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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록 전통의 계승과 창신

해유록 이전에 작성된 통신사행록 가운데 현전하는 것은 모두 21종이며, 피로 (被虜) 기록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371) 이 가운데 문예성이 비교적 높거 나 신유한이 많이 참조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우선 남용익의 부상록 은 해유록 에서 거론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유록 의 독자적인 구성과 체재를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수간의 동사일기 는 문예성은 그리 높지 않으나 기해사행의 불과 8년 전에 이루어진 기록으로 신유 한이 당연히 참조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두 사행록을 비교 대상으로 삼되 필요 한 경우 다른 사행록도 활용하고자 한다.

먼저, 구성에 대해 비교 검토해보도록 한다. 앞서 살핀 해유록 의 독특한 구성 은 전대 사행록의 참조 하에 새로이 창신한 점이 적지 않다. 해유록 이 전대 사행 록과 대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의도적인 서술의 정형성 내지는 규칙성, 곧 서술패 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패턴을 구성하는 여러 서술단락 가운데에서도 인문지리 정보의 삽입이 가장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문견록에 수록될 법한 인문 지리 정보를 일록에 삽입함으로써 기착지 중심의 서술이 가능했던 것이다. 해유록 에서 인문지리 정보를 일록에 수록한 구성은 전대 사행록 전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남용익의 부상록 에서 처음으로 기착지의 인문지리 정보에 주목하였던바, 해유 록 은 이를 계승·변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용익 이전의 사행록에서 인문지리 정보가 수록된 예는 1643년 사행 당시 작성된 조경(趙絅)의 동사록 (東槎錄)이 있 다. 조경은 「일본의 세 도읍에 관한 글」(倭國三都說)이라는 제목 아래 교오토(京 都), 오사카(大阪), 에도(江戶)와 관련한 인문지리 정보를 수록하였다. 이 인문지리 정보는 조선과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일본 도회지의 발달상을 기록하는 데에서 시

371) 저자와 책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宋希慶의 日本行錄 (1420), 金誠一의 海槎錄 (1590), 黃愼의 日本往還日記 (1596), 慶暹의 해사록 (1607), 吳允謙의 東槎上日 錄 (1617), 李景稷의 扶桑錄 (1617), 朴梓의 東槎日記 (1617), 姜弘重의 東槎錄 (1624), 任絖의 丙子日本日記 (1636), 金世濂의 해사록 · 槎上錄 (1636), 黃㦿의 동사록 (1636), 趙絅의 동사록 (1643), 申濡의 해사록 (1643), 저자 미상인 繫縻 東槎日記 (1643), 南龍翼의 부상록 (1655), 趙珩의 扶桑日記 (1655), 洪禹載의 東槎錄 (1682), 金指南의 東槎日記 (1682), 任守幹의 東槎日記 , 金顯門의 東槎錄 (1711). 이외에 피로 기록은 鄭稀得의 해상록 , 강항의 看羊錄 이 있다.

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용익은 관심을 확장하여 통신사의 주요 기착지의 인문지리 정보에 주목하여 「문견총록」에 「도리」(道里)라는 항목을 따로 두어 통신 사가 머물렀던 지역의 인문지리 정보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쓰시 마, 오오사카, 교오토, 에도 등 오래 머물렀거나 문물이 번성한 도시의 경우 「도리」

의 기록을 가져다가 일록에 수록하여 지역적 특성을 부각하고자 하였다.

인문지리에 대한 관심과 서술은 이후 사행록에서 보이지 않다가 해유록 에 이르 러서 비로소 발전된 형태로 계승되었다. 부상록 이 객관적 정보를 자세하게 기록 하는 데 치중했다면 해유록 은 필요한 부분에 인문지리 정보를 적절하게 재배치함 으로써 지역과의 연관성을 부여하고 맥락화하여 정보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였다.

아울러 정보의 기록 방식에 있어서도 무미건조한 설명문에서 탈피하여 설명·묘사·

서사·일화 등의 글쓰기 방식을 적극 활용하여 서술의 묘미를 살리고자 하였다. 이 처럼 부상록 에서는 인문지리 정보가 부차적인 정보로 수록되었던 것에 비해 해 유록 에서는 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활용되었던바, 전대 사행록의 체재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해유록 의 「문견잡록」의 체재 역시 부상록」의 「문견별록」을 계승하고 있다. 「 문견별록」의 체재를 살펴보면 이전 사행록의 체재를 변형하여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고자 한 고심이 엿보인다. 기존의 문견록이 일록의 마지막에 부기되어 있거 나,372) 항목별로 소제목을 달지 않고 서술하였던 것에서 나아가 내용을 분류하고 소제목을 달아 체계성을 부여하고 있다. 「문견별록」의 서문에서 남용익은 “신(臣)이 먼 섬 나라로 봉명(奉命)하고 갔을 때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면서 그 지방의 사 적들을 주워 모아 예람(睿覽)에 우러러 대비하는 것이 신이 맡은 직책입니다”라고 하여 자신의 임무를 분명히 밝힌 후 “말이 통하지 않고 문헌으로 징험할 수 없어 겨우 견문한 것을 모아서 일기 외에 별도로 한 책을 따로 엮었으니 모두 10건입니 다”373)라고 하였다. 견문한 사실에 체계성을 부여하여 별도의 독립된 저술로 완성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10건’의 소제목은 왜황대서(倭皇代序), 관백차서(關 白次序), 대마도주세계(對馬島主世系), 관제(官制), 주계(州界), 도리(道理), 산천(山 川), 풍속(風俗), 병량(兵糧), 인물(人物)이다. 그 중 ‘풍속’은 다시 성습(性習), 잡제 (雜制), 문자, 궁실, 의복, 음식, 원림(園林), 축산, 기용(器用), 절후(節侯)의 10조로 세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신유한은 이와 같은 부상록 의 체재를 따라 「문견잡록」

의 내용을 23개로 분류하고 각 항목에 제목을 붙였다.374) 연대표의 성격을 지닌

372) 경섬의 해사록 이 그러하다.

373) “臣奉命絶國, 歷遍水陸, 採摭一方事蹟, 仰備睿覽者, 是臣之職, 而語音不通, 文獻無 徵, 僅聚其獵聞謏見, 乃於排日記行之外, 別作一錄凡十件, 取以進止.”(南龍翼, 「聞見別 祿」)

왜황대서, 관백차서, 대마도주세계를 제외한 나머지 항목과 해유록 의 「문견잡록」

의 항목을 비교해보면 해유록 이 기본적으로 부상록 의 체재를 따르면서 좀 더 세분화하여 항목을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타 문견록과 대별되는 서술 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견잡록」에 대화체 와 일화를 대거 수록했다는 점이다. 이전의 사행록에서 문견록은 객관적 정보를 나 열하는데 그쳤는데 해유록 에서는 일본인 통사 내지는 아메노모리 호오슈우와 나 눈 대화를 직접 제시하고 있다. 가령 상례와 관련한 정보를 제시할 경우, 부상록 을 포함한 전대 사행록에서는 대개 일본에 상례가 없어 사람이 죽으면 나무통에 넣 어 매장하고 언어와 음식이 평소와 다름없다는 단편적인 정보를 전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런데 해유록 에는 모친 상을 당한 일본인 통사(通事)가 유교식 상례를 치 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일화가 대화체로 제시되어 있어 서술에 생기를 더하 고 유교적 상례와 일본 고유의 상례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본인의 내면이 효과적으 로 그려지고 있다.375) 아울러 새로운 정보를 제시하고 전대 사행록의 오류를 바로 잡는 근거로 대화체가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어떤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대화를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1차정보로서의 객관성을 높일 수 있는 이득을 거두기도 한다.

이외에도 서사적 특징 가운데 장면 확대를 통해 외교 갈등을 소설적 수법으로 서 술한 것은 해유록 의 문학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376) 전대 사행록에서도 외교 갈등의 전말을 기록할 때 일본 측 관원과 통신사의 견해 차이를 대화체를 사용하여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전 사행인 신묘사행의 부사 임수간이 지은 동사일기 의 서술과 비교해도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신묘 사행 때 일본은 회답서에 중종의 휘(諱)를 써서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통신사가 이 를 고쳐 줄 것을 요구하자 일본 측은 조선의 국서도 쇼오군의 휘 중 한 글자를 범 했다고 트집을 잡으며 거절하였다. 결국 통신사는 일본 측과 타협하여 양국의 국서 를 고치기로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정사인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은 관직을 삭탈 당하고 문외출송 되었다. 동사일기 에는 이 사건을 「국서 고치기를 요청한 일의 시말」(國書請改始末)이라는 제목 아래 신묘년(1711) 11월 11일에서 이듬해 2

374) 각 항목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封域, 山水, 天文, 物産, 飮食, 衣服, 宮室, 淸潔, 官制, 田制, 兵制, 風俗, 邦域, 文學, 理學, 禪家, 醫學, 女色, 外俗, 訟寃, 動靜, 源碑, 夢驗. ‘원비’는 에도 막부 3대 쇼오군 德川家光(도쿠가와 이에미츠)의 異母弟인 保科 正之(호시나 마사유키, 1611~1673)가 찬술한 二程治敎錄 , 三子傳心錄 , 玉講附 錄 에 서문을 써주게 된 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375) 이 일화는 제4장 제1절에서 분석하였다.

376) 제4장 제3절을 참조.

월 25일까지의 일기를 따로 기록해 놓았다. 다음은 그 가운데 양측의 갈등이 극에 달한 순간의 대화 장면이다.

“이 국서는 사신이 결코 받아갈 수 없는데, 모레 어떻게 출발할 수 있겠는가?

비록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며 구박하더라도 결코 출발할 수 없다.”

봉행 등이 이렇게 말했다.

“국왕이 도주를 엄하게 독촉하여 반드시 모레 출발하도록 할 것입니다. 만약 출발하지 못한다면 도주는 마땅히 중죄에 처할 것입니다. 일이 만약 이 지경에 이른다면 무엇에 의지하겠습니까? 일이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를 것이니 실로 안타깝고 민망합니다. 국왕께서 하신 바가 마땅한 일인지 모른다 해도 도주는 다시 힘쓸 여지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신은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이 국서를 가지고는 문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 지 않겠다. 진실로 목숨도 아끼지 않는데, 어찌 다른 것을 근심하겠는가?”

봉행은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이런 지경에 이른다면 피차의 신의는 끊어지는 것입니다. 사신께서는 비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하시지만, 양국이 우호를 잃고 나면 두 나라의 무고한 백성은 장차 도탄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어찌 여기에까지 미치 지 못합니까?”

나는 이렇게 답하였다.

“그대들이 무릇 문제 거리가 있으면 항상 화친을 잃는 것을 말하니 몹시 잘못 된 일이다. 도주를 보고 면담할 것이니 그대들은 물러가라.”

이에 봉행 등이 마침내 일어나 나가버렸다.377)

외교 갈등을 사행록의 주요한 내용으로 간주하여 집중적으로 서술한 것은 해유 록 과 같으나 서술 방식은 사뭇 다르다. 여기서의 대화체는 필담을 그대로 옮겨 놓 은 듯 무미건조하다. 해유록 과 같이 단문을 연속적으로 제시하여 논쟁적인 어투

377) “‘此國書使臣決不可受去, 再明何可發行乎? 雖至於撤供驅迫之境, 斷不可行矣.’ 奉行 等曰: ‘國王嚴督島主, 使之必行, 再明若不發行, 則島主當有重罪. 事若至此, 何所顧籍 乎? 事將至於難言, 實爲切悶矣. 國王所爲, 未知得當, 而島主則更無容力之地矣.’ 答曰:

‘使臣雖死, 不可持此國書, 出門外一步地. 死固不惜, 他何足恤乎?’ 奉行等曰: ‘若至此境, 誠信絶矣. 使道雖不畏死, 失歡敗盟之後, 兩國無辜生靈, 將入於塗炭, 豈不念及於此乎?’

答曰: ‘君輩凡有爭端, 每以失和爲言, 極爲非矣. 當見島主面言, 君輩姑宜退去.’ 奉行等 遂起出.”(任守幹, 「國書請改始末」, 東槎日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