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생각을 뒤집으면 문제 해결의 탈출구가 보인다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94-100)

생각을 뒤집으면 문제 해결의 탈출구가 보인다

ReSEAT 전문연구위원 성기웅

침부터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이다. 땅바닥 에 개미떼 한 무리가 부지런히 전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 고 있다. 그들의 생존 본능과 열기가 십여 년 전 나의 연구 열정을 뛰어넘는다. 문득 옛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장치설계 변경을 위한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 애쓰던 나날 속의 기억이다. 그 시절의 내 모 습과 개미떼의 모습에 동병상련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1980년대 후반 이후에 미국의 4개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에 이어, 2004년에 일본 미하마 지역의 원전 증기발생기 계통1)에서 유체가속

부식2)에 기인된 대형 배관 파단사고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일단 다른 실험실에서 사용 중인 장치를 모방하기로 했다.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배관 형태의 구조에서 좁은 공간만으로 충분한 회전 형태로 변경했다. 원통형 용기 안의 중심축에서 회전하는 원통 표면에 시편들을 장착하는 방법이다. 실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유체의 속도를 높여보기로 했다.

회전으로 유속을 제공하는 장치의 상세 설계를 진행하면서 후딱 열흘이 지났을 무렵, 이미 이런 형태의 장치를 사용하고 있던 실험실 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요구되는 유체의 속도까지 올리기 위해 회전 속도를 높이다가 그만 회전축이 휘어버렸다는 것이다. 아뿔싸! 며칠에 걸쳐 준비된 시편들도 튕겨져 나왔다는 말에 망연자실하였다. 회전축 대신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하였다.

보다 안정적인 장치가 필요하였다. 여러 방안을 생각하며 아이디어를 짜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휘어지지 않는 튼튼한 회전축을 만들 수 있을까? 시편들을 회전 원통 표면에 더욱 안정적으로 장착할 수 있는 방법은? 또 다른 문제점들은? 실험 동료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많은 해결 방안을 도출해봤지만, 마땅한 대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문제 해결 방법을 생각하느라 한밤중에도 잠을 설치는 건 기본이었다.

꿈속에서도 고민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식사 중에도 내가 뭘 먹고 있는지 느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느 새 눈빛은 흐리멍덩하게 변했 다. 하루하루 시간은 유수같이 흘러가는데 눈앞은 여전히 캄캄했다.

매일 점심식사 후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연구소 뒷산을 걸을 때도 고민은 계속 되었다. 회전축이 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빠른 유체의 속도 때문이거나 회전원통 표면에 장착된 시편들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었다. 한번 던진 화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평소 하고 있는 생각이 꿈속에서도 이어지는 그야말로 몽중일여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던가. 한순간 생각 하나가 뇌리를 강타했다. 시편 들을 꼭 회전 원통 표면에 장착해야만 했던가? 이는 그동안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왜 이런 관점으로는 접근하지 못하고 같은 자리만 맴돌았는지! 광명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혹시나 잊어버릴까 그 자리에서 바로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이후로 회전유속 장치의 설계개념을 도출하려던 생각의 방향이 완전히 전환되었다. 시편을 회전 원통 표면에 장착하지 않기로 했다.

시편을 어디에 장착해야 할까 고심하던 중, 회전 원통 바깥에 또 하나 의 원통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원통 내부표면에 시편들을 배치해보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후속 아이디어들이 일사 천리로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장치의 설계 개념부터 새로이 도출하기 시작했다. 이전 회전 원통의 형태는 회전 날개의 형태로 변경되었다.

시편들이 장착될 새로운 외부 원통형 용기의 모습이 머릿속에 상세히 그려졌다. 생기를 잃었던 눈동자가 다시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부식실험루프 구성에서 요구되는 20여 가지 이상의 부속기능

들이 제공되는 개념설계도가 완성되었다. 이들은 유체공학 소프트웨어 코드로 여러 번 확인되었다. 기본설계와 상세설계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드디어 장치제작 전문기업체의 협조로 새로운 부식실험루프가 완성 되었다. 시편을 회전시키지 않고 고정시켰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장점 들이 속속 드러났다. 최종 장치성능 시험에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들이 얻어졌다. 이 순간 고진감래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이 부식실험 루프는 그 후 오랜 시간동안 별다른 고장 없이 잘 운용되었다. 보다 작은 공간에서 보다 빠르게 좋은 실험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장치는 관련 세미나와 심포지엄 및 국제컨퍼런스 논문발표 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인도의 한 연구소로부터 상세설계도를 요청받기도 했다. 제3자의 시선에서 보면 매우 단순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장치개념이지만, 국내외 전문가들의 눈에는 특별하게 보였나보다.

원전 배관들의 유체가속부식을 저감할 수 있는 최적의 수화학 조건과 재질 조건들이 차례차례 도출되었다. 그럴 때마다 배관의 부식 완화와 수명 연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자긍심이 저절로 샘솟곤 하였다.

왜 장치변형 과정이 그리도 힘들었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장치구조의 변경은 결국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기존의 시편장착 위치가 너무나 당연한 곳이라는 선입견에 빠져서 더 이상 검토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기존의 개념에 고착된 사고 속에 갇혀 쳇바퀴 돌 듯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고정관념에 틀어박혀 아마 연구팀 전원이 집단최면에 걸렸으리라. 틀에 박힌 사고의

틀에서 긴 시간 동안 지나치게 몰두한 끝에, 아마 편집증 환자가 되어 갔으리라. 이 사고의 편집증에서 벗어나는 순간, 저절로 뛰쳐나온 역발상이 새로운 장치 개념을 창출해낸 것이다. 왜 특정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울까? 선입견들은 무엇으로 깨뜨려질 수 있을까?

현대는 융합·복합 연구 및 4차 산업기술 혁명의 요구가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는 시대이다. 지금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차원의 새로운 개념의 도출과 기술의 혁신이 요구되고 있다. 어느 시대보다도 고정 관념이라는 장벽을 뛰어넘는 사고의 방법과 기술들을 강구해야 하는 때이다. 순차적 사고와 돌출적 역발상의 과정에는 연구의 특성과 환경에 따라 여러 갈래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연구목표 달성을 위한 집중력과 창의적 발상을 위한 초월성이 공존하는 하나의 통일된 원리가 있을 것이다. 이 원리가 무엇인지 간파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훈련이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어느 새, 개미 한 마리가 나타나서 한참을 벤치 위에서만 맴돌고 있다. 어디서 기어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개미를 휴지로 감싸서 창의공원의 수풀 속으로 옮겨주었다.

그 개미는 자신이 어떻게 이동되었는지 알지 못하겠지! 타의적이지만 쳇바퀴에서 벗어난 개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고정관념에 빠져 쳇바퀴만 돌다가 어렵게 벗어났던 과거의 잔상을 떠올리며...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94-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