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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文化에 대한 이해

앞서 살펴봤듯이 해유록 에는 문명적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일본 문화의 독자성 을 비판하는 시각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질적인 문화를 있는 그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시각 역시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명시적이고 선언적인 형태로 기술된 것은 아니지만 이전 사행록에서 피상적 이고 즉자적인 반응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 비해서 진일보한 점이 없지 않다. 사 행 전의 통념과 편견이 그대로 견지되는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상의 균 열이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는 일본 문화에 대한 신유한의 인식을 중심으로 이러한 점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해는 좁은 의미에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지만, 나아가 타자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다른 나라의 제도·풍속·관습 등과 같은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받아들이는 인식태도를 가리키기는 의미로 확장해서 쓰기로 한다. 해유록 에는 일본의 문화나 제도의 드러난 현상을 피상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의 근원을 파고들어 밝히고자 하는 태도가 보인다. 이와 같이 이국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통찰이 나올 수 있고 나아가 반성적 성찰이 가능해진다. 신유한은 이전 통신사가 기록해 놓은 일본에 대한 학지(學知)를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관찰과 체험을 통해 이를 한 단계 심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사정을 반성 적으로 성찰하고 있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식의 양상을 의복, 가옥, 생활습관 등에 관한 기록에서 확인해보도록 한다.

해유록 의 「문견잡록」에는 관대(冠帶), 즉 공무 중에 입는 관복에 대한 학지(學 知)가 수록되어 있다. 1617년 이경직이 관복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래 거의 모든 사행록이 이를 따르고 있다. 의복, 그 중에서도 특히 관복에 대한 관심은 일본이 유교문명을 어느 정도 흡수했는가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문명 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유학에 입각한 정치의 내용과 형식을 두루 갖추 어야 하는데, 관복은 단순한 근무복이 아닌 유교정치의 이상이 투영된 것이기에 통 신사의 관심을 끌었다. 신유한은 전대 사행록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지식을 덧 붙이고 있다. 특히 이전 사행에서는 주목하지 않은 일본의 관복 바지에 대해 신유 한은 그 모양과 쓰임새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바지를 세 종류 로 구분하고 조선의 바지와 비교해가면서 그 생김새를 상세하게 묘사하였다.275)

275) 바지의 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袴制有三, ①必以靑白交織爲之, 制如我國女人四幅袴, 前後各有襞積而前三後二, 又有紐以結之, 上半則不縫, 而後面別付

리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관백의 성(城)의 집정(執政)과 측근들은 공복(公服)을 입는다. 나무 판을 댄 바 지를 입을 때는 바지가 짧아 꿇어앉기 불편하므로 두 다리 사이에 흰 베를 두어 자 늘어뜨렸다. 긴 바지를 입었을 때에는 그 길이가 발을 지나 한 자 남짓 더 나올 정도여서 땅에 질질 끌고 다녔다. 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슥슥 소리가 나고 자리에 앉으면 옷 때문에 어지러운데도 일본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을 공경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각 주 태수의 집에서도 섭정 이하의 신하들이 모두 이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그 법도가 이러한 것은 일본인들이 날래서 흉기로 사람을 찌르는 데 능하기 때문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변을 당할까 염려하 여 신하로 하여금 걸어 다니기 불편하게 하고 운신(運身)하는 데 장애가 있게 하여 대면한 자리에서 감히 일을 저지르지 못하게 한 것이다.276)

실제 조정에서 관복을 입고 활동하는 이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앞서 공복 (公服) 바지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운용되는 방 식에까지 관심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짧은 바지를 입은 경우에는 다리 사이로 흰 베를 늘어뜨렸고, 긴 바지는 발을 덮을 정도로 길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옷은 걸을 때마다 땅에 끌려 소리가 난다. 또 앉을 때 바지 자락이 늘어져 주위가 산만 해진다. 청각적, 시각적인 묘사를 동원해 일본 관복의 부산함을 눈앞에 보이는 듯 이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에 맞지 않으며 움직이는 데도 불편한 복장을 고수 하는 이유를 신유한은 일본인의 무사적인 기질, 습성에서 찾고 있다.

앞서 일본의 군사제도에 대한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유한은 일본 사회 도처 에서 보이는 군사문화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무가사회에서는 늘 하극 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의복을 통해 운신을 구속하

小版黑漆者, 長可五寸餘, 廣可二寸, 橫貼於腰, 爲帶樣, 此貴者之服. ②其次制如唐袴, 而其長過足曳地數尺, 諸倭之尊前盛服者着之. ③其次長不掩足而窄甚, 僅能容脚, 此下賤 者極寒時所穿也.”(「衣服」, 「聞見雜錄」, 앞의 책, 508면) 조선의 바지와 비교하면서 그 생김새를 상세히 묘사하였다. ①은 전대 사행록에 비해 치수와 모양, 착용 방법이 좀 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②는 이경직이 부상록 에서 “又着如唐袴者, 結束於腰, 此是尊前通用之服”(李景稷, 扶桑錄 , 10월18일조, 海行摠載 Ⅲ)라고 한 내용을 계 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③은 신유한이 확충한 내용이다. 지배층의 예복 바지가 몹시 긴 데 비해 일반 백성들의 바지는 짧고 좁다는 점이 대비된다.

276) “關白殿上諸執政入侍者, 着公服帶版之袴, 則袴短而跣, 故兩股間, 懸白布數尺從後垂 之, 着長袴則其長過足尺許, 曳地而行, 羣臣動作, 綷綷有聲, 紛亂席上, 而以此爲敬. 各 州太守之家, 其臣攝政以下又如此. 盖其法以倭俗輕趫, 勇於持刺, 爲君長者慮有變, 使之 行步不便, 運身有碍, 不敢生事於衽席之間矣.”(「衣服」, 「聞見雜錄」, 앞의 책, 508면)

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앞서 유교적 문명성을 기준으로 일본의 의관을 비판하면서 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관복 제도를 통찰하고 있는 사실은 흥미롭다. 관복이 라는 문화적이고 미시적인 사물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무가사회에 대한 분석으로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 여타 사행록과 구별되는 해유록 의 특징적인 면모라 하겠 다.

의복, 그 중에서도 특히 관복에 대한 관심은 일본이 유교문명을 어느 정도 받아 들였는가하는 문제와 관련되기에 일찍부터 통신사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전대 사행록에도 의복에 대한 학지(學知)가 꾸준히 수록되었지만 그 내용은 제한적이며 대동소이하다. 일본의 의복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17년 이경직이 쓴 부상록 (扶桑錄)에 처음 보이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일본의 의복은 조선 문인의 근무복인 단령(團領)과 비슷하지만 소매가 중이 입는 장삼처럼 넓고 섶이 없는 등 차이가 있다. 또 신분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카타기 누(肩衣)는 소매가 없으며 웃옷에 걸쳐 입는 예복이다. 아래에 입는 통이 넓고 주름 이 잡힌 바지를 하카마(袴)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 바지인 당고(唐袴)와 비슷하다 고 하였다. 도포처럼 입는 겉옷은 노후쿠(野服)라고 하는데 무릎에 닿을 정도로 짧 은 것이 특징이다. 일본의 역사서에, 일본에는 본래 의복제도가 없었는데 백제 아 화왕(阿花王: 재위 392~405) 때 여공(女工)을 보내어 옷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는 내용이 보인다.277)

이와 같은 내용은 이후 강홍중의 동사록 (1624), 김세렴의 해사록 (1636), 남 용익의 부상록 (1655), 임수간의 동사일기 (1711)에 이르기까지 대동소이하게 반복된다. 17세기 초에 형성된 학지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동 없이 계승되 어 오다가 해유록 에 이르러 비로소 확충되고 심화된 것이다.

또 해유록 에는 “세상에 전하기를, 일본에는 예전에 의복의 제도가 없어 사람들 이 모두 발가벗고 있었는데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 백제왕 아화가 재봉하는 여공 을 보내어 옷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비로소 의복을 입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말은 상고할 수 없다”278)라고 하여, 백제가 일본에 의복 제도를 전수해주었다는 이 경직의 언급이 후대에 계승되면서 고대 일본인이 모두 발가벗고 있었다고 와전되었

277) “衣如團領之制, 其袖廣如僧衫, 旁無衽制, 直縫而下, 至於兩旁下端, 縫帖一幅, 長可 四五寸許, 略如旁袵之制, 而張如箭羽, 帖縫衣腰前後七八寸許, 以垂之而已, 亦無所帶, 但其色有紅黑之差, 世族之人, 方許着黑, 若非世族, 則雖官高大爵之人, 皆着紅衣, 其次 曰‘肩衣’, 用兩幅爲單衫無袖, 倭言曰‘可當其婁’, 着此之後, 又着如唐袴者, 結束於腰, 此 是尊前通用之服. (…) 見其所謂 年代記 , 初無衣服之制, 百濟貢裁縫女工, 縫衣始此云 云. 百濟王阿花之時, 而實西晉 武帝之十八年也.”(李景稷, 扶桑錄 , 10월 18일)

278) “ 世傳日本舊無衣制, 人皆裸軆, 而晉 武帝時, 百濟王 阿花以裁縫女工之法貢遺日本, 始有服色云. 其言不可考.”(「衣服」, 「聞見雜錄」, 앞의 책, 5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