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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윤리를 통한 몸의 주체성 회복

I. 서론

2) 타자윤리를 통한 몸의 주체성 회복

도구 신체는 한 없이 그 확대를 요청하는 것이고,그것은 도핑마저 거절하지 않는 지점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며,그 극한은 신체의 파괴로까지 이를 것이다.……

현재는 신체에 피해를 초래하는 악제밖에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고,개량이 진행되어 무해한 약제가 발명된다면 누구라도 사용할 것임에 틀림없 다.도핑은 금하면 금할수록 달아날 구멍을 찾아 더욱 궁리를 할 것이며 확대화를 추구하는 악순환이 야기될 것이다.우리는 이것은 구조적 역설이라고 부른다.극단 적으로 말하면 확대화의 악순환이야말로 근대 스포츠를 지탱하는 근원적 성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김정효 역,2011:118).

이학준(2013:46-55)은 위 인용문을 예로 들며 스포츠에서의 공정성을 확보하 는 차원에서 도핑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성립시키고자 한다.

모든 물질을 금지하지 말고 인체에 피해 정도를 고려하여 허용하는 것을 숙고해봐야 한다(이학준,2013:48).

물론,‘치료의 목적으로 우리가 먹는 약도 독성이 존재하기에 부작용을 우려 하면서 복용하고 있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하지만 치료의 목적과 경기의 목적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또한 ‘선수들의 신체적 한계를 인정하고 수준 높은 경기력을 요구한다면 과학기술을 넘어서는 약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일종의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왜냐하면 선수들의 신체적 한계와 수준 높은 경기 력은 전혀 인과관계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31)

도핑을 한 선수와 도핑을 하지 않은 선수의 경쟁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입장이다.이 문제는 도핑을 할 수 있도록 선수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 모든 도핑물질은 검사할 수 없다면 역으로 도핑을 모두에게 허용하는 것이 공 정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다(이학준,2013:53).

그렇다면 ‘인체에 해롭지 않고 단지 운동수행 능력만 강화하도록 돕는 약물의 개발’(이학준,2013:53)이 과연 도핑에 의해 발생되는 공정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물론 공리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주장이라는 점에 의의 를 둘 수는 있지만,도핑 허용의 정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에 관한 해명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만일 그 정도에 있어 각 선수마다의 허용 되는 정도가 다르다면 마찬가지로 공정성의 문제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데 그 한 계를 둘 것이다.또한 각 선수들의 신체 구조가 다르다는 점에 있어 도핑의 허용 정도와 관계없이 이미 공정성은 확보될 수 없다는 전제가 구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것은 특정 약물에 대해 선수들마다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신체능력이 스포츠에서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결과를 만들어 스포츠를 인간 대 인간의 경 쟁이라기보다는 어떤 약물이 선수의 신체에 더욱 효과적으로 반응하는지에 대한 약물 대 약물의 경쟁으로 이끌 수 있다.오히려 공정성의 이론은 아마도 결과적 으로 나타나는 이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득이 얻어지는 과정에서 선수들이 사용하는 방법과 수단에 더욱 중점이 두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박성주,2007:

34-36).

31) 그러한 주장은 스포츠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 몸의 ‘운동 형식(form)’을 무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도핑금지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은 송형석(2006:31-39)의 언급에도 잘 나타 나 있다.

도핑은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는 이 논변 역시 쉽게 반박되어질 수 있다.또한 도핑보다 고도의 경쟁적인 스포츠가 요구하는 훈련의 양과 강도,경기상 황이 오히려 더 선수들의 건강에 위협적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만일 우리 가 건강상의 위험 때문에 도핑을 금지한다면,도핑 보다 건강에 더 위험한 스포츠종 목들,예컨대 미식축구나 권투,암벽등반,이종격투기 등과 같은 ‘위험한’종목들을 먼저 금지시켜야만 할 것이다(송형석,2006:34).

위와 같은 송형석(2006:34)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하지만 ‘도핑’과 ‘위험한 스포츠종목들’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 범주의 것들이다.도핑은 투여하지 않아야 할 사태이고 위험한 스포츠종목은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되는 사태이다.애당 초 이 둘의 관계는 비교할 수 있는 대상들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레비나스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인간 주체성을 규정한다.주체성은 즐김과 누림 곧 향유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스포츠 세계를 향유하고 즐기는 가운데 스포츠 하는 인간은 ‘자기성’의 영역을 확보하며,‘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전체로 부터 자기를 분리하여 ‘내부성(내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강영안,2012:40). 스포츠 하는 존재는 경험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존재와 같이 정의된 인간은 자기의식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과 생존을 지속시키기 위해 외부세계와 부단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여기서 타자는 주체에 앞서 존재하기 때문에 단순히 대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타자성은 신체-주체가 외부세계와 교섭하는 물질성에서 비롯된다.그것은 어 떤 의식에도 앞서 존재하는 감각적인(sensible)것이며 개념적으로 일반적인 의식 작용이나 상호주관성과 관련되지 않는다.나의 신체는 스포츠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눈이다.즉 느낌은 타자 세계와 ‘나’의 신체성을 불가분하게 보게 하 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레비나스에 따르면 무한의 관념은 그 자체로 심령적 인 대상이면서도 ‘주체’에 대해선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파악되기 때문에 그 것을 타자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러한 타자성은 신체성,감성 등과 같은 실존

적인 형태들로 나타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즉 신체성과 감성은 가장 구 체적인 타자성을 표현하며 신체적인 감성은 타자와의 향유적인 삶을 주체에게 가져다준다.

타자는 스포츠 행위 주체에게 있어 곧 타자성이다.대상들과의 관계는 단순히 물질과의 관계가 아니라 실존적인 삶의 타자성을 실현하며 향유적인 삶을 제공 한다.신체적인 것들로 실존을 표현하는 모든 것들은 주체를 형성하는 최소의 단 위인 수동성이며 타자성 그 자체일 수 있는데 이러한 타자성은 의식의 어떤 반 성적인 작용보다도 앞서는 것이다.스포츠 하는 인간은 스포츠 장면이라는 실존 적인 현실에 대해 기쁨,슬픔,고통 등과 같은 자신의 감정들을 표현하는 존재이 며 이러한 것들에 앞서 이성적인 것이 존재의 우위를 설명할 수 없다.

타인의 얼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얼굴로서 현현하는 타인은 더 이상 자 아의 인식의 대상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한다.얼굴은 어떤 맥락에 의존함 없이 얼 굴 그 자체로 윤리적 호소와 요청을 의미하고 있다.스포츠 세계 내에서 현현하 는 타자는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낸다.타자의 얼굴의 현현은 그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으로 스포츠 행위 주체인 나에게 윤리적으로 다가올 것을 요구하는 요청이자 명령과 같은 것이다.윤리적 타자에 대하여 응답하도록 작용하는 요소는 더 이상 자아 내부의 이성적 추론에 의한 자율적 판단이 아니다.여기에서 윤리적 문제의 초점은 스포츠 행위 주체의 자기입법적 자율성이 아니라 윤리적 주체가 타자의 윤리적 현현과 호소를 어떻 게 감수하느냐의 문제다.여기서 관련된 도덕성의 근원적 요소는 외부로부터 어 떤 강제나 부담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의 자기결정성 즉 자율성의 문제가 아니라,스포츠 행위 주체인 나에게 윤리적 요청과 호소를 보내는 타자에 관한 문제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지닌 수용성으로서의 감성적 존재방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타자의 윤리적 호소를 수용할 수 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감성은 삶에 가까운 것으로 본능을 넘어서 있지만 이성 아래 있는 자아의 직접성이다.감성은 이성보 다 근원적인 것으로 타자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타자와 맞닿아 있

기에 감성적 자아는 타자에게로 드러나고 타자에 의해 흔들리고 영향받고 상처 받는다.그러므로 인간의 몸이 타자수용의 가능성으로 주목된다.몸,감성,감관 은 인간이 지닌 ‘어떤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타자에게 노출되어진 자 아’,타자에게 드러내어진 자아를 보여준다.나의 감성은 타인의 고통과 호소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져 있다.이는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타자에게 불리움을 받는 상황을 상정하면 이해할 수 있다.

타자윤리에서 이성은 타자와 자아의 관계에서 재정의 된다.타자와의 관계에 서 이성은 인지론적 관점이나 인간의 의식작용에 준하여 그 의미가 밝혀지는 것 이 아니라,타인과의 관계를 열어주는 대화에서,타자의 타자성과 외재성의 의미 를 충분히 받아들이는 진리와의 관계에서,정의와 선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새롭게 조명되는 이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참된 인식의 본질이란 비판이라고 본다.참된 인식의 본질이 비판 이라는 것은 객관적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비판적 인식은 타자에 로 다가가는 것,타자를 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이것은 비판적 인식의 본질을 코기토를 넘어서는 것으로 재정의한 것이다.비판적 인식이란 타자를 타자로서 나타내는 데 있다.타자적 이성은 윤리적 행위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 안에 자리한다.대면적 관계에서 자아와 타자는 비폭력으로 다원성을 유지하면서 평화 를 형성한다.그러므로 진정한 경험은 타자를 발견한다.타자적 이성에로의 이행 은 비인칭적 객관성과 보편성의 구조로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존인 타자에게 말을 걸고 그의 부름에 응답하는 윤리적 책임성으로 나타난다.

내가 타인을 소유하고,장악하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 다.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은 나에게 얼굴로 나타난다.타인이 얼굴의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난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얼굴은 사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되 는 특징이 있다.사물은 전체의 한 부분으로,또는 전체 속의 한 기능으로 의미 가 있지만 얼굴은 이렇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얼굴은 코와 입,눈으로 이루어지지만,이는 판자와 서랍,책상 다리가 모여 책상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책상은 바라보지도 않고 호소하지도 않고 스스로 표현하지도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