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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식의 양상과 의미

1. 역사적 기억과 적대적 인식

적대적 인식은 일본이라는 타자에 대한 즉자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이라 할 수 있 다. 통신사행록에는 일본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대개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다. 해유록 의 인식도 여 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신유한은 아이노시마(藍島)에 머물 때 거기서 멀지 않은 후쿠오카(福岡) 지역의 하카타(博多)를 떠올리며, “이곳은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충의(忠義)를 지키 다 죽은 곳이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사신을 갔다가 억류되었던 곳이 기도 하다”204)며 역사적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의 신하로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키고 대신 죽 었다. 해유록 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후대에 전하는 그의 행적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탈출시킨 후 붙잡혔는데, 일본 왕이 신하로 칭하면 높은 벼슬 을 주겠다고 하자, “계림국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고, 계림 국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을 수 없다”고 하며 거절하였다. 일본 왕은 노하여 다리 가죽을 벗기고 뾰족하게 베어낸 갈대 위를 걷게 하고, 뜨거운 철 판 위에 세워 놓고 박제상의 뜻을 꺾으려 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충의(忠義)를 지키 다 결국 불에 타서 죽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치술령에 올라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박제상의 부인이 결국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전설 역시 전한다.205) 이와 같은 이야기가 후대에 널리 전승되어 통신사의 일본 인식에도 일정한 영향 을 미치게 된 것이다. 신유한 역시 박제상에 관한 역사적 기억을 떠올리며 사행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유록 에는 박제상의 충절을 노래한 「하카타를 애도함」

(哀博多津)이라는 제목의 부(賦)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는 박제상의 충절을 기리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몹시 격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내비치고 있다. “옛날 공이 결심하기를 / 충언(忠言) 잊지 않기로 맹세했네 (…) 임금의 근심 풀어드릴 수 있다면 / 몸이 찢겨도 나는 꺼리지 않는다네 (…) 홀로 목을 내밀어 칼을 기다림이

204) “福岡十里外, 有博多津. 是新羅忠臣朴堤上死義處, 鄭圃隱先生奉使被留亦此地.”(8월 1일, 앞의 책, 443면)

205) 奇大升, 「天使許ˎ魏問目條對」, 高峯集 續集 卷2, 문집총간40, 271면에 관련 기사 가 수록되어 있다.

여 / 여기 하카타에 머물렀다네”206)라고 하여 박제상이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 고 충의를 지킨 사실을 부각한 다음, “여덟 얼굴 아홉 머리 천오(天吳)가 성내어 떠 들며 / 인육(人肉)과 뼈로 젓을 담갔네”207)라고 하여 일본인을 바다에 사는 귀신이 라 지칭하고 박제상을 잔인하게 죽인 것을 인육으로 젓갈을 담근 것에 비유하였다.

또 “치술령 높아 하늘에 닿는데 / 망부석 거기 있다네 / 어찌 저 괴물들과 짝할까 / 오랑캐 나라 이미 떠났도다”208)라고 하여, 박제상의 부인이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을 인용하고 박제상의 영혼이 이미 일본을 떠나 부인을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산해경 에 나오는 괴물, 귀신으로 표상되고 있다. 이 외에도 “흑치 (黑齒)가 다투어 충신(忠臣)의 창자를 씹었네”209)라고 하여 일본인이 박제상을 죽 인 일을 적대감이 가득한 어조로 읊고 있다. 흑치라는 말은 결혼한 여인이 이를 검 게 물들이는 일본의 풍습에서 온 말로 일본인을 가리킨다. 앞서의 논의에서도 드러 나듯이 신유한은 당대 일본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적 기억 속에서의 일본인은 귀신, 악귀, 괴물과 같은 극단적 인 비유를 통해 호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적대적 인식의 대상에는 임진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 吉, 1536~1598)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에도에 머물고 있을 때 아메노모리 호오 슈우(雨森芳洲)가 신유한에게, 조선의 문집에서 일본을 가리켜 ‘왜적’(倭賊)이니 ‘만 추’(蠻酋)니 하여 추하게 여겨 멸시하는 말이 많이 보이는데 어째서 그런지 따져 물 었다. 신유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본 우리나라 문집이 누가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임진란 후에 간행된 문집일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우리나라의 철천지 원수가 되어 종묘 사직이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생령(生靈)이 피를 흘리게 된 것은 실로 만고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백성들이 누가 그의 고기를 찢어 먹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천인(賤人)에 이르기 까지 ‘일본놈’이니 ‘왜적’이니 하는 말을 마구 하고 글로 쓴 것도 당연히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성조(聖朝)께서 백성을 인애(仁愛)하시어 관시 (關市)를 열어 물자를 통하고 또한 일본의 산하에 히데요시의 무리가 없다는 것

206) “昔公之約于志兮, 矢忠言以不忘 (…) 苟靈脩可以一開鬱陶兮, 雖體解吾不憚殃 (…) 羌獨厲吭而俟斧兮, 謇淹留此津之梁.”(8월 8일, 앞의 책, 445면)

207) “繄天吳八面九首倐忽揮呵兮, 得人肉爲醢以骨爲醬.”(같은 곳)

208) “鵄嶺㟼以造天兮, 傃貞石而偕臧. 豈肝楡奢比之可與耦兮, 超旣離夫蠻鄕.”(8월 8일, 앞의 책, 446면); ‘肝楡’와 ‘奢比’는 모두 산해경 에 나오는 귀신의 이름이다.

209) “黑齒競啄其衷腸.”(같은 곳)

을 압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어 친목을 도모하고 국서를 주고받아 신하와 백 성이 모두 그 덕을 우러르니, 어찌 감히 다시 묵은 원한을 끄집어내어 글에 나 타내겠습니까.210)

“고기를 찢어 먹고자”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은 일본인에 대한 원한과 적대의 감정 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적대적인 기억에서 벗어나 지금은 통신사행을 통해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뜻을 신유한은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당대 조선에서도 여전히 일본을 가리킬 때 ‘왜’라 하였고, 신유한 역시 해유록 에 서 일본을 가리켜 ‘왜’나 ‘만이’(蠻夷)와 같은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211) 그 역시 사행 도중 임진전쟁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일본인이 “요도가 와(淀江) 언덕에 진주도(晉州島)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임진년에 포로로 잡아온 사 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지금 하나의 마을이 되어 다른 성씨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당시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였다”212)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임진 전쟁의 원흉으로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신유한은 히데요시가 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전쟁을 즐기고 사치를 일삼았으며 백성의 고혈을 긁어 욕심을 채 웠던 인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가 도읍을 삼았던 오오사카 역시 그 유풍이 남아 온갖 사치와 향락이 넘쳐나는 곳이 되었다고 신유한은 생각했다.213) 히데요시에 대 한 적대적 감정으로 인해 상업의 중심지이자 물산의 집결지인 오오사카의 특성을 간과하고 그 번성함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적대적 인식이 이성적 인식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겠다. 히데요시에 대한 적대감은 사행 내내 신유한 의 의식에서 떠나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일본인이 히데요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 는지 유심히 관찰하였다.

210) “君所見我國文集, 未知何人所著, 然此皆壬辰亂後刊行之文也. 平秀吉爲我國通天之 讐, 宗社之耻辱, 生靈之血肉, 實萬古所無之變也, 爲我國臣民, 誰不欲臠而食之. 所以上 自縉紳, 下至廝隷, 奴之賊之, 語無顧藉, 發於文字者, 固當如此. 至于今日, 聖朝仁愛生 民, 關市通貨, 且知日東山河, 已無秀吉之遺類. 故遣使修睦, 國書相望, 大小臣庶, 咸仰 德意, 豈敢復提宿㤪, 見諸辭氣.”(「訟寃」, 「聞見雜錄」, 앞의 책, 529면)

211) 흥미로운 점은 당시까지도 일본인들이 스스로를 ‘왜’라 불렀다는 점이다. 기해년 필담창화집에는 일본인이 일본을 지칭할 때 ‘왜’라고 한 예가 보인다.

212) “倭言‘淀江之, 有名晉州島者, 乃壬辰俘獲晉州人而處之, 今其一村無他種.’ 令人想得 當時事, 毛髮悚然.”(9월 27일, 앞의 책, 465면)

213) “秀吉居大坂, 竆兵黷武, 剝人髓浚人膏, 以饜其侈慾, 庭塲草木, 至有範金布金之觀, 而侯國諸酋所交會, 則爲園宅舟車佚遊之娛, 競以侈靡相高, 引江海爲池, 曲曲彎抱, 石而 堤之, 若鎗罍屛幛鏡奩諸狀, 其上設橋以往來, 金舡畵舫, 簇簇從橋下逐水穿花, 沿泝東西 之勝, 故曰‘塘’曰‘沼’曰‘屋’曰‘町’, 其稱特秀之區, 不可盡記.”(9월 4일, 앞의 책, 459면)

어느 날 신유한은 호오슈우에게 “히데요시가 과거에 귀국의 임금이었으니, 그대 도 또한 그의 이름을 휘(諱)하고 악한 것을 숨기려는 생각이 있습니까?”214)하고 물 었다. 호오슈우는 자신의 조상 역시 히데요시에게 멸족을 당했으니 불구대천의 원 수라 하며, 히데요시는 시랑(豺狼)의 성품을 가지고 인간의 액운(厄運)에 감응하여 태어난 자라고 극렬하게 비난하였다. 다만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왜구가 명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혔는데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하여 이러한 폐단이 없어진 점이 단 하나의 공덕이라 하였다.215) 신유한은 이 말을 믿고,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할 때 기요마사(淸正)가 가장 흉포하였으므로 우리나라의 원수로 그 사람을 첫 손가락에 꼽습니다. 만일 그 자손이 관리나 백성이 되어 사관(使館)에서 창수(唱酬)하는 자리 에 나타난다면 얼굴을 마주보고 말할 수 없으니, 그대는 우리를 위해 그 사람을 가 리켜주십시오”216)하고 부탁하였다. 전쟁의 또 다른 원흉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 正, 1562~1611)에 대한 적대감 또한 숨기지 않고 있다.

그런데 막부는 공식적으로는 히데요시와 그가 일으킨 임진전쟁을 비난하면서도, 국내적으로 위광(威光)을 이용하여 일본 백성들에게 조선이 조공을 한다는 허구적 인 이미지를 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이부츠지(大佛寺)의 연회이다. 앞장에 서 검토하였듯이 연회를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은 다이부츠지가 히데요시의 원당(願 堂)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다이부츠지 바로 앞에는 임진전쟁 당시 일본군이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와 안장한 이총(耳塚)이 있다. 막부는 쓰시마 번 에 명하여 통신사에게 이총의 존재를 숨기고 반드시 이 앞을 지나도록 연출하였다.

통신사에게 이총과 다이부츠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통신사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었던 것이다.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은 풍신수길 보 (豊臣秀吉譜)에서 막부의 의도는 조선 사절을 이곳으로 인도하여 공양(供養)과 위령(慰靈)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 기록하고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쇼오군은 인군 (仁君)으로 포장되고 동시에 조선을 조공하는 나라로 연출하는 것이 본심이었 다.217) 통신사는 임진전쟁이라는 역사적 기억으로 인해 일본을 적대적으로 인식할

214) “余問雨森東曰: 秀吉旣爲貴國故君, 君亦有諱名諱惡之意乎?”(「訟寃」, 「聞見雜錄」, 앞의 책, 530면)

215) “彼其豺虺之性, 應天人厄運而生者, 故屠戮之慘, 不但貴國, 日本人赤族湛宗, 不可勝 記. 如僕高曾以上, 世爲雨森守, 以官爲姓, 而亦被誅夷, 一二孱孫, 逃死民間, 幸保餘卵, 每念其人, 實有腐心之痛矣. (…) 秀吉以前, 日本六十六州, 多有各立爲國而相攻擊者, 故 皇明時, 日本諸島之侵擾中國者, 種種未已, 諸公必於 明史 見之矣. 秀吉窮兵黷武, 盡爲 勘定, 若論其功, 有此而已.”(같은 곳)

216) “壬辰西搶時, 淸正最爲凶毒, 我國之讐㤪, 必首其人, 若其子孫爲官爲民, 來與於使館 酬酢之間, 則不可對面叙話, 君爲我的指其人.”(같은 곳)

217) Ronald Toby, 일본 근세의 ‘쇄국’이라는 외교 , 창해, 2013, 84~87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