Reizend, reizend, dreimal reizend finde ich das. (JvG 81 f.) (인용자 강조)
크라우스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인은 세속적인 세계 속에 ‘아주 단조롭고, 단순하게’ 머물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도 오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하고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처럼 하나의 ‘풀리지 않는 심오한 수수께끼 ein tiefes unauflösbares Rätsel’(JvG 81)로, 혹은 ‘오래 전부터 전해져오는 그 무엇 etwas Altes’(JvG 77)으로 이 세계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섬김의 행위는 크로 노스 안에 카이로스를 마련하는 약간의 ‘조정’이자 작은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하인이 도래시키는 동화의 세계는 이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선험적 고향 이 아니라, 하인의 수동성이라는 능력을 통해 세속 안으로 개입된 카이로스의 세계와 다름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크로노스 안에 도래한 카이로스라고 볼 수 있다.
는 제스처는 ‘호기심 Neugier’과 ‘아첨 Schmeichelei’이다. 그는 마치 탐정가와 같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류사회를 들여다보고, 아첨하듯 이에 다가가 이곳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세계에 대해 철저히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하 인의 섬김 또한 프루스트의 모방적 묘사방식과 매우 유사한 듯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인의 섬김은 프루스트의 미메시스적 태도보다 더 욱 더 급진적이다. 프루스트가 ‘호기심’과 ‘아첨’하는 태도로, 다시 말해 취향을 가진 주체로서 세계와 만났다면,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생도들은 ‘인내’와 ‘복종’
을 강요하는 규정을 통해 비워진 자아로서 세계와 만나기 때문이다. ‘호기심’과
‘아첨’하는 태도에는 여전히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취향과 기호가 전제되어 있는 반면, 규정을 통한 하인의 섬김은 주체의 선호마저도 지우는 것이다. 야콥 은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내재한 규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작은 존재여야 한다. 우리가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법칙, 우리에게 가해지는 강요, 그리고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과 취향을 제시해주는 수많은 가차 없는 규정들, 그들이 위대한 것이다. 우리, 우리 학원생들은 위대하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지 작고, 가난하고, 종속된, 끊임없이 복종의 의무를 진 난쟁이라는 것 을 누구나, 심지어 나까지도, 느끼고 있다.
[…] aber klein sollen wir sein und wissen sollen wir es, genau wissen, daß wir nichts Großes sind. Das Gesetz, das befiehlt, der Zwang, der nötigt, und die vielen unerbittlichen Vorschriften, die uns die Richtung und den Geschmack angeben: das ist das Große, und nicht wir, wir Eleven. Nun, das empfindet jeder, sogar ich, daß wir nur kleine, arme, abhängige, zu einem fortwährenden Gehorsam verpflichtete Zwerge sind.
(JvG 64) (인용자 강조)
이렇듯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생도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법칙과 강요, 수없이 많은 규정들이 명령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비워나가야 한다. 여기서 개인적인 취향과 기호도 물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어서 야콥은 이러한 규정들 이 생도들을 결코 주눅 들게 만들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언급
2004, 112면 참조: “프루스트의 진정한 독자들을 끊임없이 감동시키는 것은 조그마한 쇼크들 이다. 그밖에도 프루스트의 진정한 독자는 은유 속에서 예의 저 흉내, 즉 사교계의 잎이 무성 한 정원 속에서 이러한 정신의 삶을 쟁취하려고 투쟁하는, 그를 깜짝 놀라게 했음에 틀림없는 저 흉내의 침전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여 얘기한다면, 호기심과 아첨이 라는 이 두 개의 악덕이 서로 긴밀하게 또 생산적으로 침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다.287) 오히려 이들은 이러한 규정들을 통해 자신의 영혼과 신체의 특징들을 더욱 더 잘 알게 되고, 단순하고 고지식한 연습 안에서 더 많은 은총을 경험하 게 된다. 이렇듯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규정들은 생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주체’
를 구성하는 내용들을 끊임없이 지워가도록 함으로써 이들을 ‘비(非) 규정’의 상 태로 인도한다. 이러한 상태는 내용이 아예 부재하는 ‘무(無) 규정’의 상황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하인들은 규정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러한 ‘비(非) 규정’의 규정을 통해 신화적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주인들을 가장 밀착해서 섬기 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도들이 매번 자신을 지워가는 과정 속에서 더욱 뚜렷 해지는 것은 규정에 속박된 부자유한 상황이 아니라, 끊임없이 ‘오고 있는 자유’
의 상황과 다름없다. 이러한 자유는 신화적 공간에서 화석화된 법과 경계선들을 다시 한 번 더 분할함으로써 도래하는 자유이다.
우선 생도들은 신화적 세계의 폭력적인 이분법으로부터 매순간 자유롭다. 대 도시의 시민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성공’과 ‘실패’, ‘큰 존재’와 ‘작은 존재’라는 화두를 놓고 보자면,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생도들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실패’
하고 ‘작은 존재’에 해당된다. 이러한 현재 상황은 신화적 세계의 관점에서 보자 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 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288) 하지만 이들은 기존의 ‘성공’과 ‘실패’라는 세속적인 개념을 지양하지도, 파기하 지도 않으면서, 이러한 개념 구분을 쪼갠다(혹은 분할한다). 가령 야콥은 자신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도, 이 학교에서 느끼는 ‘아주 기묘한 형태의 만족감 eine ganz merkwürdige Zufriedenheit’(JvG 7)을 통해 이 두 가 지 개념의 구분을 순간 무효화시킨다. 이어서 그는 자신에게 ‘내면적인 성공 innere Erfolge’(JvG 7)은 가능할 것이라고 기록한다. 크라우스 역시 ‘아무런 주 목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별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감’을 통해서 세속적 성공과 실패라는 개념 구분을 중단시킨다.289) 이렇듯 하인의 기묘한 존재방식은
287) Vgl. JvG 64: “Man will uns vielleicht verdummen, jedenfalls will man uns klein machen. Aber man schüchtert uns durchaus nicht etwa ein. 어쩌면 우리를 우둔하게 만들 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를 작은 존재들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를 절대 주눅 들게 만들지는 않는다.”
288) “wir Knaben vom Institut Benjamenta werden es zu nichts bringen, das heißt, wir werden alle etwas sehr Kleines und Untergeordnetes im späteren Leben sein.” (JvG 7) 289) Vgl. JvG 81: “Ja, man wird Kraus nie achten, und gerade das, daß er, ohne Achtung
zu genießen, dahinleben wird, das ist ja das Wundervolle und Planvolle, das An-den-Schöpfer-Mahnende. 그렇다, 사람들은 결코 크라우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
신화적 세계를 초월함으로써가 아니라, 이 신화적 세계가 부과한 법과 경계를 다시 한 번 더 분할함으로써 자유를 도출해낸다. 바꾸어 말하면 생도들은 신화 가 부과하는 폭력적 이분법으로 이 순간 자유롭다.
그런데 이러한 ‘분할’하는 자유는 발저의 인물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발저의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언어를 정돈되지 않은 상태 로 방치하는 발저의 ‘언어 황무지화 Sprachverwilderung’ 기법은 바로 이러한
‘난삽한’ 언어운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신화로부터 깨어나는 계기―‘자유’―를 마 련한다. 야콥은 벤야멘타 원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나는 지금 벤야멘타 씨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근사한 갈색 수염. 뭐라고? 근사한 갈색 수염이라고?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그렇지 않다. 원장 선생에게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멋진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다만 과거에 파란만장한 삶과 큰 불행을 겪었으리라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러한 인간적인 면, 거의 신성하 게 느껴지는 그런 점이 그를 아름답게 보이게 할 뿐이다. 진실한 인간들과 남자 들은 결코 눈에 띄게 아름답지 않다.
Ich finde Herrn Benjamenta geradezu schön. Ein herrlicher brauner Bart - was? Herrlicher brauner Bart? Ich bin ein Dummkopf. Nein, am Herrn Vorsteher ist nichts schön, nichts herrlich, aber man ahnt hinter diesem Menschen schwere Schicksalswege und -schläge, und dieses Menschliche ist es, dieses beinahe Göttliche ist es, was ihn schön macht. Wahre Menschen und Männer sind nie sichtbar schön. (JvG 44) (인용자 강조)
야콥은 ‘벤야멘타 원장의 갈색 수염이 멋지다고 생각한다’는 자신의 말을 내 뱉자마자, 곧바로 이 말을 지워버린다.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고는 돌연 수줍 어서 어쩔 줄을 모르기라도 하듯 야콥은 두 번이나 자문한다. ‘뭐라고? 근사한 갈색 수염이라고?’ 그리고는 방금 한 말과 완전히 상반된 말이 이어진다. ‘원장 선생에게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멋진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처럼 발저 의 ‘산만한’ 문장들은 수줍은 듯 지워지고, 다시 쓰이고를 반복하면서 장황하게 이어지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글쓰기는 한없이 흔들리는 방식으로만 진행 되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삽입되어 있는 ‘다만 aber’이라는 말을 기점으 로 해서 야콥의 이야기는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 야콥은 벤야멘타 원장이 맞 닥뜨려야 했던 ‘과거의 큰 불행’과 이러한 경험과 결부되어 있는 그의 ‘인간적인 이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그가 별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 바로 그 점이 경이로운 것이고, 계획으로 충만한 것이며, 조물주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면’을 예감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면이 ‘거의 beinahe’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라고 덧붙인다. 이어서 야콥은 벤야멘타 원장과 같이 ‘진실한 인간들 Wahre Menschen’이 가진 아름다움은 ‘결코 가시적이지 않 다 nie sichtbar’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발저의 언어 황무지화 기법은 단지 자신 의 말을 긍정하는 것에서 부정하는 것으로, 혹은 이와 반대로 부정하는 것에서 긍정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언어 황무지화 기법은 결코 이러한 단선적인 언어운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앞의 문장을 참조하면서 다음 물음 을 던지고, 이로써 앞의 문장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이 있음을 제기하는 방 식으로 이어진다. 인용된 구절들을 살펴보면, ‘뭐라고? 근사한 갈색 수염이라 고?’라는 물음은 바로 앞의 문장에 대한 반사적인 반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앞의 문장을 자신과 가까이에 붙들어 놓으면서 바로 이 문장을 분할 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야콥의 물음은 ‘나는 지금 벤야멘타 씨가 아름답 다고 느꼈다. 근사한 갈색 수염’이라는 문장은 다시 한 번 더 끌어당기면서, 이 문장이 미처 다 발화하지 못한 말들을 위한 공간을 예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 침내 이 공간에 임하게 되는 것은 현재의 가시적 매력과 매력없음이라는 이분 법을 초과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거의 신적인 무엇 dieses Menschliche, […]
dieses beinahe Göttliche’이다. 이처럼 발저의 황무지화된 언어들은 신화의 언 어, 다시 말해 신화의 화석화된 법적 언어를 그 내부에서 분할함으로써, 바로
‘언어 그 자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은 신화에서 깨어나 는 순간과 뜻밖에 도래할 자유를 위한 여백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앞의 문장으 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이에 밀착해 이 문장을 쪼개는 방식으로 진행되 는 발저의 ‘언어 황무지화 Sprachverwilderung’ 기법은 다름 아닌 신화의 공간
‘안에서’ 기적의 순간을 예비하는 ‘섬김의 이념 Dieneridee’과 정확히 조응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