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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납주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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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납주조의 고찰

1.2. 탈납주조의 역사

탈납주조법16)은 성형이 용이하고 고온에서 쉽게 연소되는 것은 물론 자연에서 바로 얻을 수 있는 밀랍으로 모형17)을 만들어 주조하는 기법을 이른다. 탈납주 조가 언제, 어디서 처음 발명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지중해와 사해 사이에 있는 시나이(Sinai) 반도의 고대 유대인의 유적인 나할 미쉬마르 (Nahal Mishmar)18)에서 기원전 4500∼3500년경에 탈납주조로 주조된 동합금 제 품이 다량으로 발견됐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탈납주조로 제작된 가 장 오래된 주조품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기원전 3500년 이전의 중동 혹은 청동 제품을 처음 생산해 낸 곳으로 알려진 터키 아나톨리아(Anatolia) 고원을 탈납주 조법의 기원지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탈납주조법은 기원전 1500년경 이전 에 이집트로 전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지중해를 거쳐 그리스, 로마 등지로 퍼져 고대 유럽을 대표하는 청동 주조 방법으로 자리잡았다.19)

16) 밀랍주조법(蜜蠟鑄造法) 또는 실납법(失蠟法)이라고도 함.

17) 주조를 위해 처음으로 만든 것을 ‘원형(주모형)’이라 하고 그것의 본은 ‘모 형’이라 하나 흔히 ‘원형(pattern)’과 ‘모형(model)’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 다. 이에 연구자는 탈납주조에 국한해 ‘(왁스) 모형’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18) https://www.metmuseum.org/toah/hd/nahl/hd_nahl.htm.

19) 민병찬,「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 방법 연구 -국보 78,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그림 2-2] Nahal Mishmar Hoard, (출처: 이스라엘박물관)

[그림 2-3] Nahal Mishmar Treasure, 이스라엘박물관

서남아시아로부터 발원해 북아프리카와 유럽 등지로 전파된 탈납주조법은 점점 아시아 등 구대륙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늦어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시기인 기원전 4세기경에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간다라, 인더스강 하류 까지 전해졌으며,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중국에 서도 4세기경에 이르러서는 탈납주조법으로 금 동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도 6세기 경 이미 탈납주조법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교의 전파 경로를 따라서 일본은 물론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 금동불을 만든 동남 아시아의 모든 불교 국가로 탈납주조가 전래되 었다.20)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 중기(기원전 800

∼300년)에 분할주조법(分割鑄造法, piece-mold casting)21)의 시원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거푸 집22)이 등장했음을 유물을 통해 밝혀내었다.

그러므로 늦어도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주조법 이 한반도에도 전파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우리나라 는 주물 제작에 주로 분할주조법을 사용하였다. 불교가 전래되고 금동불을 자체 제작하기 시작한 5세기경에 제작된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이 분할주조법으로 제작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금동불좌상>은 내형틀과 외형틀23)을 모두 중심으로-」,『미술자료 제89호』, 국립중앙박물관, 2016, p.197.

20) ibid.

21) 주조할 모형의 주형을 점토로 제작한 다음 여러 개의 조각으로 절개해 해 체하고, 각각의 단면을 소성 건조시킨 후 재조립해 주조하는 방법.

https://www.metmuseum.org/toah/hd/shzh/hd_shzh.htm 22) 주형과 동의어.

23) 기물이나 불상처럼 속이 빈 주물 제작에는 내부와 외부 2개의 주형(거푸집) 이 필요하다. 각각 ‘내형틀(내형토)’과 ‘외형틀(외형토)’이라 하고, 주물의 빈 부 분을 만드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내형틀을 ‘중자(中子) 또는 코어(core)’라 부르 기도 한다.

[그림 2-4] <금동불좌상>, 삼국시대 5세기, 서울 뚝섬 출토, 높이 4.9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2-5] <금동불좌상>의 바닥면

갖춘 중국식의 온전한 분할주조법이 아닌 청 동기시대의 거푸집처럼 내형틀이 없어서 내부 가 청동으로 꽉 찬 것이 특징이다.24)

우리나라에서는 새롭게 전래된 탈납주조법 을 사용해 주로 중·소형의 금동불을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형의 금동불은 여전 히 분할주조법으로 주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등신대보다 큰 대형 불상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금동약사여래입 상>도 분할주조법으로 제작됐으며, 8세기 이후 전국 각지에 세워진 수많은 대형의 철불(鐵佛) 도 모두 같은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분할주조 법은 대형의 불상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와 조 선시대까지 이어졌다.25)

반면 537년에 제작된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을 비롯해 경북 선산 출토

24) ibid., p.198.

25) 민병찬, op. cit., pp.195-196.

[그림 2-7] [그림 2-8] <금동제 관음보살입상>, 백제, 구미시 출토, 높이 3.2cm, 국보 제183호,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2-6]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 고구려, 의령군 출토, 높이 16.2cm,

국보 제119호, 국립중앙박물관

<금동제 관음보살입상> 2점 등 삼국시대 대부분의 중소형 금동불은 탈납주조법 으로 제작되었다. 탈납주조법 특유의 정교함으로 인해서 이목을 끌만한 불상들 이 다수 만들어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는 <금동반가사유상> 역시 그 예시이다. 두 불상은 내외형 에 주형을 제작하고 불상의 두께가 될 사이 간극을 쇠못(型持, core pin, chaple t)26)으로써 고정·유지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두 불상은 완성도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

은 [그림 2-9]에서 보듯 머 리와 몸체 부분에 철심을 하나씩 넣어 주형을 고정하 였다. 내형틀의 재료로는 매 우 고운 진흙을 사용하였고, 불상의 두께는 4mm 내외로 얇은 편이다. 머리와 몸체 부분의 내형틀을 따로 만들 어 그 위에 일정한 두께의 얇은 밀납판을 입혀 조각상 을 각각 만든 다음에 하나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왼발 및 족좌는 내형틀 없이 밀랍만으로 조각해 붙였다. 그 밖에 장식 등 돌출된 부분은 밀랍판을 덧붙여 조 각하고, 기타 필요한 부분을 세밀하게 조각해 전체 밀랍 조각상을 완성하였다.

최종적으로 밀랍 조각상 위에 진흙을 입혀 외형틀을 만들어 주형 제작을 끝마쳤 다. 다음 공정으로 고정시킨 주형에 열을 가해 밀랍을 제거한 다음 청동을 부어 주조하였다.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보관(寶冠) 장식과 천 자락 등 많은 부위들에서 수 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청동 쇳물의 흐름이 좋지 않아 주조 결함이 다량으 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복잡한 보관 장식, 얇은 두께, 공기가 잘 빠지지 않

26) 내형틀을 외형틀 속에 파묻을 때 규정된 살 두께를 유지하기 위해서 두 틀 사이에 꽂아 고정하는 용도로 사용함.

[그림 2-9]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의 감마선 사진 [그림 2-10]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의 목 부분 (출처 : 민병찬,『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 방법 연구

-국보 78,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는 고운 진흙의 내형틀 등이 이유일 것이다. 이에 결함 부위를 재주조하거나 새 로 만들어 붙이는 등의 수리 작업을 거쳐 불상을 완성하였다. 4mm의 얇은 밀랍 사용이 불상의 양감에도 영향을 주어 전반적으로 평면적인 느낌이 강한 불상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야기하였다.27)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의 내 부 철심 구조는 상대적으로 단순하 다. 중앙 철심은 수직 방향으로 한 개만 심었고 양팔로 들어가는 철심 은 가슴 부위에서 중앙 철심을 관통 해 X자를 이루며 지나가도록 구축 하였다. 단순한 구조로 내형틀이 움 직이지 않도록 견고하게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철심이 하고 있다. 내 형틀은 모래가 많은 사질 점토에 가 는 식물 줄기를 섞어 사용했다. 이 처럼 철심을 박은 일체형의 내형틀

을 만들고 나서 그 위에 밀랍을 두껍게 입힌다. 그리고 밀랍을 조금씩 깎아 내 거나 덧붙여 밀랍 조각상을 완성한다. 상의 두께는 10mm 내외로 비교적 두껍 다. 다음으로 밀랍 위에 진흙을 입혀 외형틀을 만들고, 열을 가해 밀랍을 제거한 다음 청동을 부어 주조하였다. 국보 제83호 불상은 내형틀에 밀랍을 두껍게 입 혀 형태를 조각함으로써 풍부한 양감이 있고 옷 주름 등에 입체감을 더해 전체 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바닥면 두 곳과 왼발을 제외하면 수리한 곳이 거의 없는 완벽한 주조물로, 처음부터 주조 완성도가 매우 높은 결과물이었다.28)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과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탈납주조법이라는 같은 제작 방법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내형틀과 상의 두께, 밀랍의 사용 방 법 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주석 함량이 5% 내외로 거의 비슷한 청 동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쇳물의 유동성 확보, 내형틀을 고정시키는 철심의

27) ibid., p.208.

28) ibid.

[그림 2-11]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의 감마선 사진

(출처: 민병찬,『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 방법 연구 -국보 78,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구축 방법, 쇠못의 배치와 같은 요인들에 의해 주조의 완성도 면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결과적으로 국보 제83호 불상이 주조 기술면에서 훨씬 발전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29)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성덕대왕신종>(771년)의 크기를 탈납주 조법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높이 333㎝, 종구의 지름 227

㎝에 이르는 대형의 종으로 탈납주조법으로 제작돼 장식이 다채롭다. 특히 두께 가 일정해 종소리가 매우 맑고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인 <직지(直指)>30)를 탄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선도적 주조 기술력을 일찍이 가졌다. 당시 금속활자의 재질은 청동으로 공정이 다소 간단한 목형에 의한 사 형주조법, 그 중에서도 자연 모래를 이용한 생형 방식이 활용되었다. 나중에는 29) ibid., pp.208-209.

30)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백운화상(白雲和尙)이 석가모니의 직지인심 견성 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뜻을 그 중요한 대목만 뽑아 해설한 책. 우왕 3년 (1377)에 인쇄되었다. 1972년 유네스코 주최의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세 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되었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림 2-12]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 80cm,

삼국시대,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2-13]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 93.5cm, 삼국시대,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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