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본 논문은 로베르트 발저의 야콥 폰 군텐에 나타난 글쓰기 형식 을 분석하고, 이러한 글쓰기 형식이 지니는 의미의 지평들을 ‘신화’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살펴보았다. 발저의 독특한 글쓰기 형식에서 이념과 의미 작용을 읽어 내려는 시도는 1960년대와 1980-9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발저 연구의 주된 흐 름과는 다소 차별화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 발저의 글쓰기는 본래부터 특정한 내용을 전달하거나 독자의 이해를 구하는 시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발저의 이해 불가능한 이야기나 인물들 은 해석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발저 텍스트에 대한 이러한 입장 은 발터 벤야민의 로베르트 발저 비평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인 측면에서 이 비평문과 차이점을 갖는다. 벤야민은 자신이 ‘언어 황무지화’라고 명명한 발저의 독특한 글쓰기에서 ‘신화와 벌였던 거대하고 세속적인 대결’의 흔적들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대결을 뒷받침해준 발저의 힘이 다름 아닌 그의 ‘언어-수줍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여기서 발저의 ‘언어-수줍음’
은 단순히 왜소하고 빈약한 자아가 스스로의 자신 없는 언어들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신화적 세계의 규범화된 언어에 익숙 해지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말미암아 역설적으로 이 세계 안에 ‘새로운’ 언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능력과 다름없다. 이렇듯 발저는 가장 무능력하고 완전히 의도가 배제된 방식으로 최고도의 문학적 전략을 수행해낸다.
이처럼 발저의 글쓰기에서 ‘신화와의 거대하고 세속적인 대결과정’이라는 이 념을 포착해낸 벤야민의 독해는 발저 텍스트를 기존의 ‘이해 불가능성’으로부터 구제해낸 시대비평의 한 전범을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말과 20세 기 전환기는 서구에서 모더니즘이 절정에 이른 시기임과 동시에 전체주의라는 신화가 시대적 어둠을 드리우던 때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적 상황 속에서 기 묘하게 직조된 발저의 작품들은 신화와 합리성의 관계를 단순한 대립관계로 파 악하는 대신, 오히려 ‘인내와 복종’이라는 방식으로 신화에 더욱 밀착해 이로부 터 ‘자유’를 도출해내는 독특한 문학적 실천으로 자리매김 되는 것이다. 이렇듯 벤야민은 발저의 ‘황무지화된’ 언어 속에서 피어난 ‘가녀린 꽃’에 주목한다. 그리 고 이러한 ‘정교한 서투름’은 무엇보다 로베르트 발저의 실제 삶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외견상 이렇다 할 세상의 주목 한 번 받지 못한 ‘실패’한 작가
로, 세속의 삶을 멀리한 채 산책이나 다녔던 ‘은둔자’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무언가를 쓰고 실험하고자 한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그의 ‘쓰기’에 대한 열정은 ‘마이크로그램’ 이외에도 베를린 3부 작과 단편들, 시, 희곡 및 신문에 개제된 수많은 한 페이지짜리 원고들에서 잘 나타 난다. 이처럼 발저가 몸소 보여준 ‘결핍된’ 사람이 가진 진기한 힘과 열정은 그 의 인물들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그중 ‘야콥 폰 군텐’은 자신의 무가치 함을 선언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으며 자발적으로 ‘몰락’하려고 하는 희귀한 인 물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기묘함은 벤야멘타 하인학교라는 공간 과 이곳에 거주하는 인물들에서 극에 달한다.
대도시 한 가운데에 위치한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외견상 ‘신화의 부정적 형 상’들이 집약되어 있는 신화적 공간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학교의 생도들은 온 시민들이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이와 극단 적으로 대조되는 ‘퇴락’의 길을 걷는다. 그들은 좀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고 하 는 대신, 더욱 더 ‘밑으로’ 내려간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을 ‘영(零) eine Null’에 가까운 존재로 비워나간다. 이러한 ‘어리석은’ 삶의 태도는 일견 삶 자체를 부인 하고 허무를 찬미하는 니힐리즘에 예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아를 기각하고 섬김을 수행하는 삶의 방식은 오히려 이 세계의 필연적 인과율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계기를 이 세계 ‘안에서’ 마련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생도들이 훈 련하는 섬김의 태도는 이 세계에 가시적인 결과물을 산출하지 못하지만 ‘향기’
나 ‘기적’의 양태로 약간의 조정을 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신화’ 그 자체에서 추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화’에 는 그것이 가진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계를 가능하게끔 하는 ‘힘’―벤야 민의 언어로 말하자면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듯 방임하는 글쓰기를 통해 신화적 언어 내부로부터 이를 무력화하는 힘 을 훔쳐내는 발저의 ‘언어 황무지화’ 기법은 신화적 공간에 밀착하여 이로부터
‘기적’의 순간을 예비하는 생도들의 ‘섬김’의 태도와 접점을 갖는다고 볼 수 있 다. 여기서 ‘신화’ 그 자체로부터 이를 무력화하는 힘을 얻어내는 방식은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 이론과 정확히 조응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 러한 미메시스적 능력의 목표란 다름 아닌 신화의 극복이며, 신화로부터 자유로 워지는 순간은 바로 새로운 언어가 발견되는 사건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새로운 언어란 신화와 전적으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언어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신화의 규범화된 법적 언어를 한 번 더 분할함으로써 기존
의 의미망으로부터 새로운 배치를 얻게 된 언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새로운 언어가 갖는 힘은 두 개의 극단, 다시 말해 이분법화된 언어 사이의 경 계를 그보다 더 가는 선으로 나누는 데에 존재한다. 이러한 쪼개짐으로 말미암 아 이분법에 예속되지 않는 제3의 언어를 위한 자리―‘자유’―가 마련되는 것이 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유의 계기는 벤야멘타 하인학교 생도들의 수동적 삶의 방식에서도 발견된다. 신화에 침잠하면서도 이로부터 깨어나는 자, 규정에 예속 되어 있으면서도 이로부터 자유를 도출해내는 자의 마력은 이 세계로부터 ‘자 유’를 예비하는 참된 피조물적 자세―인내와 복종―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 러한 의미에서 야콥 폰 군텐은 신화(광기)의 마법으로부터 ‘회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시사하는 섬김의 테제는 결코 공 허하고 추상적인 윤리 명제에 국한되는 대신, 문학의 언어에 내재한 급진적 정 치성과 더불어 신화적 세계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혁명적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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