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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록 의 구성에서 에피소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앞서 지적한 바 있 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면서 자세하게 서술되고 있는 대목은 양국 간의 외교적 갈등을 서술한 두 개의 에피소드이다.185)

첫 번째 에피소드는 쓰시마에서 관례적으로 베풀어져 왔던 쓰시마 도주의 연회에 서 제술관이 취하는 예법과 관련한 사건이고, 두 번째는 역시 관례적으로 행해져왔 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원당(願堂) 다이부츠지(大佛寺)에서 벌어진 연회 와 관련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사안이기에 신유한은 특별 히 심혈을 기울여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행연구에서 이 대목은 주로 사료로서 다루어졌으며 표현 형식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 대목은 해유록 가운데서도 문 예적 성취가 높은 부분이라 생각되어 여기서는 주로 서술 방식에 주목하여 검토하 고자 한다.

통신사는 6월 20일 부산포를 출발하여 첫 기착지인 쓰시마(對馬島) 사스나우라 (佐須浦)에 도착하여 도요사키(豊崎), 니시도마리(西泊浦), 센도오코오(船頭港)를 거 쳐 27일 쓰시마 부중(府中)에 도착하였다. 이날부터 7월 19일까지 23일 동안 신유 한은 쓰시마 부중에 머무르면서 쓰시마 도주(島主)가 베푼 연회에 참석하고 일본 문사들과 시문을 수창하였으며, 한가할 때는 풍광이 빼어난 곳을 답사하고 술과 음 식을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그래서 쓰시마에 머무는 동안 쓴 일록에는 생전 처음 보는 이국(異國) 땅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세밀하고 서정적인 묘사와 이국 땅에 대한 호기심과 찬탄을 서술한 대목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신유한은 6월 30일, 쓰시마 도주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는 문제로 뜻하지 않은 갈등을 겪게 된 다. 해유록 에는 이 사건의 전말을 제법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쓰시마 도주가 전례에 의거해서 제술관과 사자관, 화원을 부중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고자 한 데서 시작되었다. 도주는 제술관과 일본 문사들이 수 창을 하고 자신은 노고를 치하하며 포상을 내리는 형식의 연회를 원했다.

쓰시마 태수가 옛 의례에 의거하여 우리를 자신의 관아(官衙)에 초청하겠다고 하자 사신께서 나더러 가라고 하셨다. 내가 역관(譯官)에게 물었다.

“전례(前例)가 어떠한가?”

통역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185) 이 두 에피소드는 앞서의 에피소드들과는 달리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 사의 주요 사건에 가깝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의 문장을 사모하기 때문에 벌이는 연회일 뿐입니다. 태 수가 한가한 날이면 개인적으로 학사(學士)를 관아로 초청하여 쓰시마의 문사 (文士)들과 함께 글을 짓거나 필담을 나누게 하고 옆에서 그것을 봅니다.”

“태수는 글을 지을 줄 아는가?”

“모릅니다.”

“서로 만날 때 어떤 예를 취하는가?”

“제술관이 앞에 나아가 절을 하면 태수가 앉아서 읍(揖)을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따를 수 없었고 전례라는 것도 믿을 것이 못됨을 알았다. 그러 나 저들이 호의로 와서 초청한 일이고 사신들께서도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바람 에 그 자리에 가서 따지더라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갔다.186)

신유한과 역관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를 그대로 옮겨 놓아 현장감이 생생하게 느 껴진다. ‘舊事何如’, ‘太守能文乎’, ‘相見之禮如何’와 같은 단문의 질문을 연속적으로 제시하여 이제까지 연회에서 행한 의식이 예에 맞지 않음을 논쟁적으로 제시하였 다. 도주가 글을 지을 줄 아는지, 도주와 대면했을 때 인사를 주고받는 예법은 어 떠한지 역관에게 물었는데, 역관의 대답을 믿을 수 없다는 신유한의 독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물음은 뒤에 벌어질 극적인 사건을 암시하는 복선의 구실을 한다. 또 바로 사건을 서술하기에 앞서 쓰시마 부중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원근의 묘사를 동원하여 제법 길게 서술하여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신유한과 함께 간 사람은 역관 세 사람에 사자관과 화원 한 사람씩이었다. 신유 한과 당상 역관은 가마를 타고 나머지 사람들은 말을 탔다. 가마는 작으면서도 정 교하여 마치 밀실 같았다. 덮개가 있고 주렴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좌우에 있는 창 문을 모두 열고 닫을 수 있고, 가운데에 검은색 비단 요를 깔았는데 한 사람이 앉 거나 누울 수 있는 넓이였다. 또 안석에 기대앉아 책을 볼 수도 있었으며, 붓이나 벼루, 화로 같은 것도 들여 놓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가마를 메는 사람은 앞뒤로 각각 둘씩이었다.187) 이어서 가마 안에 앉아서 보는 쓰시마 부중의 풍경을 멀리서 부터 가까이 시점을 옮겨가며 묘사하였다. 부중까지의 거리는 10여 리쯤 되는데, 양쪽 높은 산에는 삼나무와 대나무, 귤나무, 유자나무가 많았고, 두 산 사이에 즐비

186) “島主以舊例, 將邀余於府中, 使臣俾余往, 余問譯官曰: ‘舊事何如?’ 曰: ‘是惟三韓文 藻, 爲日東所慕, 太守以暇日私燕學士於公府, 與府中文士, 泚筆縱談之, 太守得寓目焉.’

又問: ‘太守能文乎?’ 曰: ‘否.’ ‘相見之禮如何?’ 曰: ‘製述官進前拜, 太守坐而揖之.’ 已知 其言不可從, 舊例不可憑, 而業以好意來相遨.”(6월 30일, 앞의 책, 435면)

187) “余與堂上譯乘肩輿, 餘乘馬, 輿小而精妙, 便如一曲房, 有盖有簾, 有窓左右障, 可開 可闔, 中鋪黑錦褥, 容一人坐卧, 隱几看書, 筆硯罏缸皆可入, 舁者前後各二人.”(같은 곳)

한 인가는 기왓집과 판잣집이 반반이었다. 관리들의 사치스러운 집은 높은 담과 날 아갈 듯한 처마로 장식되어 있었다. 길 좌우에는 2층으로 된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아래층은 가게이고 위층에 난간이 있어, 구경하는 남녀들이 난간에 앉아 있었다.

부중에 도착하니 여러 문사들과 아메노모리 호오슈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필담을 나누고 차려 내온 음식을 먹자 곧 도주가 나온다는 전갈이 왔다. 이때 신유한은 통 역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연회의 의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는데, 그 장면이 자못 극적이다.

내가 용모를 단정히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청컨대 여러분은 편히 앉아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메노모리 호오슈우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기어이 나로 하여금 태수에게 절하게 하고 태수는 앉은 채로 소매만 들었다 말게 하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호오슈우는 전례가 그렇다고 했다. 그 때 내가 비로소 정색을 하며 이 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섬은 조선으로 치자면 주(州)나 현(縣)에 지나지 않습니 다. 이곳 태수는 조정의 임명을 받아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명령을 받아 행하니 우리나라로 치자면 지방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예조참 의(禮曹參議)나 동래부사(東萊府使)와 동등한 예로 외교문서를 주고받으니 그 등 급이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 법에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는 직위의 고하를 막 론하고 지방관과 더불어 한자리에 앉아 서로 경의를 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나는 문신으로서 저작랑겸전한(著作郞兼典翰)의 직함을 띠고 여기에 왔습 니다. 설령 직급이 사신보다 낮더라도 태수와 약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 니 빈주(賓主)의 자리를 피해서, 태수가 남쪽을 향하여 서고 나는 그의 앞에 나 아가 서로 마주서서 나는 두 번 읍하고 태수는 한 번 읍하기로 한다면 비록 태 수를 약간 높이는 일이 되기는 하지만 사신을 위하여 내가 특별히 한 등급을 낮 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태수가 앉아 있는데 내가 절을 하 는 것이 관례라고 하여 끝내 그대로 한다면 이는 임금이 지방관을 대하는 예법 과도 어긋납니다.”

이 말을 듣는 역관의 얼굴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였다.188)

188) “余斂容言曰: ‘請諸君安坐聽吾言.’ 雨森東曰: ‘何謂也?’ 曰: ‘君必欲使我進拜島主,

앞서 역관과 나눈 대화에서 암시되었던 사건이 연회의 의례와 관련한 외교 갈등 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마도의 도주도 조선의 일개 지방관과 같은 등급이니 아 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예를 올리는 듯한 예법으로 인사를 주고받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조선의 예법을 일본에 와서 고집하는 것 역시 융통성 없는 처신으 로 비쳐질 수도 있고, 무리하게 고집을 부리는 것은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 도 있다. 신유한은 이러한 점까지 충분히 고려하여 자신을 조금 낮추고 도주를 조 금 높이는 절충적인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건의 전말을 직설적 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역관과의 대화, 호오슈우와의 대화를 통해 장면화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전례를 따르려는 호오슈우와 전례가 잘못되었음을 주장하는 신유한 두 사람의 의견이 분명하게 제시되는 효과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행록에서 의론문으로 제시되었을 내용을 대화체를 통해 제시함으로 써 옳고 그름을 논하기가 어려운 미묘한 외교 문제가 명쾌하게 정리되었다. 또한 짧은 문장으로 서술할 수도 있는 내용을 일부러 자신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여 길 게 서술하여 독자들은 이 일이 대단히 중요하고 급박한 사안임을 실감하게 되는 것 이다. 특히 “그 때 내가 비로소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는 대목에서 신유한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이와 같은 생생한 대화를 통한 사건의 장면화는 인물의 개성을 형상화하는 데에도 일조하고 있다. 급박한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인물의 성 격을 대화의 어투를 통해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유한의 주장을 들은 호오슈우의 반응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그 자리에 있던 일본인 가운데 호오슈우만이 조선말을 알아듣고 발끈 성을 내며,

“우리들도 태수께 군신의 의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대의 말대로 감히 전례를 고칠 것을 여쭐 수가 없습니다. 두 나라가 우호를 맺은 이래 줄곧 이와 같은 예법 이 있었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폐지하려고 하니 우리를 업신여겨 그러는 것이 아닙 니까”189)라고 하며 일본 측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도리어 조선이 일본을 업신여긴 다며 논박하였다. 이에 신유한은 “예(禮)는 공경하는 데서 생기고 거만한 데서 사라

島主但坐而擧袂已乎?’ 曰: ‘故事然矣.’ 余始作色曰: ‘不然, 此島中不過如朝鮮一州縣, 太 守受圖章食朝廩, 大小請命, 有我國藩臣之義, 與春官侍郞ˎ東萊府伯抗禮而通書, 卽其班 級等耳. 國法京官之以事在外者, 勿論尊卑, 與藩臣合坐交敬, 今不佞文臣著作郞兼典翰而 來矣. 藉令職在使臣後, 視島主有乍分別, 且避賓主之席, 島主南鄕立, 我進前相向, 我再 揖而島主一揖云爾, 則此雖有偏重之嫌, 特爲使臣故而勉降一級耳. 若終以坐與拜爲例, 則 是使主人而失禮於藩臣耳.’ 言發, 譯官有恐色.”(위의 책, 436면)

189) “吾屬以島主羣臣, 義不敢用公言改禀, 而自兩邦結好以來, 卽有此禮,, 今欲一朝而廢 之, 得無慢我而然乎?”(같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