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同文意識의 형성

해유록 에 보이는 일본 인식의 양상 가운데 마지막으로 검토할 것은 ‘공감’이다.

공감은 ‘이해’에 비해 좀 더 정서적인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심리적 상 태를 유추하여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을 공감이라 정의할 수 있는데, 앞서 신유한과 일본 문사들이 이별에 즈음하여 보인 감정의 유로(流露) 역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감은 동감(同感)이나 연민에 비해서는 좀 더 객관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은 무엇 일까? 타자에 대한 공감은 쌍방이 공통된 인식의 지반에 서 있을 때 가능할 것이 다. 가령 전통적 화이관에 따라 자신을 화(華), 일본을 이(夷)로 간주한다면 둘 사 이에는 차별과 배제의 논리만 존재할 것이다.

신유한 이전 통신사가 일본을 대하는 시각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 로 보인다. 임진전쟁 이래의 적대감과 명나라 멸망 이후 강화된 화이의식(華夷意識) 이 일본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지연시킨 것이다. 그런데 신유한에 이르러 일본에 대한 인식 상의 전회(轉回)가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이는 동문의식(同文意識)316)으 로 가시화되는데 그 이면에는 인간의 윤리적 보편성에 대한 공감이 있다고 생각된 다. 윤리적 보편성에 대한 공감은 일본의 사회제도에 대한 인식에서 구체적으로 드 러나는바, 먼저 이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한다.

사회제도란 사회를 운영하고 유지하기 위해 제도적 혹은 관습적으로 지지되는 규 범을 말한다. 해유록 에 언급된 사회제도와 관련된 학지(學知)는 전제(田制)·관제 (官制)·군제(軍制)·천황제(天皇制)·신분제·천문역법·건축·관혼상제(冠婚喪祭)·종교·형 벌제도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군제·상례·형벌제도와 관련한 학지에서 전대 사행록과 구별되는 인식론적 전회가 드러난다. 먼저 군사제도에 관한 기술을 보도록 한다.

① 군사제도는 가장 정밀하고 강하다. 각 주의 태수는 다 무관(武官)인데 거두어 들인 전세(田稅)는 모두 군사를 육성하는 데 쓴다. 연급(年給)이 25석으로 다른 수입은 없다. 연급이 1백 석 이상인 장관(將官)을 두고 또 땅도 나누어 주어서 백성을 부리고 세금 거두는 것을 맡겨 마음대로 하게 한다.

장관이 된 자가 원래 정한 수량을 지키지 않고 온갖 수단으로 백성을 학대하

316) 전근대 동아시아의 유교문명권 내부에서는 漢字와 유교적 이상을 공유하는 구성원 간에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상호 소통하고자 하는 의식이 존재했던바, 이를 同文意 識이라 한다.

고 빼앗아 전부 거두어들이니, 각자 세금을 거두는 땅으로 그 부대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민의 고혈이 날로 다하여 군대에 들어가지 않고는 의식(衣食) 이 나올 곳이 없다. 그러므로 백성이 모두 힘을 다하여 자기를 팔아 장관의 부 대에 들어가려한다. 군사가 되면 그 몸을 감히 자유로이 하지 못하고 죽고 사는 것과 배고프고 배부른 것이 모두 장관의 손에 달려 있다.317)

② 한 번 겁쟁이라 소문이 나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상대하지 않고, 차고 있 는 칼이 무디면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는다. 칼이나 창에 베인 상처가 얼굴에 있 으면 용감한 사람이라 하여 녹(祿)을 받고 귀 뒤에 있으면 잘 달아나는 자라 손 가락질 받고 배척당하니, 대개 그 법령이 사람을 이렇게 몰아간 것이다. 의식이 따로 나올 데가 없으니, 그들이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의(義)를 위해서도 아니요, 타고난 성품이 그래서인 것도 아니다.

실로 자기 한 몸 살기 위해 그런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군사들은 복종하는 것 이 습성이 되어 일을 만나면 달아나는 이무기나 돌진하는 멧돼지와 같고, 적을 보면 등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이나 수레에 대항하는 사마귀와 같다. 장수는 비록 노둔하더라도 목숨을 바치는 군사를 얻을 수 있으며, 군사는 약하더라도 전쟁터 에 나가는 데는 용감하다. 이것은 비록 만이(蠻夷) 종족의 습성이라 하더라도 양 병(良兵)하는 방법을 얻었다 할 수 있다318)

①은 각 주의 수장인 다이묘(大名)가 막부와는 독립된 조세권(租稅權)을 가지고 자신의 영지를 다시 연쇄적으로 부하에게 분급(分給)함으로써 군사를 양성하는 일 본의 봉건제에 대한 설명이다. 영주가 독자적인 조세권을 가지기 때문에 백성에 대 한 수탈이 극심하며 따라서 백성은 디이묘의 군사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 적하고 있어 주목된다.

317) “兵制最爲精强, 各州太守皆爲武職, 而所入田賦, 悉爲養兵之具. 軍兵一人, 歲給廩二 十五石, 而無他繇, 置將官百石以上, 又割地以與之, 力役收稅, 任其自爲之. 將官者或不 拘於元定之數, 虐民萬端, 沒數輸入, 各以所賦之地, 養其部曲, 而平民之膏血日盡, 不入 於兵家, 則衣食無從而出. 故民皆竭力自售, 思託於將官部曲, 而旣許爲兵, 則其身不敢自 有, 死生飢飽, 皆在於將官之手.”(「兵制」, 「聞見雜錄」, 앞의 책, 513면)

318) “一名膽薄, 而到處不見, 劍佩差劣, 而人類不見齒, 刀鎗之痕在面前, 則指爲勇夫而得 祿, 在耳後則指爲善走而被斥. 蓋其法令之敺人如此, 而衣食之原, 無他路, 彼所以輕生敢 死者, 初非爲主慕義也, 又非天稟然也, 實爲自謀其身也. 是以平居軍卒, 服習成性, 遇事 則如奔蛟突豕, 見賊則如燈蛾轍螗, 將雖駑材, 而得士死力; 卒雖脆弱, 而勇於赴戰. 是以 平居軍卒, 服習成性, 遇事則如奔蛟突豕, 見賊則如燈蛾轍螗, 將雖駑材, 而得士死力, 卒 雖脆弱, 而勇於赴戰. 此雖蠻夷種落之本習, 而可謂得養兵之術矣.”(「兵制」, 「聞見雜錄」, 앞의 책, 513면. 번역문의 밑줄은 필자)

①에서 백성이 군사가 되지 않고는 의식(衣食)을 영위할 수 없다고 한 것을 이어 받아, ②에서는 일본 군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역시 의식 때문임을 강조 한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대에 편입되었고 결국 본래 선량했던 인간의 본 성을 사납게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병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애초에 의를 위해서도 아니고 타고난 성품이 그래서인 것도 아니”며 “실로 자기 한 몸 살기 위해서” 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과 유사한 구절이 임진전쟁 때 포로로 일본에 억류되었던 강항 (姜沆)이 지은 간양록 (看羊錄)에도 수록되어 있다. 강항이 일본 병사에게, “살기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나 물(物)이나 마음이 똑같은 법인데, 일본 사람들은 유독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하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319)하고 물 었는데, 일본 병사는 강항의 물음에 ①과 유사한 답을 하였다. 강항은 이 문답을 수록한 후 ②와 유사한 내용의 논평을 덧붙이고 있다. 강항에서 비롯된 일본인의 호전성에 대한 인식은 후대 사행록에도 유사한 내용으로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강항이 일본 병사에게 직접 들은 말이기에 신뢰할 수 있는 정보로서 후대 통신사에 게 받아들여졌고, 일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이러한 전형적 인식을 고착시킨 것으 로 생각된다.

해유록 역시 이러한 인식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자기대로 새로운 지식과 논평을 덧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해유록 은 비슷한 내용임에도 간양록 에 비해 진일보한 인식이 보이는바, 100여 년 간 이어진 일본인의 호전성에 대한 전형적인 인식에 균열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두 텍스트의 비교를 통 해 이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한다. 강항은 일본인의 호전성에 대해 다 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들은 독사의 독과 범이나 이리와 같은 탐욕으로 무력을 믿고 잔인함에 익숙 하니, 태연히 싸우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단지 타고난 천성(天性)이 이목(耳目)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뿐만 아니라, 그 법령이 속박하고 상벌(賞罰)이 몰아붙여서

319) “嘗問倭將倭卒曰: ‘好生而惡死, 人物同此心, 而日本之人, 獨好死惡生何也?’”; 이 물 음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日本將官榷民利柄, 一毛一髮, 不屬於民, 故不寄口於 將官之家, 則衣食無從出. 已寄口於將官之家, 則此身非我身. 一名膽薄, 則到處不見容, 佩刀不精, 則人類不見齒. 刀搶之痕在面前, 則指爲勇夫而得重祿, 在耳後, 則指爲善走而 見擯斥, 故與其無衣食而死, 不若赴敵而爭死, 力戰實爲身謀, 非爲主計也, 蓋其蛇虺之毒, 虎狼之貪, 阻兵安忍, 囂然好戰之心, 不惟得之天性, 慣於耳目, 而其法令又從以束縛之, 賞罰又從驅使之. 故其將太半奴才, 而皆能得人死力, 其卒太半脆弱, 而皆能向敵爭死, 滿 萬不能敵者, 此奴之謂也, 而況於數十餘萬乎!”(姜沆, 「壬辰丁酉入寇諸將倭數」, 「聞見錄

」, 看羊錄 , 海行摠載 Ⅱ)

그런 것이다. 그 장수의 태반은 노둔하지만 죽을 각오를 한 병사를 얻을 수 있 으며, 그 병사는 태반이 연약하지만 대적하여서는 죽기를 다툰다. 만 명의 적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놈들을 말한 것인데, 하물며 수십 만명을 어떻게 당해내랴!320)

임진전쟁 당시 포로가 되었던 강항은 자신이 목도한 일본인의 잔인함을 독사, 범, 이리에 비견하면서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사무라이 계급 이 지배하는 일본 사회의 군사적인 규율이 인간을 그렇게 몰아갔다고 하면서도, 그 들의 타고난 본성이 사납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차마 저지를 수 없는 일들을 자행하는 일본 병사들의 모습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유학자로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전란을 직접 겪 으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에 일말의 의혹을 품게 된 것이다. 일본인은 타고 난 본성이 사나운데 그것이 교화에 의해 순치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체질화 되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시각은 후대 김세렴의 동사록 (1636)에도 그 대로 계승되면서,321) 일본인의 성품에 대한 하나의 전형성을 만들어냈다고 생각된 다. 일본인은 타고난 본성이 호전적이며 군사제도에 의해 이러한 성품이 더욱 강화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신유한의 시선은 강항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신유한은 강항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이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주군을 위한 충성심도 아니고 오로지 자기 한 몸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책이라 하면서도, 그 호전성이 ‘타고난 성품’ 때문은 아 니라고 단정하였다. 강항의 논평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견해와 다른 부분은 주체적 으로 수정해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의 호전성에 대한 인식의 전회라 할 만한 신 유한의 이 발언은 일본을 교화의 상대 내지는 이성적 대화의 상대로까지 생각할 수 있는 인식론적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임진전쟁에서 18세기에 이르 기까지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본의 호전성에 대해 신유한은 한 걸음 물러 서서 상대화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유한은 일본의 백성들이 평소에 군사 훈련에 익숙해져서 성품이 변하 였기에, 전쟁이 일어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에게 달려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320) “蓋其蛇虺之毒, 虎狼之貪, 阻兵安忍, 囂然好戰之心, 不惟得之天性ˎ慣於耳目, 而其法 令又從以束縛之, 賞罰又從驅使之. 故其將太半奴才, 而皆能得人死力, 其卒太半脆弱, 而 皆能向敵爭死, 滿萬不能敵者, 此奴之謂也, 而況於數十餘萬乎!”(같은 곳)

321) 동사록 의 해당 부분의 원문을 보면 간양록 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蓋蛇 虺之毒虎狼之貪, 阻兵安忍, 囂然好戰之心, 不惟得之天性, 法令又從而束縛之, 賞罰又從 以驅使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