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기초건설시기의 직업기술 교육(195 8~1960. 12)

Ⅳ . 북한 직업기술교육의 과제 참고 문헌

3.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기초건설시기의 직업기술 교육(195 8~1960. 12)

정전 직후 북한에서는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 직업기술교육사업과 기술인재양성사업을 더욱 발전시킬 데 관한 많은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로, 기술대학의 급속한 복구 및 신설확장, 자체의 힘으로 민족기술간부(기사, 전문 가)를 대량적으로 육성하였다. 1960년도에 이르러 북한에는 78개의 대학에 학생수는 약 10만여명에 달하였다.16)

둘째로, 중등기술교육의 급속한 복구발전, 고급중학교를 기술전문학교로 개편, 준기사

15) 박영룡 《우리 나라에서의 기술교육발전》, 조선교육과학연구원, 1978년 제 55페지 16) 前揭書 제 141페지

양성의 새로운 고등전문학교를 창설하였다. 이리하여 고등전문학교는 해마다 늘어나 1960년에 30개교에 이르렀으며 3000여명의 학생들이 장학금과 학습조건을 보장받으면서 기술인재로 자라났다. 그리고 근 3500여명의 준기사를 양성하여 인민경제 각 부문에 보 냈으며 1960년에 이미 95470명의 기수 및 중등전문가를 갖게 되었다.

셋째로, 인민교육체계의 개편—새형의 기술학교 및 고등기술학교체계를 창설하였다.

1960년에 348개교의 기술학교가 새로 일떠서 기술학교 수는 무려 855개교에 달하였으며 고등기술학교는 이미 82개교나 새로 나왔으며 학생수는 약 11000명에 달하였다.

넷째로,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의 강화발전, 새형의 공장대학과 공장고등기술학교 를 창설하였다. 1960~1961학년도에 이르러 북한에서는 일하면서 배우는 대학생 수가 49000여명으로 늘어나 대학생 총수의 57.3 %를 차지하였다.17)

다섯째로, 기술보습반을 설치하여 기능공양성사업과 근로자들의 기술기능학습을 강화 하였다.

이렇듯 전후 복구건설 및 사회주의기초건설시기에 북한은 로력후비양성 및 근로자들 의 기술기능향상사업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4. 「사회주의 전면적 건설시기」의 직업기술교육 (1961. 1~1979. 12)

북한에서는 경제건설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직업기술교육을 발전시키는데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사회주의 공업화의 성과적 실현을 위한 기술인재를 더 많이 육성하여 기술자, 전문가 수가 급속히 늘어난 결과 인민경제종업원총수에서 기술자, 전문가의 비중은 1960 년의 7.2%로 부터 1969년에는 15.8%로 높아졌으며 같은 기간에 협동농장 당 기술자, 전 문가수는 1.2명으로부터 17.5명으로 늘어났다.18) 그리고 동년 12월 「9년제 기술의무교육 을 실시할 데 관한 법령」을 발표한 후 북한의 직업교육체계는 중대한 변혁을 가져왔다.

즉 모든 성원들이 국민경제의 현대적 생산에 필요한 1가지 이상의 기술기능을 장악하도 록 하였다. 70년대에 들어 100만 지식인대군의 분투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종업원 중의 기술원, 전문가의 비율을 부단히 높이였으며 1976년에 이르러 전체의 19.2%를 점하였다.

농촌에서는 각 집단농장의 기술원, 전문가의 비율이 1969년의 17.5명으로부터 1976년의 55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모든 새 세대들에게 완성된 중등일반지식과 함께 한가지이상의 기술기능을 소유시키는 전반적 10년제 고중 의무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

17) 前揭書 제 174페지 18) 前揭書 제 223페지

여 1972년 9월 1일 1년제 학교 전 의무교육이 시험단계를 거쳐 본격적인 실시단계에로 들어갔다.

5. 「전 사회의 인테리화」 실현의 고등교육단계의 직업기술교육(1981. 1~1999. 12)

80년대부터 북한에서는 제1고등중학교, 농장대학, 어장대학, 텔레비죤방송대학 등이 연 이어 신설되었다. 1985년 이후 전반적 11년제 의무교육의 완전실현은 직업교육사업에 새 로운 요구를 제기하였다. 즉 일하면서 배우는 고등교육체계에서 학습하는 학생들이 대폭 적으로 늘어났으며 고등교육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더욱더 높아만 갔다. 그리하여 일반 고등교육체계만으로는 사회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어려웠으며 반드시 직업고등교육체계 를 확대하여야만 하였다. 공장대학을 비롯한 직업고등교육체계는 각 기업소와 단위의 종 업원들이 국가의 계획적인 조직 하에 일터에서 고등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리하여 북한 에서는 일터에서 집단적으로 고등교육을 받는 국면이 나타났다. 예하면 룡양광산금광갱 의 근로자들은 집체적으로 공장고등전문학교와 공장대학의 교육을 받았으며 졸업 후 모 두 준기사와 기사로 되었으며 평안남도 양덕군 은하리의 청년 분조원들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집단적으로 합동농장에 내려갔고 또 집단적으로 성인고등교육체계의 학습에 참가하였으며 졸업 후 준기사, 기사, 농예사로 되었다.19)

반세기 동안의 노력을 거쳐 북한은 9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끝내 180만의 지식분자대 군을 마련하였다. 현재 북한 교육사업의 분투목표는 「전사회의 인테리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교육 의무화」는 일반고등교육체계 만으로는 실현하기 어려우며 반드시 직업기술교육의 확대와 사회성원의 교육수준 제고에 의해 실현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북한에서는 거대한 노력을 하고 있다. 1999년 현재 북한에는 각종 전문학교 430 개교에 41.40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공장대학(농장대학과 어장대학을 포함) 113개 교에 18만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20) 이는 「전사회의 인테리화」 전략목표의 중요 한 도경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북한에서는 국정에 맞는 직업기술교육을 창조적으로 전개함으 로서 양과 질 면에서 모두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으며 사상・기술・문화 3대혁명의 기치 아래 모든 사업을 주체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19) 이영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교육」, (조선) 사회과학출판사 1984년, 제36폐지 20) 조선교육성에서 1999년 6월 30일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