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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젠다 제안

문서에서 지표를 통해 본 한국여성 삶의 변화 (페이지 102-110)

IV. 여성학의 아젠다

2. 아젠다 제안

학제간 연구의 심화와 활성화

여성학은 학제간 연구를 통해 개별 분과학문의 접근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여성의 상 황과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더욱 복잡하게 변화되고 있어서, 여성의 삶을 이해하거나 변화시키고자 할 때 복잡 한 상황과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학으로 하여금 보다 넓은 학제간 협 력을 이룰 필요를 만들고 있다.

여성학은 자연과학보다는 주로 사회과학의 영역 안에서 또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최근의 여성 상황은 자연과학까지 아우르는 학제간 연 구의 본격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시험관 아기시술이나, 난자 공여 등 재생 산 영역에서의 변화는 여성의 몸에 관한 문화적 ․ 윤리적 이해, 어머니의 법적 사회적 정의 에 관한 논의 이외에 몸에 관한 생물학적․의학적 지식, 생명윤리의 문제 등 다양한 지식을 통해 논의되어야 한다. 융합학의 발전 등 학문간 연계와 협동을 요구하는 복잡한 사회 변화 속에서, 학제간 연구를 통해 개별 분과 학문의 한계를 뛰어넘어 온 여성학이 지금까지의 학 제간 협동의 틀을 능가하는 광범위한 학제간 연구 협동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의 연구주제 개발 및 개념화

여성학은 공사이분법의 논리가 여성의 삶을 공적인 차원을 갖지 않은 사적인 세계에 속 한 사사로운 문제로 인식하게 한다고 지적하면서, 공사 구분 자체가 성별 관계와 관련된 것 이라고 비판한다. 여성의 경험과 삶이 공적인 논의의 장에서 배제되어 온 것은 이러한 공사 이분법의 논리에서 비롯된다. 근대 노동 중심의 패러다임 역시 공사 이분법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인데, 노동 중심의 패러다임 속에서 여성의 경험과 위치는 평가절하되거나 비가시화 되어 왔다. 노동 중심의 패러다임을 비판하지 않고 성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 금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적이고 노동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만든다. 이러한 전략은 여 성을 남성과 같게 만듧으로써 평등해지려는 동화 모델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더 나은 세 계를 만들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추구와 모순된다. 친밀성, 보살핌, 배려, 관계가 이러한 노 동중심의 패러다임에서는 도구화되거나 축소되거나 무시된다. 최근 인간 관계가 파편화되고 도구화되는 징후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노동 중심의 패러다임으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대 응하지 못한다.

여성학과 여성정책의 ‘일 가족 양립’이라는 아젠다는 노동 중심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노 동과 가족 두 세계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개념적 확장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족이라고 상상하는 세계는 사실상 친밀성, 성애, 놀이, 보살핌, 지지 등이 일어나는 세계이지, 남녀가 만나 자녀를 출산하여 키우는 특정 형태의 단위 상상할 필요가 없다. 이러 한 제한된 생각은 가족 개념을 전통적 핵가족 중심적인 것으로 재생산함으로써, 가족에 관한 페미니즘의 비판과 성찰의 성과를 간과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일 가족 양립 아젠다가 지향하

고자 하는 통합이 노동과 가족이라는 두 세계의 배타적 결합으로 그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이 정책으로 이어진다면, 이러한 접근은 제도가족의 지위를 가진 관계들만을 인식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노동과 갈등하는 다양한 친밀성과 일상의 세계를 변화 시키지 못하게 된다. 인간 삶의 질과 관계 회복을 위한 상상이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이라는 개념 안에 가두어져서는 곤란하다. 공사간의 대립적 분할과 위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일 가 족 양립’ 개념은 더 많은 관계와 일상을 포괄할 수 있도록 확장될 필요가 있다.

차이 논의의 구체화와 국지화

1990년대 이래 한국 사회에서 차이는 여성학의 중심적 논제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차이 논의는 다소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여성의 경험 세계에 관한 연구에서 차이는 다루어지지 않고, 여성은 단일하게 재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 상은 한국 사회에서 젠더 개념이 더 설명이 필요하고 설득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데서 연 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차이를 다루면서도 경험 연구에서는 차이가 간과되는 경향은 한국 여성의 경험 에 관한 이해 부족을 나을 수밖에 없다. 한국여성학의 문제로 특정 서구 이론의 유입 으로 인한 지적 식민성이 지적되기도 한다(조순경, 2000). 이론의 서구로부터의 유입이 여성 학 특유의 문제가 아니고 그 자체로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비판의 핵심은 서구 이 론이 한국 여성의 상황과 문제에 적절한 해결책을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의 근대 학문에서 이론이 그러하듯이 차이 논의가 서구 이론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서구적인 것 이 문제인 것은 우리의 현실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차이를 말하되 경험적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데 관심이 부족했던 것은 차이 논의가 서구적 인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차이는 추상이 아니 라 현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연구에서 차이는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작동되는지 경험 연구를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여성에 관한 경험 연구를 통한 차이의 구체화는 차이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드러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차이 논의의 서구 이론적 경도를 극복하는 데에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젠더가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내 주기 때문에, 젠더 개념에 관한 설명력도 제고시켜 줄 것이다.

또한 이론적으로 차이 논의가 단지 다양성 논의로 수렴되는 경향은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차이는 차별의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성 내부의 차이는 곧 여성 내부의 차별의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장애나 인종 등의 차이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차 별의 문제를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지만, 사회계급계층 차이는 그 자체가 차 별이기 때문에 장애나 인종의 문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논의되는 것이 적절하다.

계급 차별이 차이의 목록 속에서 그저 하나의 항목으로 나열되는 현상은 차이/차별의 문제 가 내포한 대립과 갈등의 측면을 축소시키면서 차이 논의를 탈정치적인 논의로 변질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나을 우려가 있다.

더욱이 지구적 차원의 사회계급계층 구조가 재편되면서 여성 내부의 차이와 차별이 심각

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차이와 차별의 문제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다양한 차이에 관한 민 감성과 더불어 사회계급구조 속에서 여성이 놓인 위치의 차이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회 변화에 대한 학문세계의 적절한 대응이라고 평가할 수 있 다. 성별, 인종, 계급 등이 어떻게 교차하면서 여성의 다양한 위치와 경험이 만들어지는지를 경험 연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한국 여성학의 발전을 위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비판과 논의의 급진성

여성학은 급진적인 학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러한 평가에 부정적인 견해가 깔려 있을 수 있지만, 급진성을 근본적인 차원의 질문을 던지는 특성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전통 적인 학문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차원의 경험, 존재, 의미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세계의 허구성을 고발하고자 해 온 여성학이 추구해야 할 학문적 에토스라고 할 수 있다. 여성학은 여성이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함으로써 여성의 정체성을 질문거리로 만들면서도, 여 성의 경험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고, 여성운동, 여성정책 등 일련의 행동과 조치들을 ‘여성의 이름’으로 만들어낸다. 이것이 여성학과 페미니즘이 내포하고 있는 역설(paradox)이다. 린 시걸은 여성적인 것을 재평가 하고자 할 때 페미니즘이 본래 도전하고자 했던 성적 양극성 관념을 강화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Segal, 1987). 이러한 역설은 여성학으로 하 여금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성하는 급진적 태도를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여성학, 여성운 동, 여성정책은 스스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을 재생산할 위험에 대해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 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특정 현상에서 젠더 차원을 분석해 내는 일, 사회의 변화를 위해 젠더 정책이 필 요하다고 설득하는 일은 자칫 젠더를 재생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여성학은 여성운동, 여성정책 등 여성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 로를 경계하듯이 경계하여야 한다. 여성학자, 여성운동가, 여성정책 담당자는 성별이분화된 사회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지금의 성별화된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에 연루 되어 있다.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스스로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는 급진적 태 도가 요구된다.

문서에서 지표를 통해 본 한국여성 삶의 변화 (페이지 102-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