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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적 우월의식과 비판적 인식

앞서 신유한의 일본 인식 가운데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한 적대적인 인식을 검토 하였다. 전쟁의 원흉인 일본은 불구대천의 원수로 간주되었으며 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적대적 인식이 관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유한 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꼭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절에서는 적대적 인식과 다 른 층위에서 ‘비판적 인식’의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비판적 인식은 대상에 대한 부정적 관점이라는 점에서 적대적 인식과 유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적대적 인식이 즉자적이고 감정적 작용에 가깝다면 비판적 인식은 좀 더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판 단이라 할 수 있다. 이성적인 판단이라면 감정에 치우친 적대적 인식과는 달리 비 판의 기준과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신유한이 일본이라는 이질적인 사회를 인식하 고 판단하는 기준은 유교문명이라 생각된다. 당대 조선 문인에게 일본은 유교적 정 치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무위(武威)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나라라는 인식이 일반 적이었다.236) 신유한 역시 조선이 계승했다고 믿어졌던 유교적 문명성에 대한 자부 심과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일본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는 문명의식에 근거했다고 여겨지는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 검토하고 자 한다.

첫 번째로 선행연구에서도 지적되어 왔던바, 전통적인 화이관에 의거한 비판적 시각을 들 수 있다. 유교문명권에서는 문명의 여부에 따라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 하고 전자를 ‘화’(華) 후자를 ‘이’(夷)로 간주한다. 화와 이는 선진 대 후진, 문명 대 야만이라는 대립적 구도로 표상된다. 신유한의 일본 인식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전 통적인 화이관에 의거해 있다. 가령 쓰시마(對馬島)에 머물면서 쓴 시에서 신유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임금 40년 기해(己亥)에 今王四紀次屠維,

하늘 동쪽 구석에 사신(使臣)으로 왔네. 使臣奉節天東垂.

하늘 동쪽 멀고 궁벽한 미나모토 씨(源氏)의 나라 天東僻遠源氏國, 부상(扶桑) 가지에 금닭이 홰를 치네. 金雞搏搏扶桑枝.

말대가리 까마귀 주둥이 고래 이빨 같아 驩頭烏喙與鯨牙, 성나면 사람 잡아먹고 좋을 땐 화친하네. 怒則甘人歡可縻.

236)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안대회, 「임란 이후 해행(海行)에 대한 당대의 시각-통신사를 보내는 문집 소재 송서(送序)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제 35권 제4호, 2012를 참조. 이 논문에서는 18세기 일본 인식에 몇 가지 층위가 있음 을 밝히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적대적인 인식이 주된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어루만지는 것 어찌 어진 자만 할까 撫之伊何仁者能, 탕(湯) 때는 갈백(葛伯), 주(周) 때는 곤이(昆夷)가 있었네.湯有葛伯周昆夷.

근래 새 우두머리가 수교를 청하므로 邇聞新長請修交, 왕께서 사신 보내어 은혜로운 말 전하네. 王惟遣价通恩辭.237)

통신사행으로 일본에 왔다는 사실을 노래하면서 일본 열도 전체를 싸잡아 야만시 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일본은 중화문명의 발상지인 중국과는 멀리 떨어진 동쪽 변방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인은 말, 까마귀, 고래와 같은 짐승이 먹이를 먹듯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으로 표상되고 있다. 탕 임금과 주 문왕이 야만족으로 간주되 었던 갈백과 곤이를 섬기고 회유했듯이 아직 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한 일본을 교화 시키겠다는 문명적 자부심과 우월의식이 잘 드러난다. 이런 발언의 이면에는 조선 은 유교문명의 계승자라는 의식이 존재한다.

시서예악(詩書禮樂)은 옛 헌원씨(軒轅氏)와 같고 詩書禮樂古軒似, 엄숙한 의관(衣冠)은 주관(周官)의 위의(威儀)라네. 穆環珮周官儀.

따르지 않으면 죽을 것이요 따르면 평안하리니 不順爾醎順爾康, 너희 임금께 의심 말라 하여라. 其告爾長無猜疑.

바다의 신 모두 머리 조아리며 陽侯海若幷稽首,

온갖 복(福)을 가지고 와서 서로 도우네. 用以百福來相宜.238)

고대 유교문명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일본이 이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 한 인식의 근저에는 유교문명이 보편적 진리이며 모든 나라가 이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와 같이 화이관에 의거한 타자인식은 주로 사행 초기에 보인다. 역사적 기억에 의한 적대적 인식과도 일정하게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이제 껏 경험해보지 못한 이질적 대상은 기존의 선입견에 의해 판단하기 마련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사행을 통해 일본사회의 여러 면모를 경험하고 난 뒤에는 일본을 짐 승에 비유하는 것과 같은 즉자적인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유교적 예법과 어 긋난 점에 비판이 집중된다. 다시 말해 종족적, 지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일본 에 대한 비판이 문명의 형식에 대한 비판으로 변모한 것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바로 이 문명의 형식에 대한 비판이다. 해유록 에 보이 는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대부분 의관(衣冠), 예법, 제도 등과 같은 문명의 형

237) 「舟泊馬島謌」, 6월 27일, 앞의 책, 433면.

238) 같은 곳.

식을 향해 있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기에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국중심적이고 편협한 시각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당대적 인 맥락에서 본다면 유교적 예법은 조선과 일본 공히 그 가치를 인정하고 따르고자 했기 때문에, 자국중심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의 일방적인 비판과는 그 함의 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 예를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검토할 것은 의 복에 관한 비판이다.

해유록 에는 일본의 유학자나 관리의 의복에 관한 언급이 많이 보인다. 에도의 궁중에서 신하들이 발보다 두어 자나 더 긴 바지를 땅에 끌고 다니거나 관모(官帽) 를 쓰지 않는 것을 신유한은 ‘괴귀(怪鬼)의 옷’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 일 본에서는 맨발로 다니는 것이 상대방을 공경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미천한 사람들은 평생 버선을 신어보지 못하고 각주의 신하들도 주군 앞에는 맨발로 나아갔으며, 다 이묘오(大名)가 쇼오군을 알현할 때에도 모두 맨발이었다. 신유한은 이러한 풍습을

‘해괴하다’, ‘우습다’라고 표현하며 비판적으로 서술하였다. 또 신하와 임금이 공사 (公私)의 예식에 한 번 관을 쓸 뿐 평소에 관을 쓰지 않는 것에도 의문을 표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유학자들이 통신사의 의관(衣冠)에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는 것이다. 기해년 필담창화집인 향보기해한객증답 (享保己亥韓客贈答)에는 에도 막부의 유관인 하야시 호오코오(林鳳岡, 1645~1732)가 신유한에게 조선의 의관이 중국 어느 시대의 법식을 따르는지 묻는 장면이 보인다. 신유한은 이에 “복건(幅 巾), 심의(深衣), 대대(大帶) 및 제반사(諸般事)에 쓰는 것들은 어떤 것은 삼대(三代) 의 제도를 따르고 어떤 것은 한(漢)․당(唐)․송(宋)의 제도를 따르기 때문에, 어느 시 대의 것을 따른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대체로 조야(朝野)에서 통 행되는 것으로 말하면, 가까이 황명(皇明)의 제도를 모방합니다”239)라고 답하였다.

또 다른 필담창화집에는 나고야(名古屋)의 유자(儒者)인 기노시타 란코오(木下蘭皐, 1681~1752)와 오오가키(大垣)의 의유(醫儒) 키타오 도오센(北尾道仙)이 통신사 서 기와 의원 등이 쓴 동파관(東坡冠), 와룡관(臥龍冠) 등에 대해 묻는 장면도 보인 다.240) 또 아메노모리 호오슈우는 사행이 끝날 무렵 신유한이 쓰던 복건을 얻어 가 기도 하였다.241) 일본 문사들이 조선의 의관에 대해 보인 관심을 통해 일본의 의복 제도에 대한 신유한의 비판이 양국 문사들이 공유하는 유교문명이라는 지반 위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당대 일본은 막부를 중심으로 전국시대 유풍을 일소 하고 유교 국가를 이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바, 통신사의 의관에 대한 일본

239) “幅巾ˎ深衣ˎ大帶及諸般所用, 或三代, 或漢ˎ唐ˎ宋, 不可的言某世, 而大抵朝野通行, 則 近倣於皇明制度.”( 享保己亥韓客贈答 上卷 附錄, 9b)

240) 각각 客館璀璨集 과 桑韓壎篪集 에 수록되어 있다.

241) 해유록 , 12월 26일조

문사의 관심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신유한은 궁실의 제도에 명분에 따른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점 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관백이 거처하는 궁전이라 할지라도 정치(精緻)한 것은 더할 나위 없으나 웅 장한 것은 부족하고, 장막이나 자리도 또한 주부(州府)의 관청과 차별이 없다.

교묘한 것만을 숭상하고 예법에는 전혀 어두워서 임금의 거처에도 따로 제도를 세우지 않고 평민의 부호들도 또한 왕후(王侯)와 사치함을 다툴 수 있으니, 그 등급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242)

신유한은 전명식 날 통신사가 국서를 받들고 에도 성에 들어가는 장면을 상세하 게 묘사한 바 있는데, 겹겹의 해자와 관문으로 둘러싸인 견고하고 화려한 성을 인 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는 사행 길에 본 다른 번(藩)의 성 역 시 화려한 점에서는 에도 성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예법에 따른 위계가 없음을 비판하고 있다. 유교 사회는 가족 단위에서부터 친족, 향촌, 국가에 이르기까지 구성원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여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사회 적 안정을 유지한다. 이러한 이념에 따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제도와 의례가 유교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 국가는 신분과 직책에 따라 세세한 차등을 두고 있다. 이러한 서열화의 정점에 선 존재가 임금이다. 따라서 임 금의 궁실은 다른 어떤 귀족이나 부호도 따라할 수 없는 상징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신유한이 본 에도 성은 그 규모나 견고함이 여타 다이묘오에 비해 훌 륭하기는 했지만 축조 방식이나 장식 등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다이묘오가 아닌 부귀한 평민이나 상인이 다이묘오나 쇼오군과 대등한 정도의 사치를 누린다는 것은 유교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신유한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무가사회인 일본은 조선과는 다른 방식의 위계가 존재하고 있다. 신유한은 이 점 역시 지적하고 있다.

그 풍속이 본래 등급이 없어서 가옥·가마·말·의복·기물은 참람되어 규제(規制) 가 없지만, 명분이 한 번 정해지면 상하가 분명히 나누어져 경외하고 받들어 따 르는 것이 감히 태만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신 행차의 왕래하는 길에서 접대하는 관리들을 보건대 태수와 봉행 이하 여러 관리가 용렬하고 잔약하며 어 242) “雖關白所居之宮, 精緻有餘而宏傑不足, 帳御鋪陳, 亦與州府官舍無別, 盖以工巧爲尙 而專昧禮法, 國君之居, 不立制度, 而平民之富豪, 亦與王侯競奢, 其無等級如此”(「宮室」

「聞見雜錄」, 위의 책, 5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