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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의 탄생과 기반구축(1958~1972)

2.1. 농협의 탄생: 농협과 농업은행의 분리 출범

1950년대 농촌은 2월부터 식량이 떨어져 굶는 절량농가가 속출하고, 7월 이 후에는 가을에 수확할 곡식을 담보로 급전을 빌려 쓰는 입도선매가 성행하였 다. 입도선매란 가을에 수확할 곡물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자율이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1954년 8월의 입도선매에서 농민이 받은 돈은 정부수매가의 21.1%에 불과한 것이었다(박성재, 1999). 농촌금융시장은 금융 조합이 제도금융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하나 그 비중은 보잘 것 없었고, 한번

빚을 내면 상환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고리사채가 시장을 지배하였다. 1956년 조사를 보면 부채를 가진 농가는 전농가의 86.7%였고, 농가부채 중에서 연이 자율이 60% 이상인 부채는 현금 60.1%, 현물 54.5%였다.

1956년 3월 이 같은 농촌의 자금사정과 춘궁기 농촌실정을 보고받은 대통령 은 농촌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이의 해결을 위한 농업은 행의 조속한 설립을 지시했다. 미경제조정관실(O.E.C)의 초청으로 내한했던 쿠 퍼가 1956년 2월에 낸 ‘한국의 협동조합금융입법에 관한 건의’를 기초로 한 농 협법안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부처 간의 이견으로 진전이 없자 대통령은 농협 법의 입법을 기다리지 말고 우선 농업은행부터 설립하라고 한 것이다. 이에 따 라 정부는 금융조합과 연합회를 해산하고, 은행법에 따라 주식회사 농업은행을 설립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이에 대해 국회 재경위에서는 주식회사 형태의 농업은행은 농업금융을 해결 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하지만 이미 금융조합과 금융조합 연합회의 해산을 결정한데다가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어서, 자칫하면 농사자금 을 분배해줄 기관이 없어 대혼란이 야기될 수 있는 상황이 우려되었다. 그래서 서둘러 주식회사 농업은행을 설립하고, 특수법에 의한 협동조합은행의 설립 때 까지 과도기 금융기관으로 성격을 한정지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이 곧 드러났다. 아무리 과도기적 농업금융기관이라고는 하나 장차 조합금융을 육성 하고 지도금융체제를 갖추려는 방향성을 갖고 있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진흥복, 1999; 농협중앙회, 1963). 농업개발에 불가결한 저리 중장기자금이나 위험부담이 따르는 대출은 기피했다. 농업금융기관으로 창설되었으면서도 농 업금융을 일원화하지 못했다. 산업은행은 당시 농업자금의 36% 정도를 취급하 였고, 일반 상업은행도 농업자금을 취급하고 있었다.

농협법 제정이 늦어진 이유 중 하나는 농협으로부터 신용사업을 분리할 것 인지 아니면 구매·판매 등 경제사업과 신용사업을 겸영할 것인지를 놓고 견해 가 대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배경에는 농협이 새롭게 탄생할 경우 과거 의 농회와 금융조합의 재산을 누가 인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신생 농협에 대 한 정부부처의 감독권을 어느 부처가 가져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도 내재되어

존슨안과 쿠퍼안의 차이

1955년 주한경제조정관실(O.E.C)의 초청으로 내한한 미국 농업금융전문 가 E.C. Johnson 박사가 1개월의 조사 후 낸 건의안 “한국농업신용의 발전을 위한 건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지방금융조합을 농업조합으로 개편

② 금융조합의 중앙 및 도 연합회는 농업은행으로 개편

③ 농업조합은 도단위로 도연합회를 조직하고 이 도연합회에 의해 농업조합연합회를 설립

④ 농업조합은 신용·구매·판매·이용사업을 겸영하는 다목적 농협으로 함.

⑤ 농업은행은 농업조합을 통하여 농업자금을 공급함.

1956년 국제협동조합연맹의 협동조합 전문가 J.L. Cooper가 제안한 “한국 의 협동조합금융입법에 관한 건의”는 다음과 같다.

① 금융조합은 신용조합으로 개편하고 금융조합연합회는 농업은행으로 개편 ② 농업조합은 부락조합, 농업조합, 특수조합 및 시군농업연합회, 중앙회의 4단계로 새로 조직

③ 부락조합, 농업조합, 특수조합은 신용업무를 포함한 종합농협으로 하고, 시군연합회와 중앙회는 신용업무를 제외한 사업만을 행함.

④ 신용조합은 농업조합·특수조합 및 부락조합에 대하여 농업자금을 공급 ⑤ 농업은행은 원칙적으로 신용조합에 대하여 대출

자료: 농협중앙회, 「농협30년사」, 1991, 84~85쪽

있었다.

농림부와 국회의 농림위원회는 단위조합과 중앙회 모두 신용·구매·판매 등 을 겸영하는 안을 내세웠으나 재무부와 국회 재경위원회는 단위조합은 겸영하 되 연합조직에서는 신용사업을 농협과 분리하여 별도의 금융기관이 취급해야 된다는 안이었다. 겸영론의 근거는 협동조합이 별도의 자금이 충분치 않은 상 황에서 신용사업의 자금이 경제사업과 바로 연계되어 사용될 수 있어야 협동 조합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연합조직에서는 신용사업과 농협의 경제사업을 분리하자는 안은 당시 신용사업은 정부의 재정자금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 경우 정부의 감독과 간섭이 불가피해져 협동조합 의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에 대해 정부와 국회의 소관별 로 대립했을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서로 의견의 차이가 있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오랜 논쟁 끝에 1957년 2월 농협법과 농업은행법이 별도의 법률로서 국회를 통과하였고, 이를 개정한 법률이 1958년 3월에 공포됨으로써 농업협동조합과 농업은행이 발족하게 되었다. 이 법에 의하여 은행법에 의해 설립된 주식회사 농업은행은 농업은행법에 의한 특수은행인 농업은행으로 개편되었다. 농협법 에 의해 탄생한 농협은 1958년 10월부터 업무를 개시했는데, 종전의 농촌단체 이던 식산계는 이동조합이, 시군농회의 업무와 재산은 시군조합이, 대한농회의 일반업무와 재산을 농협중앙회가 각각 인수하였다.

농협의 조직체계에서 단위조합은 마을단위를 기초로 한 이동조합이며, 이를 회원으로 한 지역연합조직인 시군조합, 또 전국연합회를 농협중앙회가 맞는 3 단계 조직체계였다. 또한 단위농협의 종류로는 경종농가를 위주로 이동단위로 조직된 일반농협과 축산·원예·특수작목 농가를 중심으로 조직된 원예협동조 합, 축산협동조합, 특수협동조합(양봉조합, 양잠조합)으로 4개의 형태가 있었 다. 조합의 업무구역은 행정구역에 준하여 이동조합은 이동, 시군농협과 축산 및 원예농협은 시군을 업무구역으로 하였으며, 특수농협만은 업무구역을 제한 하지 않았다. 사업은 이동조합의 경우 신용사업은 여신만 허용되고 다른 경제 사업을 모두 허용하였으며, 시군조합은 신용사업은 허용되지 않고 경제사업만

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앙회는 회원을 위한 경제사업과 지도·교육사업을 하도 록 했다. 그리고 원예·축산·특수조합은 시군조합에 준하도록 했다.

조합의 설립을 위해 농림부는 1957년 4월부터 마을마다 이동조합 정관을 배 포하고 선전·계몽활동을 펼쳤지만 1년이 지나서도 조합설립 가능수의 43%의 마을에서만 조합이 설립되었다. 이후 2년 뒤인 1960년 말이 되어서야 설립가능 조합의 92.3%를 달성했다(진흥복, 1999).

농업협동조합은 설립은 되었지만 사업을 할 수 있는 자금이 없었다. 필요한 자금을 대부분 농업은행으로부터 빌려야 할 형편이었다. 신용사업을 할 수 없 었고 자체자금 조성이 부진했기 때문이다. 이제 설립된 기관이니 사업체계도 미비했고 경영기술도 미숙했다. 다만 농협중앙회는 비료·농약·농기구 등 농업 용 자재의 구매 및 계통공급 사업, 고공품, 계란, 박하 등의 판매사업 등에서는 얼마간의 실적을 내었다. 이러한 사업은 전에 농회와 금융조합에서 정부대행사 업으로 하던 것들이었다.

중앙회와 시·군조합은 농용자재와 일부 농가 판매사업에서 실적을 냈지만 단위조합은 개점휴업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정부는 일부사업을 시범사업으로 하여 사업촉진 및 지도사업을 전개했지만 그 효과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농 협은 사업을 위해 농업은행의 자금을 필요로 했지만 농업은행은 자금을 빌려 주려 하지 않았다. 자금을 회수할만한 담보가 없고 사업능력이 미덥지 못하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농업은행의 이러한 태도는 곧 그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으 로 되돌아왔다.

농협중앙회 편 「한국농업금융사」(1963)는 ‘농업은행이 일반은행처럼 영리를 추구하는 기관은 아니었으나 은행이라는 속성 때문에 수지관계를 등한시할 수 없으며 보수적인 견실주의를 고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 소액융자보다는 거 액융자를, 신용대부보다는 담보대부를 환영하게 될 가능성이 있으며 소농이 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가계층에서 보면 결함이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농업은행 의 1961년 3월 말 대출실적으로 보면 농협을 통한 대출은 겨우 7.1%에 불과하 였다. 이러니 농협과 농업은행의 갈등이 클 수밖에 없었다.

2.2. 종합농협으로의 전환과 기반 구축 2.2.1. 농협과 농업은행의 통합

오랜 논란 끝에 탄생한 구농협이 농업은행과의 갈등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 지 못하자 두 기관의 통합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를 실현한 것은 1961년 5월

오랜 논란 끝에 탄생한 구농협이 농업은행과의 갈등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 지 못하자 두 기관의 통합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를 실현한 것은 1961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