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농업

문서에서 농업발전을 위한 농업협동조합 운영 (페이지 27-44)

남한의 인구는 2010년 현재 4,858만 명이며 이 중에 82%가 도시에 살고 농 촌인구는 18%에 불과하다. 농가인구는 전체 인구의 6.4%인 3,063천 명으로 농 촌지역에서 농가인구는 약 1/3에 지나지 않는다. 수도는 서울이며 2010년의 서 울 인구는 1,031만 명이었다.

한국의 국민총소득(GNI)는 2010년 1,015억 달러로 1인당 GNI는 20,759달러 였다. 한국은 공업이 발달하여 외국에 수출하는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2010년 수출은 4,663억 달러, 수입은 4,252억 달러였다. 국내총생산 규모로는 세계 13 위, 무역총액은 세계 7위권이다.

한국의 주산업은 자동차, 조선, 반도체, 철강, 전자, 통신기계, 화학, 섬유 등 이다. 1차 산업인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6%이고 광공업 등 2차 산업이 39.3%,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은 58.2%를 차지한다. 한국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 하는 비중은 2010년에 총생산액 대비 2.3%, 인구는 6.8%, 국가예산에서 차지 하는 농림예산 비중은 5.7%였다.

표 1-1. 한국의 거시경제 지표와 농업의 비중

구 분 1970 1990 2000 2010

GDP(10억 미 달러) 8 270 534 1,014

     농업비중 (%) 27.4 7.8 4.2 2.3

인구(천명) 32,241 42,869 47,008 48,580

    농가인구 비율(%) 44.7 15.5 8.6 6.4

    농업취업자비율(%) 50.4 17.1 10.2 6.3

국가예산(10억 미달러) - 3.9 7.4 253.3

    농림예산비중(%) - 9.6 7.0 5.7

자료: 농림수산식품부, 「농림수산식품 주요통계」, 2011

현재의 한국경제는 규모면에서 세계 상위권에 속하지만 50년 전만 해도 한 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다. 1965년의 국민총생산(GNP)은 30억 달러였고, 1인당 GNP는 105달러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이 국민경제 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총 인구의 55.1%가 농가인구였고, 총취업자 중에서 농림업 취업자는 56.1%였다.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9.1%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립한 한국은 미국·소련에 의해 남북한으 로 분단되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였으나, 2년 만에 북한의 남침으로 3년간의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밀렸다. 그래서 1960 년대 초까지도 많은 실업과 높은 인플레, 저소득으로 국민은 궁핍한 생활을 해 야 했다. 특히 농촌의 실상은 더 어려웠다.

정부는 1962년부터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지향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하였다. 국내에 형성된 자본이 없으니 외국의 자본을 빌려다 공 장을 일으키고 수출을 독려했다. 이후 연평균 8%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 서 1990년대 초까지 30여 년 동안 고속 성장했다. 한국경제는 경공업에서 중화 학공업으로 성장전략을 전환한 1970년대 말에 제2차 오일쇼크로 한동안 어려 움을 겪기도 했지만 1980년대 중반 세계적인 호황과 함께 처음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며 급속한 성장을 지속했다.

한국은 국토가 좁고 자본도 없는 가난한 나라였지만 인적자원을 활용하여

이제는 선진국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2010년에는 OECD의 DAC(개발원조위원회)의 회원국이 됨으로써 선진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한국의 총 경지면적은 1,517천ha이고 농가수는 117만 7천호여서 호당 경지면 적은 1.46ha에 불과하다. 경지 중 논이 57.4%이며 쌀이 가장 중요한 작목이다.

농업생산은 재배업이 58.1%, 축산업이 41.9%를 차지하지만 부가가치 기준으로 보면 재배업이 64.5%이고 축산업은 18.7%이다. 축산업의 중간재인 사료를 대부 분 외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생산액 비중보다는 부가가치 비중이 낮다.

1950년대에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식량부족으로 고생했던 한국은 농업의 부 흥이 가장 절실한 국정과제였다.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비료 의 공급과 수리시설 등 기반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외국의 차관을 빌려 맨 먼 저 추진한 것이 비료공장의 건설이었다. 이 공장이 완성되어 비료공급이 늘어 나기 시작한 1960년대 초부터 농업생산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시인구의 팽창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농촌침투 등의 영향으로 농업의 상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기 시작하여, 채소, 과일, 축산 등 환금성 작목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1970년대 한국의 농업과 농촌은 도시화·산업화, 녹색혁명, 새마을운동의 영 향을 받아 크게 변화하였다. 주요 도시 중심으로 진행된 공업화로 향도이촌의 이농이 급속히 진행되었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농촌지역에도 빠르게 확산 되었다. 또한 비료·농약 등 생화학 기술에 바탕을 둔 녹색혁명으로 식량자급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농촌지역개발운동으로 추진된 새마을운동은 정신운동 에서 출발, 지역 및 소득개발운동으로 확산되어 농촌을 변화시키고 농민의 자 긍심을 높였다. 이 시기에 1958년에 설립된 농업협동조합도 설립된 지 10여년 만에 확립된 사업기반을 바탕으로 경영기반 구축 및 도약단계로 전환했다.

한국의 공업화는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농촌의 노동력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경제성장의 빠른 속도만큼 이농속도도 높아져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농촌에서도 노동력 부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농업기계 화가 진전되었는데, 지금은 벼농사의 경우 거의 100%에 가까울 정도로 기계화

가 되었다. 하지만 밭작물의 기계화는 아직 낮은 수준에 있다. 소규모 농지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고, 농가당 경영면적도 작아서 기계화의 효과가 잘 나타 나지 않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는 농업기계화, 시설농업에 대한 투자, 가축 구입 및 축산시설 에 대한 투자 등을 위해 차입한 부채가 누적되었지만 소득증가가 뒤따르지 못 해 부채를 상환할 수 없는 농가가 많이 나타났다. 또한 애써 생산한 농산물도 주기적인 풍흉에 따라 가격의 등락이 매우 심해졌다. 이와 같은 부채문제와 농 산물 판매의 애로사항은 농협에 대한 조합원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즉, 농협이 농산물 판매와 농가 소득 증대에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1987년에 농가 부채의 상환연기, 이자율 인하 등의 부담경감조치를 취했으나, 농민은 미흡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1990년까지 거의 매년 추가적인 부채대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대 이후는 우루과이라 운드 농산물 협상이 타결되어 농산물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됨에 따라 농업부문에 대한 대규모 투융자사업이 추진되었다. 새로운 기술 도입과 구조조 정 촉진으로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시장개방에 대응한 경쟁력을 높여가고자 했 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20년여 동안 투자를 해오고 있지만 농업인구의 노령화, 수입농산 물 유입에 따른 가격조건의 악화 등의 요인 때문에 한국의 농업부문은 어려움 을 겪고 있다. 농업협동조합은 어려움에 처한 1950년대의 농업·농촌의 활로를 여는 정책수단으로서 역할을 요구받았듯이 현재도 개방의 충격과 구조전환의 어려움을 타개할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받고 있다. 한국은 미국, EU, 인도, ASEAN, 칠레 등 세계 주요국들과 FTA를 체결하여 완전 개방단계로 전 환하고 있다. 한국의 산업 중 가장 취약 산업인 농업이 이러한 개방환경에서 어떻게 적응해갈 수 있을 것인지가 당면의 과제가 되고 있다. 한국 농협은 이 러한 국가적 Agenda를 풀어갈 중심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농협 은 조합원이 보다 높은 기술력과 경영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유도하고, 지원하 면서, 조합과 조합원이 함께 하는 협동조직의 능력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한국농 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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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업협동조합의 성장사

1. 농업협동조합 탄생의 배경(1945~1957)

1.1. 불안정한 정치·경제사회 1.1.1. 정치적 상황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독립과 동시에 남과 북이 갈 리게 되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이유로 진주해 온 북쪽의 소련군과 남쪽의 미군이 분단을 그대로 고착시켰기 때문이다. 남북의 분단은 좌·우익간의 사상 갈등을 첨예하게 만들어 해방 이후 미군이 남한을 통치한 3년 동안 극심한 정 치적 혼란을 겪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유엔의 승인으로 설립되어 공산주의 운동은 불법이 되었다. 그러나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치안은 여전히 불안했다.

분단 상황은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휴전이 될 때까지 3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을 치렀고, 한국사회

는 지금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이 멈춘 지 60년 가까이 되었지 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즉 정전상태로서 남과 북이 휴전선을 놓고 대치 하고 있다.

남북분단과 전쟁으로 남한에서는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았다. 이와 같은 사 상적 편향은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생겨나게 했다. 협동 조합은 공산주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만드는 조직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1.2. 경제적 상황

해방 당시 한국의 공업지대는 대부분이 북한에 있었다. 남북분단으로 북한지 역의 주요 공장과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 및 생필품, 화학비료 등의 공급이 끊기자, 남한지역은 생활물자와 농업용 자재의 부족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차츰 치안과 사회가 안정화되기 시작했으 나, 1950년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의 발발로 전체 경제사회는 또 다시 극심

해방 당시 한국의 공업지대는 대부분이 북한에 있었다. 남북분단으로 북한지 역의 주요 공장과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 및 생필품, 화학비료 등의 공급이 끊기자, 남한지역은 생활물자와 농업용 자재의 부족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차츰 치안과 사회가 안정화되기 시작했으 나, 1950년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의 발발로 전체 경제사회는 또 다시 극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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