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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에 따른 서술 대상의 대비적 구성

일반적으로 통신사행의 여정은 크게 왕로와 복로(復路)134)로 나누어진다. 여정상 왕로와 복로는 동일한 지역을 지나가게 된다. 따라서 사행록의 서술은 일반적으로 왕로의 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복로의 경우는 간략하게 기록하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같은 지역의 풍경이나 여정을 반복해서 기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35) 그 런 의미에서 통신사에게 왕로와 복로는 동일한 공간의 반복적 체험일 뿐이다. 그래 서 사행록의 기록도 간략하게 처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공간의 서술도 어 떤 방식으로 축조하는가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을 수 있음을 해유록 은 보 여준다. 신유한은 왕·복로를 모두 수록하는 기존 사행록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그 내용을 달리하여 체계성을 갖춘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구성을 갖추고자 하였다. 여 기서는 왕로와 복로의 공간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축조되고 있으며, 그것이 해 유록 의 전체 구성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해유록 의 서술 대상은 크게 일본의 이국적 풍경, 경제적 번영상, 그리고 일본 인과의 교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자연’과 ‘도시’와 ‘인 간’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 세 요소가 해유록 내에서 아무렇 게나 뒤섞여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적절히 균형을 이 루면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풍경과 관련한 서술은 주로 전반부에 배치되어 있고 도시의 번영상을 보여주는 서술은 오오사카에서 에도까지의 여정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 문인과의 교류는 주로 에도를 떠나 부산포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 즉 복로에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를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136)

134) ‘복로’는 ‘귀로’와 같은 뜻이다. 귀로가 단순히 돌아오는 길을 뜻하는 것에 비해, 복로는 동일한 공간을 지난다는 의미가 강하다.

135) ‘회사록’(回槎錄)이라는 제목으로 아예 따로 분리해서 간략하게 기록하기도 한다.

따로 제목을 붙인 것에는 사행록의 본론에 해당하지 않는 별개의 기록이라는 의미 가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용익의 부상록 , 김지남의 동사일록 (東槎日錄) 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사행록 공히 복로의 날짜를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였 는데, 내용은 대개 시를 수록하거나 혹은 일정을 간략하게 수록하고 있다. 한편, 계 미사행(1764) 때 일어난 최천종 피살 사건과 같이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일이 있는 경 우 복로의 서술 분량이 부분적으로 늘어나기도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136) 물론 해유록 의 서술이 이렇게 도식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앞 절에서 밝혔듯이 왕로의 각 서술패턴 안에도 풍경을 묘사한 단락, 인물교류를 서 술한 단락이 존재한다. 그러나 서술의 비중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된다.

왕로의 경우 지리적 특성이 서술에 반영된 것일 뿐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다고 볼

往路 復路 對馬島 - 大阪 大阪 - 江戶 江戶 - 對馬島

이국적 풍경 도회지의

번영상 일본인과의 교류

自然 都市 人間

이러한 안배를 통해 ‘자연-도시-인간’이라는 여행의 세 요소가 단계적으로 서술 되어 해유록 을 체계성과 유기성을 갖춘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직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을 단순한 서술 대상의 변화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서술 의 진행에 따라 여행의 심급이 점차 깊어진다는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말 하자면 독자는 해유록 의 구성에 따라 일본의 여러 지역을 추체험하게 되는데, 단 계에 따라 체험의 양상과 심급이 달라진다. 쓰시마에서 오오사카까지의 여정에서는 도서지역 여러 섬들의 빼어난 풍광과 거기에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 발짝 떨 어진 관찰자의 입장에서 추체험하게 된다. 오오사카, 교오토, 에도와 같은 도회지의 서술은 주로 도시를 통과하는 내부자의 시선에서 이루어진다. 독자는 대상에 한 걸 음 다가가 그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인과의 교류를 통해 독자는 여행의 최종 심급이라 할 수 있는 인간적 교류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대 상의 외부에서 내부로, 자연에서 문명으로, 서술의 단계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먼저 일본의 자연과 도시에 대한 서술을 비교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① 산 위에 올라가니 어스름하게 석양이 지는 것이 보였다. 멀리 안개가 자욱한 물가를 바라보니 100리 밖 산의 희디흰 형상이 마치 흰 비단 띠나 옥가락지처 럼 한 치의 틈도 없이 아이노시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포구 건너편 어선들이 거 리에 따라 희미하게 보이기도 하고 뚜렷하게 보이기도 하였는데, 모두 거울 같 은 수면을 왔다갔다하여 또렷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산허리의 푸른 절벽이 바 다 속으로 꽂혀 있어 뭉게뭉게 피어난 구름이 파도 속으로 떨어질 듯했는데 솔 바람이 불어오자 마치 파도가 구름을 삼켰다 뱉는 듯했다. 신선이 산다는 십주 (十洲)에 아름다운 곳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만약 마고와 영랑이 손 잡고 이곳에 온다면 걸음을 멈추고 경치를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인 간 세상에 태어난 덕에 여기를 한번 둘러볼 수 있었으니 행운이라 하겠다. 휘파 람을 불며 길게 읊조리기를 한참 동안 하였다.137)

수도 있으나, 그것이 작품 내부의 구조적 특성을 설명하는데 유용하다면 분석의 대상 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137) “旣登, 暮色蒼然, 遙望烟渚百里外, 山容皎皎, 若白練帶. 又若玉連環, 與藍島作襟袍,

② 비단옷을 차려 입고 구경 나온 사람들이 오오사카에 비해 훨씬 많았다. 길 왼편에 멋진 2층 누각이 있었는데 도오지(東寺)라는 이름의 절이었다. 나는 그 것이 궁궐인 줄 알았다. 도오지를 지나자 금과 은으로 장식한 휘황찬란한 층층 누대와 화려한 건물이 보였는데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피로하고 눈에서 열이 나 몇 개의 거리를 지나왔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는데, 하늘에는 달 빛이, 그리고 땅에는 등불이 끝없이 이어진 덕에 수십 리 밤길을 가면서 천만 가지 기이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모두 세상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것들인지 라 너무나 황홀하여 마치 기이한 화초 가운데 서서 백금(白金)으로 지은 봉래산 신선의 궁궐을 보는 듯했다.

나도 이제 일본어를 익히 들은 터라 때때로 알아듣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자 주 일본인을 불러 차를 마시겠다고 하거나 담뱃불을 붙여 달라고 하거나 길이 몇 리나 남았는지 묻거나 하면, 그때마다 일본인들은 몹시 기뻐하며 대답해 주 었다. 줄지어 선 가게에서 차를 파는 여인들이 옥 같은 얼굴에 검은 귀밑머리를 하고 신선로를 어루만지며 차를 끓여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 이 완연히 그림 속의 사람 같았다. 거리에서 갑자기 쨍쨍하는 쇳소리가 들리기 에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물으니, 일본인들이 “밤이 깊으면 야경꾼들이 돌아다 니며 쇠막대기로 땅을 쳐서 경계를 합니다”라고 했다. 내 앞뒤로 우리나라 사람 얼굴이라곤 전혀 볼 수 없었다.138)

①은 신유한이 절경이라 극찬했던 아이노시마(藍島)의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다.

날마다 시를 써달라고 조르는 일본인들에게 시달려 우울했던 신유한은 동료들이 아 이노시마 서쪽 산의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와서 신선놀음을 했다며 자랑하는 소 리를 듣고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산책을 나갔는데, 이때 본 풍경을 그림 그

無尺寸虧缺, 隔浦漁㠶, 以遠近爲明滅, 皆從鏡面來往, 歷歷可辨. 山腰翠壁揷無底, 雲溶 溶欲墜波浪, 松風又發, 與雲水相呑吐, 吾未知十洲佳處有幾何, 卽令麻姑ˎ永郞輩携手而 至, 得不少踟躕瞻望乎? 自以偸桃宿緣, 獲此一轉眄, 亦幸矣. 因嘯咏久之.”(8월 8일, 앞 의 책, 445면)

138) “觀光男女錦繡之怰眼者, 比大坂不啻倍簁. 路左有二層樓縹緲半空, 名曰‘東寺.’ 余疑 其爲宮闕, 而過東寺, 見層樓寶閣金銀煌燿者, 又不可勝記, 神疲眼熱, 不自知歷過幾町, 而月色與燈光下上無涯, 宵行數十里, 閱得千萬奇觀, 皆非世間曾經, 恍惚若琪花叢裏, 見 蓬萊白金仙闕矣. 余旣熟聞倭語, 時有可解, 頻頻喚倭索茶飮, 燒靈草, 問道里, 倭輒大驩 而應. 列肆茶姬玉面鴉髩, 手按神仙罏, 煎茶以待者, 宛似畵中人. 有時街頭忽聞金鐵錚錚, 問是何聲, 倭言: ‘夜深則巡街者持鐵杖擊地以警云.’余惟目前背後, 了不見我國人顔面.”(9 월 11일, 앞의 책, 465~466면)

리듯 묘사하고 있다. ②는 통신사 일행과 떨어져 홀로 교오토의 밤거리를 거닐었던 경험을 서술한 대목이다. 신유한은 일본인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기분에 공감하 면서 한편으로 그 모습을 자세히 관찰, 서술하고 있다. 인용문은 모두 관찰자 시 점에서 일본의 자연과 도시의 경물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내질은 다르다. 아이노시 마의 묘사가 외부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정경을 객관적인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면, 교오토의 묘사는 도심을 활보하는 내부자의 시점에서 체험적이고 밀착적인 서 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두 인용문 공히 일인칭 시점에서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지 만, 아이노시마에서의 ‘나’는 서술적 자아에 가깝고 교오토에서의 ‘나’는 체험적 자 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작자의 경험의 심급이 한 단계 깊어짐에 따라 독자 역 시 일본의 새로운 면모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해유록 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본인과의 교류와 관련된 내용을 복로에 집중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일본에 대 한 좀 더 심층적인 인식이 가능하도록 했다. 타국에 대한 이해는 그곳에 살아온 사 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좀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유록 의 빛나는 지점은 이전의 다른 어떤 통신사행록보다 인물 교류와 관련한 서술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문화교류를 전담하는 제술관이라는 직책상 신유한은 일본의 많은 문사들과 시문을 수창해야 했다. 그는 일본 문사의 문학적 역량에 대해서는 대체로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그 가운데 몇몇 빼어난 문인 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문학적 수준과 관계없이 인정(人情)으로 써 마음 깊이 교류한 인물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인적 교류의 실상이 복로의 서술 에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언어나 국적, 문화적 수준의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 정서에 기반한 소통이라는 좀 더 깊은 수준의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런 점에서 해유록 이 여타의 사행록에 비해 울림이 큰 문학 작품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당시풍의 시로 이름을 떨쳤던 도리야마 시켄(鳥山芝軒, 1655~1715)139)에 대한 평가에서 신유한이 일본 문인과의 교유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도리야마 세키후(鳥山碩夫: 碩夫는 그의 字-인용자)의 문집 지헌집 (芝軒集) 을 읽어보니 대체로 외롭고 신산하면서도 교묘하고 치밀하니, 그가 부귀한 처 지에 있으면서 곤궁한 데 마음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139) 이름은 스케히로(輔寬) 자는 세키후(碩夫), 호는 시켄(芝軒)이, 통칭(通稱)은 사다 유우(佐太夫)이다. 교오토 후시미(伏見) 출신으로 오오사카에서 활동했다. 당시(唐詩) 에 뛰어났으며 저작으로 지헌음고 (芝軒吟稿), 지헌략고 (芝軒略稿), 패관자원 (稗 官字苑), 화산거초 (和山居草)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