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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은 누군가를 섬기는 데에 있어 자유롭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고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 Jemandem, den man nicht kennt und der einen gar nichts angeht’(JvG 23)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섬김은 단순히 추상 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맥락을 획득한다. 야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die Fülle des Missrathnen aller Art, das es im Leben festhält, dem Leben selbst einen düsteren und fragwürdigen Aspekt.” (국역본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220면.) 263) Vgl. Ebd.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혹은 ‘거의 모든’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 람들이 자신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264)(인용자 강조) 이 처럼 야콥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결코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을 뿐만 아 니라, 심지어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용된 구 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fast alle’이라는 수식어는 ‘모든’이라는 말이 상정하는 어떤 ‘한계’나 ‘구획된 범위’를 지우면서, 타인에게 연루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무 한함을 재차 강조한다. 외견상 불필요해 보일 뿐만 아니라, 애매모호한 정도를 일컫는 ‘거의 fast’라는 단어는 역설적으로 세계의 실제적인 모습을 가장 명료하 게 드러내 보여준다. 또한 이어지는 문장은 야콥과 관계 맺는 타인의 외연을 더 욱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내 옆을 스쳐가는 저기 저 사람들, 그들은 나와 어떻 게든 관련이 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Die da an mir vorübergehen, die gehen mich irgend etwas an, das steht fest.”(JvG 23) (인용자 강조) 이 처럼 야콥이 섬기는 대상은 그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의 공 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자들이며, 이들이야말로 야콥의 ‘이웃’이 된다. 여기서

‘~와 상관있다’를 의미하는 타동사 angehen은 ‘지나가다’를 의미하는 자동사 vorübergehen과 연동하면서, 자신의 의미를 물리적 연관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축소시킨다. 다른 사람들이 ‘야콥의 얼굴 안으로’ 들어올 때에, 즉 야콥으로 하 여금 그들의 현존을 느끼도록 할 만큼 물리적으로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 존재 할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야콥은 길에 서 우연히 맞닥뜨린 강아지를 도와주는 상상을 한다.

내가 저기서 길을 걷고 있다고 하자. 햇살이 환히 빛난다. 갑자기 강아지 한 마리 가 내 발밑에 와서 낑낑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 값비싼 어린 동물의 다리가 입마개에 걸려 뒤엉켜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강아지는 더 이상 걸을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몸을 숙여 엄청난, 그 엄청난 불행에서 강아지를 구해준 다.

Ich gehe da so, die Sonne scheint, da sehe ich plötzlich ein Hündchen zu meinen Füßen winseln. Sogleich bemerke ich, daß sich das Luxustierchen mit den kleinen Beinen im Maulkorb verwickelt hat. Es kann nicht mehr laufen.

Da bücke ich mich, und dem großen, großen Unglück ist abgeholfen. (JvG 23)

264) “[…] im Grunde genommen gehen einen alle oder wenigstens fast alle Menschen etwas an.” (JvG 23)

야콥은 곤란에 빠진 강아지를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다가가 그 동물을 ‘엄청 난, 엄청난 불행으로부터 dem großen, großen Unglück’ 구해준다. 온 세계가 무한한 연관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끼는 야콥에게 강아지 한 마리의 낑낑거 림은 결코 도처에 널려 있거나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아니기 때문 이다. 오히려 강아지 한 마리의 고통으로 인해 온 세계가 동시에 하나같이 고통 을 겪을 것이다. 특히 두 번이나 반복적으로 쓰인 ‘엄청난, 엄청난’이라는 형용 사는 야콥의 민감한 감수성과 윤리적 태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야콥에게는 시대가 요구하는 대의를 따르는 것보다, 오히려 그러한 대의에 비추어 본다면 시간낭비로 폄하될 수 있는 현재 당면한 문젯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더욱 시급 한 과제로 다가온다. 그리고 곤란한 상황은 이내 야콥의 등장과 섬김으로 또 다 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섬김의 양태는 우선 모든 문제 상황을 종결하 는 신의 출현과 같은 기적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기이한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머지않아 개의 여주인이 다가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차 리고는, 야콥에게 기묘한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그때 개의 여주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를 보고는 내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 나는 숙녀 앞에서 모자를 벗어 인사하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아, 나의 등 뒤에 남겨진 그녀는 세상에 아직 친절한 젊은 이가 있었구나 생각하고 있으리라. […] 예쁜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 는 그 여인이 미소 짓던 모습이라니.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 그녀가 나를 신사 로 만들었다. 그렇다, 올바르게 처신할 줄 알면 신사가 되는 것이다.

Nun kommt die Herrin des Hundes heranmarschiert. Sie sieht, was los ist, und dankt mir. Flüchtig ziehe ich meinen Hut vor der Dame und gehe meiner Wege. Ach, die da hinten denkt jetzt, daß es noch artige junge Menschen in der Welt gibt. […] Und wie diese übrigens ganz unhübsche Frau gelächelt hat. «Danke, mein Herr.» Ah, zum Herrn hat sie mich gemacht. Ja, wenn man sich zu benehmen weiß, ist man ein Herr. (JvG 23) (인용자 강조)

인용된 구절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일차적으로 ‘주인’을 의미하는 Herr라는 단 어가 무려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인인 야콥은 이 웃의 고통을 ‘엄청난’ 것으로 느끼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 키나 deus ex machina’265), 즉 기적의 이미지로 사건에 개입한다. 그런데 여기 265)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라틴어로 ‘기계에 의한 신(神)’ 혹은 ‘기계장치의 신’을 일컫는다. 본 문에서 이 말은 예기치 못한 사이에 등장하여 단숨에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손길’이라는 의

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하인의 섬김을 전후로 하여 주인과 하인의 위치가 기묘하 게 뒤바뀌게 되는 상황이다. 개의 여주인은 뜻밖의 도움을 받고 하인인 야콥을 연신 ‘주인’이라 칭하며 그에게 인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야콥은 섬김이라는 행위를 통해 돌연 종의 위치에서 ‘상황의 주인’으로 옮겨진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선행을 전후로 그에게 어떠한 금전적․가시적 보상도 주어지지 않지만, 그 행동 의 흔적은 메아리치는 웃음소리로 세계 도처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게 된다. 야 콥이 떠난 뒤에 그의 등 뒤로 남겨진 한 숙녀의 미소 짓는 모습이야말로 온 세 계와 더불어 미소 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균질한 신화적 공간이 하인의 섬김으로 인해 무장 해제되는 순간은 독일 바로크 비애극 das barocke Trauerspiel의 한 부류인 운명 비극 Schicksalstragödie에 등장하는 ‘기적 ein Wunder’이라는 장치를 연상시킨다. 운 명 비극에서 ‘운명 Schicksal’에 사로잡힌 채 죄 짓는 피조물들은 오로지 기적을 통해서만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운명이 지배하는 세계의 결정성 Determiniertheit은 이 세계 외부로부터 이곳에 임할 ‘기적’이라는 도식을 불가피 하게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266) 이처럼 운명 비극에 나타나는 기적은 세계 의 필연적 인과율―운명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끔 하는 유일한 가 능성이자, 이러한 피조물의 암담한 조건에서 비롯된 수직적 상상력이라고 간주 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러한 ‘기적’이란 도식은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미로 사용하였다.

266) Vgl. W. Benjamin: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In: Gesammelte Schriften Bd. 1-1. Frankfurt a. M. 1991, S. 308: “Die Anschauung des Determinismus kann keine Kunstform bestimmen. Anders der echte Schicksalsgedanke, dessen entscheidendes Motiv in einem ewigen Sinn solcher Determiniertheit zu suchen wäre.

Von ihm aus braucht sie keineswegs sich nach Naturgesetzen zu vollziehen;

ebensowohl vermag ein Wunder diesen Sinn zu weisen. Nicht in der faktischen Unentrinnbarkeit ist er gelegen. Kern des Schicksalsgedankens ist vielmehr die Überzeugung, daß Schuld, als welche in diesem Zusammenhang stets kreatürliche Schuld - christlich: die Erbsünde -, nicht sittliche Verfehlung des Handelnden ist, durch eine wie auch immer flüchtige Manifestierung Kausalität als Instrument der unaufhaltsam sich entrollenden Fatalitäten auslöst.” (국역본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조만영 옮김. 새물결 2008, 162면 참조: “결정론적인 견해는 어떠한 예술 형식도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운명 사상은 다르다. [운명 비극에서] 운명 사상의 핵심적인 모티브는 결정성의 영원한 의의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 영원한 의의라는 견지에서 볼 때 결정성 이 자연법칙에 입각해서 실현될 필요는 전혀 없다. 이 결정성의 의의는 기적이 보여줄 수 있 다. 의의는 사실적인 불가피성에 바탕을 두는 것은 아니다. 운명 사상의 핵심은 죄가 인과율을 불러일으킨다는 확신에 놓여 있다. 죄는 지금의 문맥에서는 행위자의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항 상 피조물로서의 죄,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원죄로서, 그것은 아무리 순간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굴러가는 숙명의 도구로서 인과율을 야기한다.”)

이라는 이분화된 세계를 상정한다. 하지만 야콥 폰 군텐에 등장하는 기적은 이와 같이 이분법적으로 구별되는 두 세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 등장 하는 기적 역시 세계의 변화가능성이자 역동성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출현하기 는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는 오로지 이 세계에 이미 속해 있는 하인을 통해서만 연출된다. 다시 말해 야콥 폰 군텐의 하인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벌써 들어와 있으며, 외부의 전지전능한 은총에 힘입지 않고 자신을 비우는 수동성의 능력을 통해 기적을 행한다. 이렇듯 하인의 섬김은 세계 안에서의 약간의 조정을 통 해267) 세계의 또 다른 국면이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적이 ‘향기 Duft’와 같이 전혀 가시적이지 않은 차원으로 일어난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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