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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기 통신사행록과의 비교

기해사행 때의 사행록 가운데 현재 전하는 것은 해유록 외에도 정사(正使) 홍 치중(洪致中, 1667~1732)이 쓴 동사록 (東槎錄)과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참여 했던 정후교(鄭后僑, 1675~1755)의 부상기행 (扶桑紀行), 종사관(從事官) 군관(軍 官)으로 참여했던 김흡(金潝, ?~?)이 쓴 부상록 (扶桑錄)이 있다.387) 홍치중, 정후 교, 김흡, 세 저자는 신유한과 동일한 시공간을 경험했지만 각기 맡은 직책이나 문 학적 역량, 창작 의식이 상이하기에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과 기록하는 자세 역시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세 사행록과 해유록 을 비교함으로써 해유록 의 형식적 특징과 내용의 특이성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전반적인 구성에 대해 비교 검토한 후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앞서 검토했듯이 해유록 의 독특한 구성은 전대 사행록의 구성과 체재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세 사행록은 전대 사행록의 구성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정후교의 부상기행 은 2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권 (上卷)에는 일기가, 하권(下卷)에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시와 일기를 분리하여 수 록하는 방식은 김세렴(金世濂)에서 비롯되었다. 김세렴은 일기와 시를 해사록 (海 槎錄)과 사상록 (槎上錄)으로 각기 분리하여 수록하였는데 정후교는 이러한 구성 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부상기행 에서는 문견록을 따로 항목화하여 서술하지 않고 일록(日錄)의 마지막에 간략하게 부기하였으며 분량 역시 1장 남짓 정도로 몹시 짧아 전대 사행 록의 문견록에 비해 몹시 빈약하다. 전대 사행록에서는 일본의 지리·정치·경제·문 화·물산(物産) 등에 대한 학지(學知)를 정리하여 항목화하고 사행록의 말미에 독립 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학지(學 知)는 사행이 거듭됨에 따라 축적되어 18세기 후반 화국지 (和國志)와 같은 일본 에 대한 종합적인 저술이 탄생하기에 이른다.388) 이런 점에서 볼 때 문견록은 사행 록의 구성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부상기행 은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 저자인 정후교가 자제군관의 신분으로 참여했기에, 홍치중이나 신유한과 달 리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적정을 탐색하여 기록하는 의무에서 비교적 자

387) 이 세 사행록은 해행총재 에 누락되어 있어 선행연구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 다. 부상록 (국립중앙도서관본)은 초서로 되어 있는데 信原修이 雨森芳洲と玄德潤 , 東京: 明石書店, 2008에서 전문을 탈초하여 수록하였다. 零本이며 내용도 소략하 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동사록 과 부상기행 을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388) 박희병, 「조선의 일본학 성립」, 한국문화 제61집, 2013; 남송우·정훈식, 「朝鮮後 期 通信使行錄 所在 見聞錄의 展開 樣相」, 한국문학논총 제50집, 2008을 참조.

유로웠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홍치중의 동사록 역시 2권 2책으로 부상기행 과 분량이 비슷하다. 그런데 동 사록 에는 해유록 이나 부상기행 과 달리 시(詩)가 한 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동사록 이 주로 공적인 기사(記事)를 기록한 보고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저자인 홍치중은 정사(正使)의 직책을 맡아 사행을 총괄하여 이 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개인적인 시각이나 감상을 일부러 배제하고 외교적 사안을 위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기록은 공적인 기록물로 조정에 보고되며, 후대에 사행을 떠나는 이들은 이를 통해 당대의 의례나 절차가 전대와 달라진 점은 없는지, 전대 사행에서 갈등이 있었다면 이를 어떻게 피할 것인가 하 는 등 사행과 관련한 실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동사록 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사록 의 내용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외교적 의례와 관련한 기록이 다. 이러한 공식적 기록물로서의 성격은 호행대차왜(護行大差倭)나 집정(執政) 등 일본의 실무자로부터 받은 서계(書契)나, 공식 일정과 관련된 일본인 통사(通事)의 말을 그대로 수록하고 있는 것389)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사관(使館)에 머물 때 일본 측에게 받은 일공(日供)과 하정(下程), 각지의 다이묘오(大名)가 보내온 물품을 상세하게 기록하거나, 전대 사행의 등록(謄錄)이나 사행록을 참조하여 의례나 의전 (儀典) 등 외교적 사안이 전대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혹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면밀하게 따지는 대목390)도 해유록 이나 부상기행 에 비해 공적 기록물로서의 성격이 뚜렷한 동사록 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홍치중이 외교 의례나 공급되는 물품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은 바로 전 사 행인 신묘사행과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 측에서 통신사행을 총괄하여 지휘한 인물 이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인데, 그는 통신사 빙례(聘禮) 개혁을 통해 통신사 접 대에 소요되는 예산을 대폭 축소하였으며 의례도 간소화하거나 막부를 우위에 두는 형식으로 개정하였으며, 조선의 국서가 쇼오군의 휘(諱)를 범하였다고 하며 국서를 개찬(改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후 하쿠세키가 실각하면서 의례는 다시 원

389) 5월 3일조, 5월 5일조에는 護行大差倭의 편지를 수록하였고, 7월 25일조에는 江 戶의 執政이 일본어로 통신사에게 보낸 편지를 한문으로 번역해서 수록하였다. 이외 에도 사행 의례와 관련하여 일본 측 通事가 한 말을 그대로 기록한 대목이 곳곳에서 보인다.

390) 7월 19일조, 8월 18일조, 8월 19일조에서 신묘사행과 비교하며 의례가 적절한지 상고하였고, 10월 3일조, 10월 7일조, 10월 11일조에는 임술년(1682)의 前例와 비 교하며 기해년의 의례가 적절한지 따져보는 내용이 보인다. 한편 5월 28일조에는 임 술사행의 譯官이었던 金圖南의 일기를 참조했다는 기사가, 10월 1일조에는 역시 임 술사행의 역관 朴再興의 일기를 참조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래대로 복구되었지만, 홍치중은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쿠세키에 대한 홍치중의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다. 그는 당시 막부 의 태학두였던 하야시 호오코오(林鳳岡)와 하쿠세키를 비교하면서 호오코오가 조선 과 화평을 주장하는 반면 하쿠세키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하쿠세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391) 이는 해유록 과 대비되는 시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해유 록 에는 하쿠세키의 대조선 외교에 대한 비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유 한은 사행을 떠나기 전 하쿠세키의 시집(詩集)을 읽고 빼어난 문재(文才)를 칭찬하 며 사행 내내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해유록 과 필담창화집을 통해 확 인할 수 있다.392) 신유한이 일본 문사와의 문학적 교류를 전담하는 제술관의 직책 을 맡고 있었으며, 문학을 매개로 일본 문사와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지향이 강했기 에 간과하거나 놓쳤던 점을 홍치중은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직책에 따라 사행록의 글쓰기 방식이나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동사록 과 부상기행 의 구성과 관련하여 몇 가지 더 지적하자면, 첫째 두 사행 록은 해유록 과 달리 일본의 인문지리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경험적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일본의 인문지리 정보 는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지리 정보를 적재적소에 안배함으로써 구성상의 규칙성과 정형성을 만들어 낸 해유록 에 비해 문예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일본의 문사에 대한 서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유 록 은 여정을 시간 순으로 기록하되 ‘자연’과 ‘도시’와 ‘인간’의 세 단계로 구성하였 고, 특히 귀로에서 인물 간의 진정 어린 교유를 서술하는데 집중하여 편년체적 서 술이 지닌 무미건조함과 지루함을 의식적으로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상기행 과 동사록 은 일본 문사와의 교유에는 주목하지 않았으며393) 여느 사행록과 마찬 가지로 귀로를 왕로의 반복으로 간주하여 간략하게 서술하는 데 그치고 있어 편년 체적 서술이 지닌 한계를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

다음으로 논의를 구체화하여 부상기행 과 동사록 의 서사적 특징을 해유록 과 비교 검토해보도록 한다. 부상기행 의 서술은 주로 장면 묘사에 집중되고 있

391) 10월 4일조.

392) 해유록 의 自序 및 唐金梅所의 文集인 附韓人文 및 桑韓壎篪集 권9를 참조.

393) 부상기행 의 경우, 에도에서 하야시 가의 문인들과 수창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 만 수창의 장면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 해유록 과 같이 대화체를 써서 교유 의 현장을 실감나게 전달하거나 인물의 개성을 핍진하게 드러내는 서술은 보이지 않 는다.

다. 도서 지역의 경치나 도시의 누각(樓閣), 교각과 같은 건축물, 고기잡이와 같은 민중적 삶의 현장을 눈에 보이는 대로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 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낯선 곳의 흥미로운 광경을 묘사하는 데 유리하다. 가령 일본의 어민들이 고기를 잡는 장면은 다음과 같이 무척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8월 21일 아카마가세키(赤間關)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정후교는 동료의 제 안으로 일본의 어민들이 고기잡이 하는 것을 보러 해안가의 산기슭에 오른다. 건장 한 어부 몇 명이 배에 타더니 날듯이 바다로 나가 긴 그물을 던졌다. 잠시 후에 여 러 사람이 그물을 들자 “크고 작은 물고기가 공중에 날아올라 햇빛에 반짝이는 비 늘이 온 항구를 가득 채웠다.”394) 배에 싣고 온 물고기는 작은 언덕 같았는데 조금 큰 것은 광어·상어·농어·잉어였다. 대개 도미·갈치·숭어가 많았으며 이름 모를 물고 기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가운데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머리는 단지만하고 몸은 소만하고 눈은 붉은 빛이 나고 등지러미가 찌를 듯하고 성난 뺨에서는 돼지가 꿀꿀 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는데, 그 이름이 고등어라 하였다.”395)

그물 가득 물고기가 뛰는 광경이나 커다란 고등어에 대한 묘사는 무척 생동감이 넘치고 자세하다. 이러한 묘사는 동사록 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반면 해유록 에 는 민중의 삶을 묘사한 대목이 종종 보인다. 앞서 제3장에서 검토했듯이 에피소드 를 통해 민중의 생활상을 그려낸 대목이나, 악부시를 통해 하층민의 삶을 묘사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신유한은 민중적 삶의 현장을 주로 소품문(小品文)의 필치로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 인상적으로 제시하는데 비해, 부상기행 에서는 위와 같이 장면 묘사를 통해 시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상의 차이는 두 사람이 선호했던 문체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신유한은 고문사를 추숭했던바, 일화를 병렬적으로 나열하여 다양한 측면을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 진한고문의 글쓰기 방식396)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쇼오군 요시무네(吉宗)의 검소함을 서술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해유록 에서는 에도의 인문지리 정보 가운데 요시무네의 일화를 삽입함으로써 서 술에 입체감과 생동성을 부여하고 있다.397) 그러나 부상기행 에서는, “듣건대 관 백은 키이 주(紀伊州)의 태수였다가 승통(承統)을 이었는데 검소하고 청정(淸淨)하 여 음악이나 사냥을 좋아하지 않고, 경전(經傳)을 읽기를 좋아한다.398) 늘 무명옷을

394) “大魚小魚飛躍空中, 鱗甲照耀日光, 一港晃然.”(8월 21일, 扶桑日記 卷上) 395) “中有一大魚, 其首如甕, 體大於牛, 目有赤光, 鬐鬛鱍刺, 怒頰豕豞, 殊可愕貽, 其名

‘高登魚.’”(같은 곳; 단, ‘貽’는 ‘眙’의 오자) 396) 하지영, 앞의 논문, 142~143면.

397) 여기에 대해서는 본고 제3장 제1절을 참조.

398) 해유록 에는 요시무네가 독서보다 사냥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부상기행 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