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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발전을 위한 농업협동조합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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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C2011-61 | 2011. 12. 농업발전을 위한 농업협동조합 운영. 박 성 재 박 준 기 신 기 엽. 선임연구위원 연. 구. 위. 원. 농협경제연구소.

(2) 연구담당 박 성 재. 선임연구위원. 연구 총괄, 1장, 2장, 4장, 5장 집필. 박 준 기. 연. 원. 3장, 4장 집필. 신 기 엽. 농협경제연구소. 4장, 5장 집필. 구. 위.

(3) i. 머 리 말. 이 책은 협동조합을 농업·농촌 정책의 중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개발 도상국들을 위해 한국의 경험을 전해주고자 쓰인 것이다. 한국의 경제발전 과 정에서 볼 때 현재의 개발도상국들이 처한 상황과 유사했던 1945년부터 1990 년까지를 서술 범위로 하였다. 이 시기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서 앞서가는 중진국으로 성장하였으며, 농협은 한국 농업과 농촌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피폐한 농업과 농촌을 살리기 위해 협동조 합 설립을 논의하였지만, 농협의 설립과 조직 및 경영기반의 구축까지에는 오 랜 기간이 걸렸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대부분의 개도국들이 안고 있는 식 량부족, 저생산성, 빈곤과 부채, 정치적 불안정성, 취약한 협동조합의 토대 등 이 원인이었다. 한국 농협은 한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 고, 농업·농촌을 개발하고 성장시키는 핵심 조직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성숙한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조직하고 발전시켜 온 선진국 협동조합과 달리, 한국 농협은 정부에 의해 설립되고, 정부의 보호와 지원의 그늘에서 성장해왔다. 한국 농협은 선진국 농협에 비해 협동조합으로서 적지 않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한국과 유사한 환경에서 산적한 농업·농촌의 문제를 시급해 해결해야 하는 개발도상국에게 한국 농협의 발전 경험이 서구 선진 협동조합 못지않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보고서 가 많은 개발도상국에게 유익한 시사점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11. 12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원장 이 동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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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iii. 요. 약. 이 책은 농업·농촌개발을 위해 고민하고 있는 개발도상국들에게 한국의 농 협 운영 경험을 전해주고자, 1945~1990년의 한국농협의 운영 경험을 정리하였 다. 한국농협은 창립이래 정부의 정책 파트너이자 정책대행기관으로서 농업· 농촌의 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도시와 농촌에서의 성공적인 저축 동원으로 농업부문에 자금을 공급하고 고질적인 농촌의 고리사채를 제도시장 으로 흡수했다. 비료·농약·농기계 등의 농자재와 생활필수품의 공급으로 농업 성장에 기여하고 농촌주민의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었다. 조합원의 농산물을 팔아주고, 산지와 소비지의 유통시설의 확충과 물류현대화, 각종 정보 제공에 앞장섬으로써 조합원의 소득증대와 농산물 유통의 현대화를 선도해왔다. 한국농협은 성장궤도에 진입하기까지에는 오랜 시행착오를 겪었다. 많은 개 발도상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과 부채, 참혹한 내전,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 결핍과 지도자 부족, 빈곤한 정부와 정책 실패 등 갖은 경우를 다 겪었 다. 농협이 설립된 것은 논의를 시작한후 10년이었고 협동조합의 기초조직인 단위조합이 조직과 경영기반을 갖추기까지에는 그로부터 또 다시 14년이 걸 렸다. 한국 농협은 1958년 경제사업 전담의 농업협동조합과 신용사업 전담의 농업 은행으로 2원화된 체제로 출범했지만 두 기관의 갈등으로 3년만인 1961년 두 기관을 통합한 종합농협체제로 전환하였다. 농협의 계통조직은 마을단위 이동 조합- 시군조합- 중앙회 3단계 구조로 출발했다. 하지만 이동조합이 너무 영세 하여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1972년까지 이들의 합병을 통해 읍면당 1개의 단위조합 체제를 다시 구축했다. 이때부터 단위조합은 직원과 사무실을 갖추고 본격적인 사업추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단위조합이 성장하면서 시군조합과 기능 중복이 문제가 되자 1980년에는 시군조합을 폐지하고, 축협을 농협에서 분리하였다..

(6) iv 한국정부는 농민의 자조·자립·자율조직으로서의 협동조합의 발전을 기다리 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인 농민의 보호라는 관점에서 농촌개발을 촉진하기 위 한 정책의 파트너로서 농협을 중요시하고 이를 활용하였다. 정부는 농협에게 직접적인 재정보조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사업과 세제의 지원을 통해 농협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보호하였다. 농협에게 농업용 투입재와 자금공급의 채널로서 독점권을 부여함으로써 농협이 농촌에서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세제면에서도 농협에 대한 지원은 컸다. 초창기에는 일체의 과 세를 면제해주었고, 농협이 성장함에 따라 법인세를 부과하는 등 혜택을 줄여 가고 있지만 법인세율 차등적용 등으로 여전히 혜택을 주고 있다. 그 대신에 정부는 농협을 통제하고 간섭하는 여러 기제를 만들어놓고, 정책에 협조하도록 하였다. 농협의 지도사업체계는 국민경제의 도약과 성장기 동안 탁월한 효과를 발휘 하였다. 정부의 강력한 경제성장 추진의지에 부응하여 농촌의 인적자원, 부존 자원, 조직자원을 협동조합 사업으로 결합시켜 내었다. 특히, 경영체계는 자금, 예산, 기금을 통해 재원을 입체적으로 조달, 운용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는 점 에서 개도국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농협은 경제사업을 통해서 농업·농촌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비료·농약·농 기계 등의 농용자재 공급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하여 식량자급 달성 및 지속적 인 농업성장에 기여했다. 조합원의 농산물 판매와 농산물 유통의 혁신을 위해 생산자를 조직하고, 공판장과 소비지 슈퍼마켓 등 유통시설을 확충하였으며, 포장재 개발과 보급, 농산물 유통정보의 수집과 분산, 농산물의 가공 등에 투자 하고 사업을 운영해왔다. 조합원과 관내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농협 연쇄점 사 업을 통한 생활물자의 공급으로 산간벽지의 농촌까지도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농협은 가격 정책에 있어서도 전국 단일가격 공급체제를 운영 함으로써 조건이 불리한 오지의 농어촌도 도시와 같은 가격으로 자재와 생활 물자를 구입할 수 있었다. 협동조합적 경영이념이 없었더라면 실행하기 힘들었 을 것이다. 신용사업은 농협의 사업 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나타냈다. 농촌은 물론 도시.

(7) v 에서 조성한 자금을 농업과 농촌부문에 공급하여, 신용제한을 완화하고 활발한 투자를 가능케 하였다. 정부의 정책자금을 지원대상에게 전달하고 적절한 관리 를 통해 정상적으로 회수함으로써 제도의 지속적인 작동을 가능케 하였다. 상 호금융의 성공은 특히 뛰어난 바 있다. 대부분이 반자급적 생계농이어서 저축 여력이 없다고 믿어졌던 1970년대에 이들로부터 저축자원을 동원해서 필요한 농민에게 공급함으로써 고질적인 농촌사채를 흡수할 수 있었다. 상호금융의 예 수금은 1974~80년에 14.2배나 증가하였다. 한국형 농협모델은 사업의 효율화에 장점을 발휘하였다. 신용·경제사업을 겸영하는 종합농협으로서, 전문화의 장점보다 약한 부문을 서로 보완함으로써 같이 발전해가는 범위의 경제의 장점을 살렸다. 수익성이 좋은 신용사업의 수 익으로 자체적으로는 적자인 경제사업을 살려갈 수 있었다. 또한 단위조합-시 군조합-중앙회의 3단계 조직체계에서 단위조합과 시군조합의 업무중복 가능성 이 커지자 시군조합을 단위조합에 이관시킴으로서 단위조합-중앙회의 2단계 구조로 바꿔 조직의 능률화를 도모하였다. 한국형 농협 모형은 한국의 과거 상황과 유사한 개도국에 적용가능성이 높 다하겠다. 유럽이나 북미의 선진국 농협처럼 조합원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발전하는 농협의 모형을 따르기에는 시간이 없고 경제사회적 기반이 워낙 취 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부의 리더십과 지원이 강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농협이 갖고 있는 약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를 해야 한다. 한국농협은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많이 받아 정체성이 약하다는 비판을 받아왔으며, 조합원들도 자기들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약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 하기 보다는 조합의 서비스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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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vii ABSTRACT. Operetion of Agricultural Cooperatives for Rural Development. The purpose of this book is to describe experience of agricultural cooperatives of Korea (ACK) for 1945∼1990, when was similar to the current situation of developing countries, and to suggest implications for developing countries. The ACK as policy assistant institutions have significantly contributed to agriculture and rural development since they were established. The Cooperatives implemented smooth money supply to the agricultural sector by successfully mobilizing savings in rural and urban areas and absorbed chronic usurious loans in rural financial markets. They supplied farm inputs and living goods, where markets were not fully developed, and thus elevated agricultural productivity and convenience of living. The Cooperatives led development of agricultural marketing by selling of members' agricultural products, expanding distribution facilities and providing information on them. There had been many trials, errors and complications over a long period of time to reach the current state of the Agricultural Cooperatives of Korea. The Cooperatives went through a time of no hope due to poverty, debts, the tragic Korean War, no competent leaders, political selfishness and conflicts. It took 10 years from the start of discussing to the establishment of agricultural cooperatives, and did another 14 years from the birth to completing their organizational and managerial bases. Korean government established separately the Agricultural Cooperative and the Agricultural Bank in 1958, which were specialized to economic businesses and banking business respectively. The two institutions were merged into a multipurpose agricultural cooperative in 1961, because of system inefficiency caused by conflicts between them.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was three tier system, village Ri-dong cooperatives (village level), Shi-Gun cooperatives (county level), and National Agricultural Cooperative Federation (NACF). The Ri-Dong cooperatives were too small to be sustainable, thus were consolidated to a township (Ub or Myoun) level cooperative as a primary agricultural cooperative until 1972. This made the primary cooperatives start actively their own businesses with their offices and full time personnel. As the primary cooperatives grew, the functional.

(10) viii duplication of primary cooperatives and Shi-Gun cooperatives became an issue. In 1980, the Shi-Gun cooperatives were abolished and the Livestock Cooperatives were separated from the ACK. Korea did not wait to see the development and results of a few Cooperatives as farmers’ self-help, independent and self-regulating organization. Instead Korea courageously utilized Agricultural Cooperatives as important policy partners to develop agriculture and rural society, from the socio-legal viewpoint for protecting farmers who were socially weak. The government allowed the ACK to handle exclusively the fertilizer, chemicals, farm machineries, and operation of government grains so that the ACK could take smoothly roots in the ground in rural markets. The government supported the ACK with business protection and tax exemption rather than direct subsides. The extension service promotion system of ACK as a strategic instrument for rural development demonstrated great effects during the period of take-off and growth of the national economy. The objective system, the organization system, the business system and the management system of the extension service of ACK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combining human resources, endowed resources and organization resources in rural areas into the cooperative business to comply with government’s strong will of promoting economic growth. The ACK successfully carried out agricultural supply business including fertilizers, agricultural chemicals and agricultural machinery to achieve self-sufficiency of food and to contribute to the continuous growth of agriculture. The ACK organized producers for members’ innovated agricultural product sale and agricultural products and expanded distribution facilities including joint marketing centers and supermarkets in urban areas. The ACK invested in developing and disseminating packing materials, collecting and spreading agricultural product distribution information, processing agricultural products and operating the business. The ACK supplied vital commodities to remote rural areas for members and residents through the Chain Store business of ACK. The ACK employed the single supply price system across the country so that farmers and fishermen in unfavorable remote areas could buy materials and vital commodities at the same price as in urban areas. It would be hard to enforce this system without the cooperative management idea. The credit business achieved the most outstanding outcome among the.

(11) ix businesses of the Agricultural Cooperatives. The funds mobilized in urban areas were supplied to agriculture and rural areas to alleviate the limited credits and to enable positive investment. The system continued to normally operate by transferring the policy funds of the government to people to be supported and to normally recover them through appropriate management. The success of mutual credits is especially outstanding. Most people thought there was no room for saving because they were semi- self-supporting farmers in the 1970s. However, savings were mobilized from farmers to supply the money to farmers who needed it. The deposits of mutual credits had increased by 14.2 times during the period from 1974 to 1980. Korea’s model of agricultural cooperatives focused on organizational efficiency. The ACK got advantages of scope economies from operating multipurpose cooperatives rather than efficiency from specialization in economic and banking businesses. Although economic businesses such as buying farm inputs and selling farm products have shown minus income, they could have been maintained due to the income of banking business. The model of Korea-type multipurpose Agricultural Cooperatives can be a model appropriate for developing countries in which most of the farmers are small-scale farmers. Most developing countries do not have time to wait smooth evolution of agricultural cooperatives like advanced western countries such as Europe or North America. Therefore, they may need strong leadership of government and collaboration of the government and agricultural cooperatives. However, it is also important to care about the weak point of Korea’s model that strong government intervention deteriorated cooperative identity and voluntary development.. Researchers: Seong-Jae Park, Joon-Kee Park, Kie-Yup Shin Research period: 2011.4 - 12. E-mail address: seongjae@kre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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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xi. 차. 례. 제1장 서 론: 한국농협과 한국의 이해 1. 2. 3. 4.. 한국 농협의 경험과 의의 ············································································ 1 한국 농협의 체제 ························································································· 6 한국 역사와 문화 ························································································· 9 경제와 농업 ································································································· 11. 제2장 한국 농업협동조합의 성장사 1. 농업협동조합 탄생의 배경(1945~1957) ··················································· 15 2. 농협의 탄생과 기반구축(1958~1972) ······················································· 28 3. 농협의 성장과 구조조정(1973~1990) ······················································· 37 제3장 정부의 지원 1. 법률과 제도의 지원 ··················································································· 51 2. 사업의 지원 ································································································· 54 제4장 농협의 사업추진과 성과 1. 지도사업 ······································································································ 59 2. 경제사업 ······································································································ 73 3. 신용사업 ······································································································ 88 제5장 개발도상국에의 시사점 1. 제도 운영 ·································································································· 107 2. 사업의 운영 ······························································································· 114 3. 한국형 농협모델과 개발도상국 적용 가능성 ········································ 123 참고문헌 ············································································································ 128.

(14) xii. 표 차 례. 제1장 표 1-1. 한국의 거시경제 지표와 농업의 비중 ·········································· 12 제2장 표 표 표 표. 2-1. 2-2. 2-3. 2-4.. 일제 강점기 농업협동조합 관련조직의 설립 목적과 사업내용 ····· 22 단위조합의 설립 및 합병 추이 ······················································ 36 1970년대 경제상황과 농협사업 성장 추이 ·································· 39 단위조합의 경영기반 조성 및 경영성과(조합당) ························· 41. 제4장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표. 4-1. 4-2. 4-3. 4-4. 4-5. 4-6. 4-7. 4-8. 4-9. 4-10. 4-11. 4-12. 4-13. 4-14. 4-15. 4-16. 4-17.. 한국농협의 읍·면단위 새마을종합개발사업 추진성과 ················ 62 1973∼1977년 한국농협의 기초경영자립조합 육성계획 추진성과 ···· 63 1977∼1980년 한국농협의 단위조합 자기자본 확대 추이 ········· 64 1961∼1980년 한국농협의 임직원 교육 지도사업 추진성과 ······ 66 1961∼1980년 한국농협의 임직원 정규교육 지도사업 추진성과 ···· 67 1961∼1980년 한국농협의 농민조합원 교육 추진성과 ··············· 68 1990년 말 기준 한국농협의 협동조직 육성 추진성과 ················ 70 한국농협의 시대별 지도사업 성과 개요 ······································· 72 공동판매사업 실적 추이 ································································· 74 농업생산자재 공급 추이 ································································· 79 주요농기계 공급 추이 ····································································· 83 농협연쇄점 개설상황 ······································································· 84 상호금융과 예금은행의 예수금 성장 비교 ································· 103 농업부문 대출금 중 상호금융의 비중 ········································ 103 농가의 사채의존도 및 사채이자율 추이 ····································· 104 단위조합 경영 중 상호금융 기여도 ············································ 104 농협중앙회 총대출과 대출종류별 비중의 변화 ························· 106.

(15) xiii. 그림차례. 제1장 그림 1-1. 행정구역단위와 농협의 조직단계 ·················································· 8 그림 1-2. 농협의 계통조직 구조와 조합의 종류 ··········································· 9 제2장 그림 2-1. 농협의 역사 ···················································································· 49 제4장 그림 4-1. 한국의 농업금융 시스템 ······························································· 89 그림 4-2. 농협채널을 통한 농업자금의 공급 ·············································· 90 그림 4-3. 농협중앙회의 예수금 시장 점유율 추이 ··································· 106 제5장 그림 5-1. 국민경제 영역의 구분과 한국농협 지도사업의 특성 ·············· 116 그림 5-2. 한국형 농협모형 ··········································································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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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 제. 서. 1. 장. 론: 한국농협과 한국의 이해. 1. 한국 농협의 경험과 의의. 한국 농협은 창립 이래 농업·농촌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정부의 정책 파트너로서 정부에 협력하고, 정책대행기관으로서 정책을 수행하며, 자조적인 협동조합으로서 농업과 농촌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농촌과 도시에서 성공적인 저축동원을 통해 농업부문에 대한 자금공급을 원활히 하고, 고질적인 농촌의 고리사채를 시장에서 구축하였다. 정책대행사업으로 비료·농약 등 농 자재 공급업무를 원활히 수행하여 농업생산력 증대와 주곡인 쌀의 자급달성에 기여하였으며, 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농촌지역에 생활물자를 공급하여 생활의 불편을 덜어주었다. 조합원의 농산물 판매로 조합원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유 통시설의 확충과 정보제공 등으로 농산물유통을 발전시켰으며, 정부 양곡의 수 매와 관리를 담당하여 국가의 식량수급관리에 기여했다. 정부의 정책 홍보와 지도, 교육을 통해 정책효과를 높이는데도 앞장 서 왔다. 아직 농협은 조합원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농민에겐 농협이 없는 생활과 영농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농협과 농민 조합원은 밀접하게 묶여 있다..

(18) 2 한국의 농협이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오랜 시행착오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 다. 일반적으로 개발도상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과 부채, 참혹한 내전,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 결핍과 지도자 부족, 빈곤한 정부와 정책 실패, 정치적 이기심과 갈등 등으로 희망이 안보이던 시대를 겪었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 장에 따른 협동조합의 단계적 성장과 구조전환 과정도 겪었다.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남북으로 진주해온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2년 뒤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3년 동안의 한국전쟁은 전 국토와 경제사회를 폐허화시켰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 후유증은 오래갔고, 1960년대 초까지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빈곤과 저개발의 탈출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필요로 했다. 농업협 동조합은 그 대안 중 하나였다. 해방당시부터 농업과 농촌개발을 위해 농업협동조합이 필요하다는데 모두 공감했으나 그 방향과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곧 바로 농업협동조합 설립 논의를 시작했으나,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의견 대립, 리더십 부족, 전쟁 등의 원인으로 10년 후인 1958년에야 경제사업 을 전담하는 농업협동조합과 농업금융을 전담하는 농업은행을 설립하였다. 그 러나 두기관간의 갈등으로 3년 뒤인 1961년에 두 기관을 통합하여 종합농협으 로 재탄생시켰다. 그러나 농협의 토대인 이동조합은 직원도 사무실도 없는 이름만의 조합이었 고, 사업은 단위조합의 지역연합체인 시군조합이 수행했다. 농협 시스템의 하 부구조를 강화를 위해 조합의 설립과 조합원 가입, 그리고 이동조합의 규모화 추진되었다. 이동조합의 합병운동을 2차에 걸쳐 전개하여 읍면단위의 단위조 합으로 통합하는데 또 11년이 걸려 1972년에는 거의 전국의 단위조합은 읍면 단위로 통합되었다. 조직의 토대를 확고히 한 한국농협은 계통조합간 업무의 조정과 신규사업의 개발 등을 통해 사업을 성장궤도로 진입시키고 경영을 안정화시켜 나갔다. 1970년대는 농협의 도약과 성장의 시기였다. 단위농협은 비료·농약·농사자금·.

(19) 3 공제 등 4대사업을 시군조합으로부터 이관받고, 자체사업으로 상호금융과 생 활물자사업을 시작하였다. 농민조합원과의 사업을 통한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농협의 중심은 차츰 단위조합으로 이동해갔다. 사업은 급성장을 했으며 농협의 역량도 크게 높아졌다. 한국경제의 지속적인 성장, 새마을운동, 녹색혁명과 같은 1970년대의 경제 사회 환경 변화는 농협의 활동을 더욱 촉진시켰다. 농촌의 잘살기운동인 새마 을운동의 교육과 지도자 양성, 식량자급을 위한 국가정책의 홍보와 지도, 그리 고 농업투입재의 원활한 공급으로 녹색혁명에의 기여 등 농협은 자신의 성장 과 함께 지역사회와 국가로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농협은 상호금융이 급성장 하면서 농촌금융시장에서 사금융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농협이 독점 공급했던 비료와 농약, 농기계 등 구매사업의 사업규모도 급격히 증가했으며, 정부양곡 수매는 가장 큰 경제사업이 되었다. 단위조합의 급성장은 10년이 되지 않아서 시군조합과의 업무중복 논쟁을 일 으켰다. 1980년 들어선 새정부는 농협의 계통조직의 축소와 축협의 분리를 주 내용으로 하는 농협개혁을 시행했다. 1980년대 초 정부의 정책 전환에 따라 농 협중앙회가 한 때 경영위기를 맞았으나 정부의 지원과 자체 경영혁신으로 위 기를 넘긴 후 고속 성장을 지속했다. 그리고 협동조합으로서 오랜 숙원이었던 농협민주화를 이루어내었다. 농협은 1962년 임시조치법에 의해 잃어버렸던 자 신의 대표 선정권을 회복함으로써 자율조직으로서의 위신을 되찾았다. 1988년 중앙회장의 대통령 임명제와 단위조합 조합장의 중앙회장 임명제를 철폐하고 정부의 예산통제 등을 벗겨낸 농협민주화를 이루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농업은 WTO체제로의 전환에 따른 농산물시장 개방의 격랑에 휘말리고, 농협도 역할 변화와 강화 논쟁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의 한국농정의 전략은 대외적 보호의 틀 안에서의 성장전략이었 으나, 1990년대부터는 세계시장에서의 무한경쟁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가 핵심과제가 된 것이다. 농협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금의 원활한 공급 이상의 역할, 즉 농민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을 제때에 제가격을 받고 팔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개방된 경제에서는 생산보다는 공급과잉이 문제.

(20) 4 였고, 국내시장으로 유입되는 해외의 농산물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개방경제에 대응하기 위한 농협의 역할에 대한 요구는 종합농협에서 전문농 협으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논쟁을 불러왔다. 농협의 사업부문 중 유독 조 합원이 원하는 판매사업이 취약한 것은 신용사업 수익에 안주하여 경제사업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비판자들은 농협중앙회의 경제사업과 신용사업을 분리하여 전문화시키는 것이 경제사업의 효율화뿐만 아니라 갈수록 격화되는 금융시장에서 농협의 신용사업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길이라 주장하였다. 새정부의 농정개혁으로 시작된 농협의 신용· 경제사업분리는 논의는 18년이 지난 2011년 3월 이 안을 수용한 개정농협법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국의 발전수준과 농업구조의 특성을 고려할 때 구매·판매·이용·가공·신용 사업을 겸영하는 종합농협의 선택은 옳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개별 사업부문별 또는 기능별 협동조합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경제사회적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사업별 전문화보다는 한 기관으로 모든 사업을 집중시킴으로써 최소규모 의 사업을 달성할 수 있고, 사업부문간 범위의 경제를 키워 성장을 할 수 있었 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 농협은 농업정책의 협조기관이자 집행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았 다. 정부는 농업부문에 대한 자금지원과 투입물의 지원, 정부양곡의 관리 등 주 요 정책사업을 모두 농협에 전담시킴으로써, 농촌 경제의 중심기관으로 만들었 었고 농협은 이 힘을 바탕으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정부는 농협의 지 배구조에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간섭하고 통제했다. 이점 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협동조합의 발전과 국민경제에의 기여에 도움이 되었는가의 여부에 논쟁의 소지를 남겼다. 비판론은 늦더라도 협동조합이 스스 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줄였더라면 보다 강건한 발전의 토 대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농협설립을 주도했던 측에 서는 농협설립 당시의 한국사회의 상황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협동조합의 발 전을 가꾸어낼 수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어느 쪽이든 논란의 가능성은 있지만 오늘의 한국농협이 있기까지에는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이 크게 기여한 것만은.

(21) 5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농협이 걸어왔던 길은 많은 개도국에게 벤치마킹 의 대상으로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책임의 자유인이라는 시민정신 이 확립되어 있었던 사회에서, 규모화된 전문 농업으로 분화가 이뤄진 바탕위 에 발전해온 서구의 협동조합보다는 여러 간난이 겹쳤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 을 헤쳐나온 한국 농협의 경험이 더 유용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 이다. 이 책은 많은 개발도상국들의 발전단계와 역사적 상황에서 유사점을 갖고 있는 한국이 농업·농촌의 발전을 위해서 농협을 어떻게 운영해 왔는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구체적인 국토와 자연조건, 민족과 문화적 성격, 역사적 차 이 등에도 불구하고 발전의 단계와 역사적 경험 등에서는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는 한국의 농협 운영 경험은 개발도상국들의 정책방향 선택과 그 수단을 개 발하는데 있어 유용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1945년부터 1990년까지의 한국 농협의 성장사와 운영경험을 정리하 였다. 1980년대까지 한국은 농정방향과 원칙을 농업보호에 두었고, 농협도 그 에 따라 운영되었다. 하지만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 협상이 진행되면서 개방적 인 농정과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가진 중대농 이상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구 조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1990년대 이후는 1980년대까지의 경제환경 조건과 는 전혀 다른 대외개방으로의 구조전환을 위한 것들로서, 우선 농업과 농업협 동조합을 보호 육성해야 할 개발도상국들의 입장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 보고서에서는 1990년대 이후를 제외하였다. 책의 구성은 서론을 포함 전체 5장으로 구성하였다. 서론에서는 책의 저술 목적 및 한국과 한국농협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으로 구성하였다. 한국의 농협 체계와 구조에 대한 설명과 국토, 자연, 역사와 경제 및 농업 현황에 대한 간단 한 설명을 담았다. 제2장에서는 1980년대까지 한국 농협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발전단계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화를 했는지와 그 운영 내용을 중점적으로 설명하였다. 제3장은 정책수단으로서 농협을 운영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은 어 떤 것들이 있었으며 그 특징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였다. 제4장은 농협이 추 진한 사업들을 지도, 경제, 신용의 3대사업을 중심으로 발전단계에 따른 변천.

(22) 6 과정과 성과를 다루었다. 제5장은 종합적인 측면에서 한국 농협의 경험을 평가 하고, 개도국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인지를 정리하였다.. 2. 한국 농협의 체제. 한국에는 2010년말 기준으로 1,181개의 각종 농업협동조합이 있고 이들 조 합을 회원으로 하는 농협중앙회가 있다. 농협의 농민 조합원은 총 210만명이 다. 조합의 종류로는 지역농협, 지역축협, 과수·원예농협, 축종별축협, 인삼협 등 5개 종류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구매, 판매, 이용, 신용, 공제 등을 겸영하는 종합농협이다. 1988년까지는 지역조합(지역농협과 지역축협)을 제외한 특수농 협(과수·원예, 인삼, 축종별 조합)은 신용사업을 허용하지 않은 전문농협이었으 나 1989년 이들 조합에도 신용사업을 허용함으로써 사실상 종합농협이 되었 다. 농협중앙회는 회원조합의 사업연합회의 기능과 전체 농협을 대표하는 최고 기구(apex organization)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농협은 계통조직은 행정구역의 위계에 따라 설립되어 있다<그림 1-1>. 행정 구역의 위계는 시·도, 시·군, 읍·면, 이·동 단위로 구분된다. 행정구역 위계의 맨 아래에 위치한 이·동은 마을단위이며, 읍·면은 여러 마을을 포함하는 최말단 행정구역으로 행정기관이 배치되어 있다. 1개 읍·면에는 평균 25개 정도의 마 을이 있다. 시·군은 기초자치단체로서 농촌지역의 행정단위인 군에는 평균 10 여개의 읍·면이 분포하고 있고, 시는 군과 상응하는 중소도시이다. 시·도는 광 역자치단체인데, 전국에 8개 도가 있고 1개의 특별시와 6개의 광역시가 있다. 농협의 계통조직은 전국 단계에 농협중앙회가 있고, 중앙회는 시·도에 중앙 회의 각 지역본부를, 시·군에는 시·군지부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읍·면에는 회원 조합이 조직되어 있는데, 경종농가를 조합원으로 하는 지역농협은 읍·면 단위 에 조직되어 있고, 축종에 관계 없이 축산을 하는 농가이면 조합원이 되는 지 역축산농협은 시·군 단위로 조직되어 있다. 과수·채소·화훼 등의 품목농협과.

(23) 7 인삼농협, 소·돼지·닭 등 축종별 축산농협은 업무구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 다. 회원조합의 대부분은 지역농협으로 2010년말 기준으로 전체 회원조합의 83.0%인 971개였다. 그 다음으로 지역축산농협이 118개, 과수·원예농협이 46 개, 축종별 농협 24개, 인삼농협 12개였다. 한국의 농협은 1958년 농업협동조합과 농업은행의 두 기관으로 출발했으나, 1961년 통합되었다. 현재의 농협은 1961년 종합농협의 설립일을 기념일로 하 고 있다. 설립 당시에는 마을단위의 이동조합-시군조합-중앙회의 3단계 계통조 직으로 구성되었으나, 1970년대 초 이동조합을 읍·면단위의 단위조합으로 통 합하였고, 1980년에는 시군조합을 폐지하고 단위조합-중앙회의 2단계 조직체 계로 전환하였다. 농협의 사업은 농업과 관련된 사업은 대부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는데, 크게 경제사업, 신용사업, 지도사업으로 분류하는데, 수익사업만을 말할 때는 경제 사업과 신용사업으로 구분한다. 경제사업에는 판매, 구매, 이용, 가공사업 등이 있다. 판매사업은 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해주는 것을 말하며, 구매사 업에는 농용자재의 구매와 생활필수품 등 소비재 구매를 포함한다. 이용사업은 농기계이용사업, 창고 등의 시설물 이용 등을 말하고, 가공사업에는 농산물의 가공 또는 농업용 자재나 포장재 등의 가공 등이 포함된다. 신용사업은 중앙회의 은행, 회원조합의 상호금융, 정부의 정책금융, 농협공 제 등을 포함한다. 농협중앙회는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하는 은행을 운영하고 있 으며, 회원조합은 조합원간의 금융거래를 원칙으로 하는 조합금융인 상호금융 을 운영한다. 하나의 농협시스템 내에서 은행금융과 조합금융을 결합한 형태는 한국 농협시스템의 독특한 특징이다. 공제사업은 중앙회는 공제사업 본부이고 회원조합은 그 대리점 역할을 한다. 중앙회의 은행은 전국에 약 1,000개의 지 점망을 갖고 있는데, 주로 도시에 점포가 분포되어 있고, 농촌지역에는 군단위 에 지부를 두고 있다. 상호금융은 조합의 관내에 수개의 지점을 두고 있고, 관 할구역 이외의 지역에는 지점을 둘 수 없다. 모든 회원조합의 금융점포를 합하 면 2010년말 기준으로 4400여개가 되어, 중앙회 점포와 합할 경우 농협의 금융 점포 총수는 5,400개를 넘는 한국 최대의 금융그룹이 된다..

(24) 8 농협중앙회는 교육기관으로 농협대학과 교육연수원을 갖고 있으며, 자회사 로 농산물유통회사, 화학비료회사, 농산물무역회사, 신문사 등을 갖고 있다. 농 산물유통회사는 주요 도시의 도매시장에 공판장과 소매와 물류센터 기능을 겸 한 종합물류센터가 있다. 교육시설은 중앙과 지방에 7개의 연수원에서 농협 임 직원과 조합원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림 1-1. 행정구역단위와 농협의 조직단계.

(25) 9 그림 1-2. 농협의 계통조직 구조와 조합의 종류. 3. 한국 역사와 문화. 한국은 극동아시아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를 국토로 하여 서쪽으로는 중국, 동북쪽으로는 러시아, 바다를 격해 동쪽으로는 일본과 이웃하고 있다. 한반도 전체의 국토면적은 220천㎢이지만 남북이 분단되어 남한만의 면적은 10만㎢ (1,000만 3천ha)이다. 남한의 국토 중에 산지는 63.7%이고, 농경지는 17.1% (171만 5천ha)에 불과하다. 기후는 온대 몬순기후로서 4계절이 분명하여 여름은 덮고 비가 많이 오며 겨 울은 춥고 눈이 온다. 서울의 연평균 기온은 12.2℃이고 8월은 평균 25.4℃, 1 월 평균은 -2.5℃이다. 여름은 고온다습하여 벼농사에 적합하여 전통적으로 쌀 농업에 의지하여 왔다..

(26) 10 한국은 국가기원을 B.C. 2333년 고조선의 건국에 두고 있는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로서 한반도와 만주지역 일대를 영토로 활동해 왔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약 70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조선(2333~108 B.C.)을 이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57 B.C.~ A.D. 676), 통일신라(676~935), 발해(698~926), 고려(918~1392), 조선(1392~ 1910)의 7개 왕조가 부침하면서 영토는 한반도로 좁혀졌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 해 조선이 병탄되어 1945년 독립될 때까지 일제의 식민지배를 경험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독립이 되었으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이유로 남북으로 각각 진주해 온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었다. 민족세력에 의한 남북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미국·소련 주둔군의 영향과 사상적 분열이 남북의 고착화를 불 러와, 1948년 유엔의 승인 하에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남한의 정부 수립 2년 후 1950년 6월 25일 북 한군의 남침에 의해 발발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3년 여에 걸쳐서 300만이 넘는 인명피해를 내고 산업시설과 국토를 폐 허화시켰다. 한국전쟁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 외에 남북의 분단을 더욱 고 착화시켰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1960년 독재에 항거한 학생혁명으로 물러났 고,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은 정국의 혼란을 잡지 못하여 1961년 박정희 소장 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까지 이후 18년 동안 재임하면 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으로 한국경제를 성장시켜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그룹에서 벗어나 중진국 대열에 합류시켰다. 한국은 1987년 오랜 독재정 로부터 민주화를 쟁취했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이제는 세계 7위권의 무역 대국이 되었다. 한국인은 단일 언어를 쓰는 단일민족으로서 오래 전에 중앙아시아로부터 한 반도로 이주한 몽골계의 민족이다. 남한의 인구는 2010년 4,858만 명이었고 북 한인구는 2,405만 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되 면서 남한의 경우 결혼, 취업 등의 이유로 많은 외국인이 한국에 거주하면서.

(27) 11 다문화국가로 변해가는 추세이다. 한국은 한글이라는 한국 독자의 알파벳을 가지고 있다. 한글은 24개의 자모 로 구성된 표음문자로서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쉽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 는 우수한 문자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샤머니즘은 시베리아 일대의 종족 공통의 무속신앙으로 내려왔으며, 불교는 4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유교는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져 한국인의 윤리 도덕의 준거로 인식되어 왔다. 천주교는 18세기 중 후반에, 기독교는 19세기에 들어왔으며 현대에 들어서 기독교인이 가장 빠르 게 늘어나고 있다.. 4. 경제와 농업. 남한의 인구는 2010년 현재 4,858만 명이며 이 중에 82%가 도시에 살고 농 촌인구는 18%에 불과하다. 농가인구는 전체 인구의 6.4%인 3,063천 명으로 농 촌지역에서 농가인구는 약 1/3에 지나지 않는다. 수도는 서울이며 2010년의 서 울 인구는 1,031만 명이었다. 한국의 국민총소득(GNI)는 2010년 1,015억 달러로 1인당 GNI는 20,759달러 였다. 한국은 공업이 발달하여 외국에 수출하는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2010년 수출은 4,663억 달러, 수입은 4,252억 달러였다. 국내총생산 규모로는 세계 13 위, 무역총액은 세계 7위권이다. 한국의 주산업은 자동차, 조선, 반도체, 철강, 전자, 통신기계, 화학, 섬유 등 이다. 1차 산업인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6%이고 광공업 등 2차 산업이 39.3%,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은 58.2%를 차지한다. 한국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 하는 비중은 2010년에 총생산액 대비 2.3%, 인구는 6.8%, 국가예산에서 차지 하는 농림예산 비중은 5.7%였다..

(28) 12 표 1-1. 한국의 거시경제 지표와 농업의 비중 구 분. 1970. 1990. 2000. 2010. GDP(10억 미 달러). 8. 270. 534. 1,014.      농업비중 (%). 27.4. 7.8. 4.2. 2.3. 32,241. 42,869. 47,008. 48,580.     농가인구 비율(%). 44.7. 15.5. 8.6. 6.4.     농업취업자비율(%). 50.4. 17.1. 10.2. 6.3. 국가예산(10억 미달러). -. 3.9. 7.4. 253.3.     농림예산비중(%). -. 9.6. 7.0. 5.7. 인구(천명). 자료: 농림수산식품부, 「농림수산식품 주요통계」, 2011. 현재의 한국경제는 규모면에서 세계 상위권에 속하지만 50년 전만 해도 한 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다. 1965년의 국민총생산(GNP)은 30억 달러였고, 1인당 GNP는 105달러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이 국민경제 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총 인구의 55.1%가 농가인구였고, 총취업자 중에서 농림업 취업자는 56.1%였다.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9.1%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립한 한국은 미국·소련에 의해 남북한으 로 분단되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였으나, 2년 만에 북한의 남침으로 3년간의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밀렸다. 그래서 1960 년대 초까지도 많은 실업과 높은 인플레, 저소득으로 국민은 궁핍한 생활을 해 야 했다. 특히 농촌의 실상은 더 어려웠다. 정부는 1962년부터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지향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하였다. 국내에 형성된 자본이 없으니 외국의 자본을 빌려다 공 장을 일으키고 수출을 독려했다. 이후 연평균 8%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 서 1990년대 초까지 30여 년 동안 고속 성장했다. 한국경제는 경공업에서 중화 학공업으로 성장전략을 전환한 1970년대 말에 제2차 오일쇼크로 한동안 어려 움을 겪기도 했지만 1980년대 중반 세계적인 호황과 함께 처음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며 급속한 성장을 지속했다. 한국은 국토가 좁고 자본도 없는 가난한 나라였지만 인적자원을 활용하여.

(29) 13 이제는 선진국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2010년에는 OECD의 DAC(개발원조위원회)의 회원국이 됨으로써 선진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한국의 총 경지면적은 1,517천ha이고 농가수는 117만 7천호여서 호당 경지면 적은 1.46ha에 불과하다. 경지 중 논이 57.4%이며 쌀이 가장 중요한 작목이다. 농업생산은 재배업이 58.1%, 축산업이 41.9%를 차지하지만 부가가치 기준으로 보면 재배업이 64.5%이고 축산업은 18.7%이다. 축산업의 중간재인 사료를 대부 분 외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생산액 비중보다는 부가가치 비중이 낮다. 1950년대에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식량부족으로 고생했던 한국은 농업의 부 흥이 가장 절실한 국정과제였다.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비료 의 공급과 수리시설 등 기반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외국의 차관을 빌려 맨 먼 저 추진한 것이 비료공장의 건설이었다. 이 공장이 완성되어 비료공급이 늘어 나기 시작한 1960년대 초부터 농업생산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시인구의 팽창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농촌침투 등의 영향으로 농업의 상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기 시작하여, 채소, 과일, 축산 등 환금성 작목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1970년대 한국의 농업과 농촌은 도시화·산업화, 녹색혁명, 새마을운동의 영 향을 받아 크게 변화하였다. 주요 도시 중심으로 진행된 공업화로 향도이촌의 이농이 급속히 진행되었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농촌지역에도 빠르게 확산 되었다. 또한 비료·농약 등 생화학 기술에 바탕을 둔 녹색혁명으로 식량자급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농촌지역개발운동으로 추진된 새마을운동은 정신운동 에서 출발, 지역 및 소득개발운동으로 확산되어 농촌을 변화시키고 농민의 자 긍심을 높였다. 이 시기에 1958년에 설립된 농업협동조합도 설립된 지 10여년 만에 확립된 사업기반을 바탕으로 경영기반 구축 및 도약단계로 전환했다. 한국의 공업화는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농촌의 노동력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경제성장의 빠른 속도만큼 이농속도도 높아져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농촌에서도 노동력 부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농업기계 화가 진전되었는데, 지금은 벼농사의 경우 거의 100%에 가까울 정도로 기계화.

(30) 14 가 되었다. 하지만 밭작물의 기계화는 아직 낮은 수준에 있다. 소규모 농지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고, 농가당 경영면적도 작아서 기계화의 효과가 잘 나타 나지 않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는 농업기계화, 시설농업에 대한 투자, 가축 구입 및 축산시설 에 대한 투자 등을 위해 차입한 부채가 누적되었지만 소득증가가 뒤따르지 못 해 부채를 상환할 수 없는 농가가 많이 나타났다. 또한 애써 생산한 농산물도 주기적인 풍흉에 따라 가격의 등락이 매우 심해졌다. 이와 같은 부채문제와 농 산물 판매의 애로사항은 농협에 대한 조합원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즉, 농협이 농산물 판매와 농가 소득 증대에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1987년에 농가 부채의 상환연기, 이자율 인하 등의 부담경감조치를 취했으나, 농민은 미흡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1990년까지 거의 매년 추가적인 부채대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대 이후는 우루과이라 운드 농산물 협상이 타결되어 농산물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됨에 따라 농업부문에 대한 대규모 투융자사업이 추진되었다. 새로운 기술 도입과 구조조 정 촉진으로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시장개방에 대응한 경쟁력을 높여가고자 했 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20년여 동안 투자를 해오고 있지만 농업인구의 노령화, 수입농산 물 유입에 따른 가격조건의 악화 등의 요인 때문에 한국의 농업부문은 어려움 을 겪고 있다. 농업협동조합은 어려움에 처한 1950년대의 농업·농촌의 활로를 여는 정책수단으로서 역할을 요구받았듯이 현재도 개방의 충격과 구조전환의 어려움을 타개할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받고 있다. 한국은 미국, EU, 인도, ASEAN, 칠레 등 세계 주요국들과 FTA를 체결하여 완전 개방단계로 전 환하고 있다. 한국의 산업 중 가장 취약 산업인 농업이 이러한 개방환경에서 어떻게 적응해갈 수 있을 것인지가 당면의 과제가 되고 있다. 한국 농협은 이 러한 국가적 Agenda를 풀어갈 중심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농협 은 조합원이 보다 높은 기술력과 경영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유도하고, 지원하 면서, 조합과 조합원이 함께 하는 협동조직의 능력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한국농 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31) 15. 제. 2. 장. 한국 농업협동조합의 성장사. 1. 농업협동조합 탄생의 배경(1945~1957). 1.1. 불안정한 정치·경제사회 1.1.1. 정치적 상황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독립과 동시에 남과 북이 갈 리게 되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이유로 진주해 온 북쪽의 소련군과 남쪽의 미군이 분단을 그대로 고착시켰기 때문이다. 남북의 분단은 좌·우익간의 사상 갈등을 첨예하게 만들어 해방 이후 미군이 남한을 통치한 3년 동안 극심한 정 치적 혼란을 겪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유엔의 승인으로 설립되어 공산주의 운동은 불법이 되었다. 그러나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치안은 여전히 불안했다. 분단 상황은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휴전이 될 때까지 3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을 치렀고, 한국사회.

(32) 16 는 지금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이 멈춘 지 60년 가까이 되었지 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즉 정전상태로서 남과 북이 휴전선을 놓고 대치 하고 있다. 남북분단과 전쟁으로 남한에서는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았다. 이와 같은 사 상적 편향은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생겨나게 했다. 협동 조합은 공산주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만드는 조직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1.2. 경제적 상황 해방 당시 한국의 공업지대는 대부분이 북한에 있었다. 남북분단으로 북한지 역의 주요 공장과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 및 생필품, 화학비료 등의 공급이 끊기자, 남한지역은 생활물자와 농업용 자재의 부족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차츰 치안과 사회가 안정화되기 시작했으 나, 1950년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의 발발로 전체 경제사회는 또 다시 극심 한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해방 당시 남한의 인구는 1,687만 명으로 추산되었는데, 그 중 농가인구가 70% 정도 되었지만 식량은 크게 부족했다(조선은행 조사부, 1949). 이후 북한 에서 남으로 내려온 동포와 해외로부터 귀국한 동포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남한 인구는 크게 늘었고, 이는 열악한 식량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해방전 유 일한 한국의 화학비료공장은 북한에 있었는데 분단으로 공급이 중단되었다. 화 학비료의 부족은 남한의 농업생산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식량공급이 줄어듬으 로써 소비량도 줄어들어 1940~44년 평균 양곡 소비량은 1인당 1.41석이었으나 1945~47년에는 0.98석으로 떨어졌다. 전력공급 중단, 생필품 부족, 식량부족 등으로 물가가 치솟아 서울의 도매물가지수는 1936년 기준(100.0)으로 할 때 1944년 241에서 1946년 22,100, 1947년 40,200, 1948년 65,500이 되었다(조선 은행 조사부, 1949). 해방 당시 대부분의 농가는 자신의 토지를 갖지 못한 소작농으로서, 소득보.

(33) 17 다 지출이 많아서 적자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1948년 조사에 의하면 평균적으 로 농가 지출이 수입보다 5% 정도 많았다. 농가의 영농애로 요인 중 가장 큰 것이 비료와 축력의 부족으로 조사되었다. 비료비는 농업지출의 37.8%를 차지 할 정도로 비중이 큰 항목이었는데, 구하기가 어려웠고, 일을 할 소는 식량부족 으로 도축이 많아져서 구하기가 어려웠다. 정부는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농업생산력을 재건하기 위해 1949년부터 농 지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전쟁의 발발로 1957년에 이르러서야 이를 끝낼 수 있 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농지를 유상으로 매입하여 소작인에게 유상으로 분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부는 지주에게 지가증권을 발행하여 대금으로 지불하 였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가로부터는 현물 또는 현금으로 지가를 상환받았다. 농지개혁으로 대부분의 농민이 자신의 농경지를 갖게 되었으나, 총 경지는 작 고 농가는 많아 호당 경작면적은 평균 0.6ha 정도에 그쳤다. 정부는 법으로 3ha 이상의 농지소유를 못하게 하여, 대규모 농가의 출현을 억제함으로써 영세소농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전쟁은 1953년에 끝났지만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는 1950년대 말까지도 전 쟁의 후유증과 빈곤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농촌은 식량부족, 저소득, 저생 산성으로 인한 빈곤과 극심한 인플레, 갖가지 조세 및 부담금으로 농민의 고통 이 심했고 해가 갈수록 부채는 늘었다. 빈곤 재정에 허덕이던 정부는 통화증발 로 고인플레를 유발했고, 이는 농가의 생활비와 영농비 부담을 가중시켰다. 반 면에 미국으로부터 구호목적의 미잉여농산물이 대량 유입되면서 국내 농산물 가격이 떨어져, 농가는 수입과 지출 양면에서 압박을 받았다. 농촌의 피폐함으 로 인해 농촌에서 자금을 얻기가 어려워지면서 연간 이자율이 60%가 넘는 고 리채가 70% 가까이 되었다. 농촌에서는 식량이 떨어져 끼니를 굶어야 하는 절 량농가가 대량으로 나타났다. 특히 2월에서 5월 사이 춘궁기가 어려웠다. 1957 년 2월 조사에 의하면 전농가의 15.4%가 절량농가로 판명되었다(농림부, 1958.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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