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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를 통한 ‘眞’의 구현

해유록 은 당대에 이미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였고, 후대에도 통신사행록 가운데 가장 널리 향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근대에 들어서는 사행록 가운데 백미라 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71) 이는 단순히 해유록 에 수록된 정보가 풍부해서만은 아니다. 문예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고금을 막론하고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인 력을 설명할 수 없다. 흥미로운 읽을 거리로서 해유록 은 어떠한 서사적 특징을 갖추고 있는가? 시간 순서에 따른 여정의 서술이라는 사행록의 천편일률적 서술과 비교할 때 해유록 서사의 두드러지는 점은 무엇인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진행하도록 한다.

해유록 의 서사적 특징 중 하나는 비교적 짧은 분량의 에피소드가 많이 삽입되 어 있다는 점이다. 편년체적 서술 방식을 따른 일록에 다양한 에피소드를 삽입하여 단조로운 서술에 변화를 주는 동시에 서술 대상의 특징과 개성을 여실히 담아내어 독자들의 생생한 체험을 유도한다. 형식과 내용의 층위에서 공히 문예성을 획득하 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여타 사행록과 대별되는 해유록 만의 개 성적인 면모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사기 열전의 수법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사기 열전은 대상 인물의 생애를 시간 순서에 따라 나열적으로 서 술하는 것이 아니라 작자의 의도에 따라 생애를 재구성하여 입전 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내주는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신유한이 선진고문을 열독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사기 의 형상성을 높이 평 가하였음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범수채택열전」을 읽으면 유장한 웅변을 하 고 싶어지고, 「형경전」을 읽으면 비수를 뽑으며 비가(悲歌)를 부르고 싶어지며, 「항 우본기」를 읽으면 큰 소리로 외치며 꾸짖고 싶어지고, 「이장군열전」을 읽으면 활을 당겨 선우(單于)를 쏘고 싶어진다고 하여, 훌륭한 문학 작품에는 작자의 정신이 투 사되어 있으며 독자는 천기(天機)를 통해 시공을 초월해서 여기에 감응한다고 하였 다.172)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독자는 텍스트의 어떤 면에 감응하게 되는가? 그것은 등장 인물이 모두 살아있는 듯이 느껴지는 생동감을 자아내는 서술이라 할 수 있다. 이 것을 신유한은 창조적 정신에 의한 ‘생동기백지진’(生動氣魄之眞)이라 표현하였 다.173) 이는 단순히 인물의 외양을 핍진하게 묘사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

171) 서론을 참조할 것.

172) 여기에 대해서는 본고 제2장 제1절에서 언급하였다.

173) “‘左丘ˎ公ˎ糓.’ 收秦火而置史曰‘馬遷·班固.’ 俱能嫡傳史家宗法而網羅千古事變, 言辭以 斐其文, 譬之善畫者摹寫人物, 亡論形色惟肖, 必以造化精神, 得其生動氣魄之眞, 然後斯

의 성격이나 인품 등 내면적 진실성까지도 아울러 표현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물이나 사건에 있어서도 외형적 재현이 아닌 내재된 진실성을 드러내어야 함을 의미한다.

해유록 은 사기 의 서술 방식을 원용하여 낯선 장소와 낯선 인물들, 그들과 관 련된 사건을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서술 대상의 개성적인 면모를 효 과적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문예성과 흥미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라 생각된다. 예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한다.

7월 17일 쓰시마에 머물렀을 때 신유한은 강백과 여러 동료들과 함께 뱃놀이를 떠났다. 20여리 쯤 배를 타고 나가니 서북쪽 모퉁이에 아름다운 곳이 있어 배를 대 었는데, 푸른 산이 하늘에 우뚝하였고 깎아지른 절벽이 보랏빛으로 둘러 있었다.

그 아래 바위는 거센 물결에 잠겼는데 절구 같기도 하고 쟁반 같기도 하여 발을 씻 거나 누울 만했으며 큰 나무와 기이한 풀이 울창하게 자라 있어 눈이 부셨다.174) 이때 신유한은 홀로 동자 한 명을 데리고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화전민으로 생각되 는 일본 백성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경험을 짧은 에피소드로 정겹게 서술하고 있 다.

내가 한 동자를 데리고 숲을 헤치고 갔다. 숲을 벗어나자 계곡이 나타났다.

협곡 가운데 민가 너덧 채가 있는데 띠 지붕에 대나무 울타리였다. 풀을 베어내 어 밭을 만들었는데 어떤 곳은 삼나무를 심었고, 어떤 곳에는 보리 밑동이 남아 있어 살림살이가 소소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밭둑에 서자 민가와의 거리가 열 걸음 쯤 되었는데 늙은 여인과 아이 두어 명이 나와 나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놀 라 외치고 웃으며 말했다. 남녀 아이들은 머리를 깎지 않고 머리 위로 묶은 것 이 우리나라 여름철 농촌 아이들과 똑같았다. 밭둑에 배나무가 있는데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배를 가리키자 사내아이가 바로 제집으 로 뛰어 들어가 긴 장대를 가지고 와서 배를 쳐 땅에 떨어뜨리더니 너덧 개를 주워줬다. 내가 인정(人情)이 있는 것을 반기며 씹어보았더니 맛이 없어 먹을 수 없었다.175)

合神品.”(「與任正言論文書」, 靑泉集 권3, 문집총간200, 285면) 송혁기 교수는 여기 에 주목하여 신유한의 인물 서사 두 편을 분석하여 인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규명 하였다. 송혁기, 앞의 논문, 19~32면 참조.

174) “高山揷翠, 斷壁籠紫, 其下雲根浸巨浪, 似臼似盤, 可濯可卧, 雜以奇木碩草, 蔚然光 目.”(7월 17일, 앞의 책, 439면)

175) “余夾一童, 穿林而往, 林開而轉出一峽, 峽中有民屋四五, 茅茨竹籬, 刈草爲田, 或種 麻, 或留麥根, 生事草草可想. 余立田畔, 去民屋十步許, 見老女童男數個出而指點驚呼笑 語. 童男不劗髮, 束在頭腦, 絶似我國暑月農家兒. 田畔有棃木, 結實纍纍, 余以手指之,

쓰시마는 대부분 산이라 논농사를 지을 수 없다. 어업이나 무역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 백성들은 화전을 일구어 살아간다. 신유한은 산속의 가난한 농가에서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일본의 백성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생전 처음 보는 낯 선 외국인의 모습에 놀라 소리치며 어른들을 부르면서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웃으며 떠들어대는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에서, 조선 아이들과 마찬 가지로 천진함을 간직한 시골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신유한의 시선이 느껴진 다. 그가 장난삼아 주렁주렁 열린 배를 가리켜 보이자 한 아이가 즉시 장대를 가져 와서 배를 따다 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한 잎 베어 물었더니 아무 맛이 없었다는 대목은 작은 반전이기도 하여 묘미가 있다. 농가를 방문하여 배를 하나 얻어먹었다 는 단순한 에피소드임에도 그 가운데 산골 아이의 천진난만함, 이방인에게도 선뜻 친절을 베푸는 일본인의 인정(人情)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서술이 전혀 억지 스럽지 않다.

여타 사행록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대체로 통신사를 접대하는 관원이거나 시문을 창수하는 문사들이며 일본의 하층민이나 민중에 대한 서술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들이 지닌 인간적인 면모를 포착한 점은 해유록 의 빼어난 성취가 아닌 가 생각된다.176) 다음은 일본 민중의 생활상을 더욱 밀착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 의 에피소드이다.

항구에서 절로 돌아가려는데 통사 한 사람이 나를 따라왔다. 길가에 두어 칸 되는 초가집이 깨끗하기에 나는 통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좀 쉬었다가세.”

통사는 곧 나를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가 조금 쉬기로 했다. 주인은 꽤 늙어 보였는데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자식은 있습니까?”

“자식은 없고 저희 둘 뿐입니다.”

“물을 좀 주시겠습니까”하고 청하자 노인은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차를 좀 내오시게.”

아내가 부엌에 들어가 찻잔을 씻어서 푸른빛이 도는 차를 따라 통사에게 주자 통사가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좌우의 항아리에는 햇곡식이 담겨있었고 마당에

童男卽走入其家, 持一長竹竿而打梨子落地, 拾四五以獻. 余喜其有情, 嚼之味薄, 不可 飡.”(같은 곳)

176) 이는 인간 본성의 보편성에 대한 신유한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 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론한다.

는 멍석을 깔고 나락 몇 말을 볕에 말리는 중이었다. 부엌 아궁이 위에 놓인 그 릇들은 몇 개 되지 않아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이들 부부가 사는 모습 은 퍽 즐거워 보였다.

집 옆에 돌을 쌓아 단을 만들고 소철 한 그루를 심어놓았는데 크기가 항아리 만하고 껍질은 철갑 같았다. 높이는 한 자가 못되었는데 잎은 파초보다 길었으 며 푸르고 억센 잎이 창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이 가지와 잎은 어디다 씁니까?”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다만 그 모양이 매우 기이하고 성질이 대단히 괴상해 서 말라 죽어가는 것을 뽑아서 지붕 위에 얹어 햇볕에 말린 다음 쇠못을 붙이면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소철(蘇鐵)이라 부르지요. 사람들이 관상용으로 많이들 심습니다.”

또 수려한 고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이름이 물푸레나무였다. 노인 말 로는 이 나무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된서리를 맞아야 비로소 꽃이 피는 데, 꽃은 복숭아꽃처럼 옅은 보라색을 띠며 향기로워 사랑스럽다고 했다. 오랑 캐의 풍속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데 하늘이 낸 식물 역시 이상한 게 많았 다.177)

조그만 섬의 시골집에서 노부부가 단란하게 사는 모습을 서정적인 필치로 묘사하 였는데, 단순히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신유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노인과 대화 를 나누도록 서술함으로써 서정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곡식 이 널려 있는 마당과 소박한 부엌의 정경을 묘사한 다음 “부부가 사는 모습은 퍽 즐거워 보였다”라고 한 데에서 노부부의 소박한 삶을 바라보는 신유한의 따뜻한 시 선이 느껴진다. 또 처음 보는 기이한 식물에 대해서도 평면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노인의 입을 빌려 그 외양과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경험을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문답을 주고받는 상황을 설정하여 하나의 에피소드로 만들어내었다.

이상의 두 에피소드는 이전의 사행록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일본의 민중들에 대한 서술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178) 그리고 피상적인 관찰로는 얻을 수 없는 대상의

177) “余自灣口向寺, 一通事從焉. 道傍有茅屋數間乍淨, 謂通事曰: ‘此屋可坐.’ 通事卽引 余入小憇, 主人年頗老, 與其婦幷居, 余問: ‘有子女乎?’ 曰: ‘無子女, 只此夫婦相對.’ 余 曰: ‘可得飮水乎?’ 卽顧謂其妻曰: ‘進茶.’ 其妻入廚, 洗盞酌靑茶, 給通事以進. 左右甁盎, 貯新穀, 塲內設席, 餔靑粟數斗以向陽, 廚竈器皿草草, 可計生事甚樂也. 屋傍築石爲壇, 植蘓鐵一本, 大如甕, 其皮如鐵甲, 高不能一尺, 而葉長於芭蕉, 蒼勁似戟, 離披四隅. 余 問: ‘此柯葉何所用?’ 倭言: ‘百無可用, 但其狀甚奇, 其性最怪, 枯者拔之, 置屋上乾曬, 着鐵釘卽蘓, 故呼以蘇鐵, 俗多培植翫好云.’ 又有古木秀而茂, 名曰‘木犀.’ 倭言此於秋冬 之交, 得嚴霜始花, 花淡紫似桃, 有香可愛. 蠻俗好怪, 天生植物, 亦多異.”(8월 10일, 앞 의 책, 4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