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록 은 일본에 대한 서정적이고 세밀한 서술과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빼 어난 문학성을 성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대 사행록의 학지(學知)를 종합하고 갱신 하여 일본에 대한 다방면의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담고 있다. 이 때문인지 해유록 은 조선후기 일본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원하는 문사들은 물론, 이국에 대한 동경 이나 호기심을 지닌 사람들에게까지 문예물로 널리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408) 기해 사행 이후 통신사행에 참여하는 이들은 해유록 을 반드시 참고하였으며, 사행원들 은 해유록 의 주요 내용을 초록하여 만든 일관요고 (日觀要攷)와 같은 책자를 항 상 휴대하고 참고하였다.409) 특히 계미사행 때는 성대중(成大中), 원중거(元重擧)와 같은 실학적 관심을 지닌 문사가 참여하였으며 이들이 견문한 일본에 대한 정보가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등에 전해졌음은 잘 알려져 있다.410)
조엄(趙曮), 남옥, 원중거, 성대중 등 계미사행원이 저술한 사행록에서 해유록 의 영향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특히 성대중의 경우 자신의 사행록 가운데에 「청천 해유록초」(靑泉海游錄抄)라는 항목을 두고 해유록 의 「문견잡록」을 거의 대부분 초록하기도 하였다. 원중거는 일본에서의 견문을 정리하여 사행록인 승사록 (乘槎 錄)을 저술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대 사행록의 문견록을 집대성하고 체계적으 로 정리하여 화국지 (和國志)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화국지 는 일본에 대한 확실 한 지식을 추구하고 객관성과 유기성을 지니며 실학적 문제의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일본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저술이라 할 수 있다.411) 승사록 과 화국지 는 문견 록의 글쓰기를 계승하면서도 학문적 글쓰기 차원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전대 사 행록과의 관련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해유록 은 후대 사행원들이 반드시 참조했던 것으로 볼 때 원중거의 저술에도 해유록 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유의하여 해유록 이 후대 통신사행록의 구성 및 서술에 미친 영향 을 남옥과 원중거의 저술을 통해 집중적으로 비교·검토해보고자 한다.
먼저 계미사행의 제술관이었던 남옥(南玉, 1722~1770)이 지은 일관기 (日觀記)
408) 본고의 제1장 제1절 각주4를 참조.
409) 일관요고 에 대해서는 제1장 제1절 각주5를 참조.
410) 임형택, 「계미통신사와 실학자들의 일본관」, 창작과 비평 85, 1994(임형택, 실 사구시의 한국학 , 창비, 2000에 수록); 박희병, 범애와 평등-홍대용의 사회사상 , 돌베개, 2013, 제2장 제7절; 박희병, 「조선의 일본학 성립: 원중거와 이덕무」, 한국 문화 제61집, 2013을 참조.
411) 박희병, 앞의 논문을 참조.
를 살펴보도록 한다. 통신사 제술관은 대대로 문재(文才)가 빼어난 이들이 맡았는 데, 제술관이 저술한 사행록 가운데 현전하는 것은 해유록 과 일관기 뿐이다. 두 사행록을 비교해보면 해유록 은 일관기 에 비해 문예성이 두드러지며, 일관기 는 상세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치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관기 의 곳곳에서 해유록 을 숙독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조엄(趙 曮) 및 원중거와 성대중의 사행록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들은 사행 시 일관요고 를 휴대한 것 외에도 사행록을 작성하면서 해유록 을 많이 참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남옥은 10월 20일 니시도마리우라(西泊浦)의 기록에서, 해 유록 에는 신묘사행 종사관인 이방언(李邦彦)의 시가 남아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찾 을 수 없다고 했고, 11월 3일 조에서는 쓰시마(對馬島) 도주의 초대를 거절하면서, 도주가 제술관을 연회에 초대할 때 군관(軍官)을 접견하는 예로 대하는 관례가 있 었는데, 신유한이 이를 거부한 이래 폐지되었음을 특기하고 있다. 또 교오토(京都) 의 다이부츠지(大佛寺)를 지나면서도 기해사행 때의 논쟁을 언급하며 이러한 관례 가 폐지된 것이 기해년 이후임을 밝히고 있다. 해유록 에서 문학적 필치를 가하여 중요하게 다룬 것을 남옥 역시 인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도 하카타(博多) 에서 신유한이 지은 「애박다진」(哀博多津)을 언급하는 등 해유록 내지는 기해사 행과 관련한 언급이 일관기 에는 다수 보인다. 이처럼 남옥은 사행 전에 이미 해 유록 을 숙독하였고 사행 중에도 늘 기해사행과 해유록 을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기 의 체재와 서술은 해유록 과 사뭇 다르다.
일관기 는 모두 8권 4책으로 되어 있어 해유록 에 비해 분량이 많다. 그 가운 데 1책은 「범례」인데 모두 4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례(事例)·원액(員額)·반전(盤 纏)·서계식(書契式)·치제(致祭)·좌목(座目)·노정(路程)·창수제인(唱酬諸人) 등 23항목 에 걸쳐 소제목을 붙이고 사행의 전반적인 상황을 항목별로 몹시 상세하게 기록하 고 있다. 가령 공대(供待) 항목에는 각 주에서 통신사에게 바친 물품을 기록하였는 데, 삼사(三使)에서 하관(下官)에 이르기까지 지급된 식량과 물품명을 하나하나 다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대 사행과 비교해 그 양이 늘어나고 줄어든 것, 지급되 지 않다가 다시 지급된 것, 이번 사행에서 처음으로 지급된 것, 이번 사행에서 없 어진 것 등을 구분하는 등 대단히 치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사 전적 정보를 전달하기에는 유리하나 흥미성과 가독성을 떨어뜨린다는 단점이 있다.
2책과 3책은 일록(日錄)인데 시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인문지리 정보는 비교적 상세하나 일록과 분리되어 4책의 「총기」(總記)에 수록되어 있어 해유록 보다는 남 용익의 부상록 의 체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책(冊)에는 「총기」라는 제 목 하에 폭원(幅員)·산수(山水)·각주(各州)·황계(皇系)·원계(源系)·관제(官制)·부세(賦 稅)·병제(兵制)·물산(物産)·궁실(宮室)·신불(神佛)·학술(學術)·문장(文章)·서화(書畵)·인
장(印章)·서책(書冊)·의약(醫藥)·형신(刑訊)·관금(官禁)·금화(禁火)·의복(衣服)·음식(飮 食)·시사(市肆)·주즙(舟楫)·여색(女色)·남요(南妖)·관혼상제(冠婚喪祭)·음역(音譯)·사마 (使馬)·농업(農業) 등의 하위 항목을 두었다. 항목의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는 통신사행록의 ‘문견록’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해유록 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항목이 좀 더 세분화되어 있으며 내용 역시 자세하다. 그러나 서술 방식은 해유록 과 달리 대화체나 에피소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사전적 기 술로 일관하고 있어 내용의 방대함에 반비례해서 문예성과 흥미성은 감소하였다.
이처럼 일관기 는 해유록 비해 그 내용이 무척 상세하고 방대한바, 역대 사행 록을 집대성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일록(日錄)도 매일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 며 그 내용도 번다하다 여겨질 정도로 상세하여 중요 내용을 집중적으로 기록한 해유록 과는 차이가 있다. 가령 해유록 에서 부산의 영가대에서 이루어진 해신제 를 기록한 대목은 주례 의 서술 방식을 따라 눈에 보일 듯 핍진하게 그러져 있다.
일관기 에도 해신제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4일에 걸쳐 준비 과정을 번다할 정 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의식의 예행 연습을 하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제사에 앞서 삼사(三使)가 읽은 맹서문(盟誓文)을 수록하였으며, 자신이 지은 제문 (祭文)의 원본(原本)과 실제 제사에서 읽은 제문이 별 차이가 없음에도 둘 다 수록 하였다. 해유록 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이 대단히 상세하고 풍부하여 사 료적 가치는 있으나, 문예물로서 흥미롭게 읽히기에는 지루한 서술 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차이는 센도오코오(船頭港)에 관한 서술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해유록 에서 센도오코오에 얽힌 전설을 대화체를 사용해 흥미롭게 그린 것에 비해 일관 기 에서는 히데요시(秀吉)가 뱃사공이 목을 베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일본 문사와 교유한 사실을 빠짐없이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해유록 처럼 그들 과 나눈 감정적 교류나 인물의 내면적 진실성을 드러내는 서사적 필치는 보이지 않 는다.
제술관 직책은 대대로 문재(文才)가 빼어난 인물이 맡아왔기에 두 사람의 문학적 역량은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두 사행록은 체재와 서술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는 두 사람의 저술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유한은 해유록 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자하였으며, 독 자들을 의식하여 구성과 서술의 체계를 세우고 전설과 일화를 삽입하고 대화체를 적극 활용하는 등 문학적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문예성과 흥미성을 제고하였다. 이 에 비해 남옥은 전대 사행록을 집대성하고 다양한 정보를 빠짐없이 수록하고자 하 는 목적에서 일관기 를 저술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원중거의 승사록 을 검토하도록 한다. 먼저 구성과 관련해서 살펴보
면, 승사록 은 사행록의 일반적 체제인 편년체를 따르고 있는데, 세부적인 구성과 형식에서 해유록 과 유사성을 보인다. 그 첫째로 인문지리에 관한 정보가 일록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남용익의 부상록 에서 처음 시작되어 해 유록 에서 발전적으로 계승된 서술 방식인데, 승사록 역시 이러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부상록 이나 해유록 이 인문지리 정보를 해당지역에 도착하 는 날짜에 수록한 반면, 승사록 에서는 떠나는 날짜에 수록한 점이 다르다. 이것 은 신유한이 인문지리 정보를 서술단락을 구성하는 중요한 한 요소로 생각한 것에 비해 원중거는 승사록 의 구성 원리와는 관계없는 객관적 정보로 생각했기 때문이 라 여겨진다. 그래서 해유록 은 주요 기착지를 중심으로 비슷한 서술이 반복되지 만, 승사록 은 이런 정형성이나 규칙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해유록 이 반복되는 여정은 과감히 생략하고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날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서술한 것과 달리 모든 날짜를 빠짐없이 기록한 승사록 의 서술 방식은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서술은 많은 정 보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데는 유리하나 흥미성과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 다. 원중거가 이러한 서술 방식을 택한 것은 그의 실학적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고 생각된다. 일본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 신유한 은 학자라기보다는 문인으로서의 기질이 강하였기에 사행록에 문학성을 부여하기 적합한 서술 방식을 택한 것이다.
둘째로 승사록 에는 일본의 경치나 기물에 대한 서술에 비해 인물과의 교류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문사와의 필담을 그대로 옮겨 놓거나 교류의 장면을 재 현해 놓은 서술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해유록 에서 필담이나 대화체를 통해 인물 교류를 서술한 방식과 유사하다. 일본 문사와의 교류 양상을 일록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채택한 것은 해유록 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러 인물의 짧 은 대화나 일화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 해유록 에 비해 승사록 은 한 명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서술한 경우가 있다. 가령 아이노시마(藍島)에서 만난 카메이 난메이(龜 井南冥, 1743~1814)의 경우 아이노시마에 머문 20여일의 일기에 거의 매일 등장 하며 그와 나눈 필담도 5일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원중거는 젊은 나이임에도 총명 하고 빼어난 재주를 지닌 그를 몹시 각별하게 생각하여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기록 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승사록 에는 일본 문사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과 나눈 필담을 그대로 수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유록 에 일본 문사와의 우정이나 아 쉬운 작별의 현장을 그린 에피소드가 많은 것과 대비된다. 승사록 이 사행록 전반 에 걸쳐 교류의 사실적 전달에 치중했다면 해유록 은 이별에 관한 에피소드를 귀 로에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정서적 감흥을 전달하고자 했다.412) 요컨대 원중거는 정 확한 정보 전달에 치중하였고 신유한은 흥미로운 읽을거리로서 문학성을 부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