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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분리와 익명적 존재의 출현

I. 서론

1) 존재론적 분리와 익명적 존재의 출현

레비나스의 존재론은 하이데거(M.Heidegger)의 존재론 특히 ‘존재’와 ‘존재자’

의 구별을 뜻하는 ‘존재론적 차이’를 전제(前提)한다.레비나스에게 있어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은 하이데거 철학의 가장 심오한 요소이며 이 구별이 자신에게 있 어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고백한다(EE,25-26).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 마찬 가지로 존재자와 존재자의 존재11)를 구별하고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임을 분명히 한다.하지만 레비나스의 존재 개념은 하이데거와 다르다.레비나스에 의 하면 존재는 빛이나 밝음으로보다는 무거움과 어두움으로 체험된다.인간이 갖는

10) 아르헨티나 태생이며 멕시코의 메트로폴리탄 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제적 종속 이론에서 출발하는 그의 사상은 서구 중심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고 특히 포스트모던의 이성 비판 기능 상실에 대한 대안으로 ‘트랜스모던’을 주장한다.

11) 행위 혹은 사건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불안은 ‘무에 대한 불안’이라기보다는 ‘존재에 대한 불안’이다.존재가 인간에게 문제인 까닭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 아니다.설령 인간이 무한한 존재라고 하더 라도 존재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존재는 그것이 지닌 익명성,인간에게 주는 공포 때문에 문제가 된다.인간은 존재로부터 도피 또는 탈출하고자 부단히 시도한다.인간이 ‘존재로부터 탈출’을 모색하는 이유는 ‘존재의 악’에 시달리기 때문이다(TO,75-79).존재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제시되는 줌 또는 은사나 혜택이 아니라 무거움과 공포를 체험하는 대상이다.공포의 대상으로서 존재함을 레비나 스는 ‘존재자 없는 존재’라고 이름한다.레비나스는 ‘존재론적 차이’를 하이데거 철학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는 결 국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일 뿐 ‘분리’가 아니라고 단언한다(TO,24).

‘존재자 없는 존재’가 하이데거에게 불가능한 까닭은 존재는 오직 존재자(즉 현존재)의 존재 이해를 통하여 접근될 수 있기 때문이다.하이데거는 ‘진리가 있 는 한,존재자가 아니라 존재가 존재한다’(Heidegger,1976:230)고 언급한다.현존 재가 존재하는 한,그리고 그동안,진리는 존재한다(Heidegger,1976:226).그러므 로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존재는 존재한다’(Heidegger,1976:212)고 밖에 말할 수 없다.존재는 진리와 존재 이해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 자 사이에는 일종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존재와 존재자는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존재한다’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술어는 현존재가 실존하지 않는 한 진술 될 수 없다.따라서 현존재의 존재 이해는 우리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해서 의미 있게 언급할 수 있는 틀이 된다.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존재자 없는 존재’에 대 하여 하이데거는 상정할 수 없다고 언급한다.

레비나스는 존재의 근원적,일차적 의미를 ‘존재자 없는 존재’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존재와 존재자는 존재론적으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분리’된다.레비나 스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다.그래서 레비나 스는 후설(E.Husserl)을 원용하여 일종의 ‘상상적 환원’(EE,25-26)을 시도한다.

레비나스는 ‘사물과 사람,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무로 사라진다고 상상해보 자’(TO,93-94)고 제안한다.나에게 익숙한 사물이 모두 사라지고 사물을 보게 하

는 빛조차 사라진다면 어둠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가?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존 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면 무(無)만 남는다.그렇다면 무는 비존재인가?무는 ‘없는 것’이 아니다.무는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것’또는 ‘저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일 뿐,‘없는 것’12)이라고 할 수 없다.어떤 것이 아 니면서 그렇다고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무’를 우리는 어디서 경험할 수 있는 가?레비나스는 밤의 경험을 그 예로 든다.

사물의 형상이 어둠 속에 사라질 때,대상도 아니며 대상의 성질도 아닌 캄캄한 밤 이 현존하는 것으로 찾아든다.우리가 묶여 있는 밤에,거기서 우리는 ‘무(無)’와 관 계한다.여기에는 이것 또는 저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것’이라 할 수 없는 하나 의 현존이다.… 본질적 익명성.정신은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외적인 것에 마주 서 있지 않다.외적인 것은 (만일 이 용어가 허용된다면)내적인 것과 관계없이 존재 한다.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체로 어둠에 뒤덮임,사로잡히며,인격을 빼앗기 고,질식한다.사물과 자아의 사라짐은 사라질 수 없는 것,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익명적으로 사람이 참여할 수밖에 없는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귀결된다(EE, 94-95).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마치 비가 내리고 날씨가 따뜻하듯 중성적이며 익 명적인 사건이다.안과 밖,내재성과 외재성,주체와 사물 또는 이것과 저것의 구 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밤으로 비유된 이러한 존재 경험은 사물이 사라지기는커 녕 계속 남아 있고,이것과 저것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물의 형태가 어둠 속에 감추어지는 경험13)으로 표시된다.밤은 ‘주체 이전의’이러한 익명적,중립 적 존재 경험이다.하지만 밤은 순수 무가 아니라 오히려 부재의 현존이다.‘밤의 공간’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어둠이 마치 내용인 것처럼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이것은 빈 조개껍질을 귀에 대었을 때 귓전을 울리는 소리와 유 사하다(TI,37-38).여기에는 세계도 주체도 존재할 수 없다.나는 어둠 속에 사로 잡히고 개별성을 상실하며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기서 존재는 ‘하나의 힘의 장(場)으로,아무도 속하지 않은 에워쌈’(EE,95)으로 12) 그래서 ‘무(無)’는 ‘(알 수) 없음(nothingness)’의 ‘있음(being)’이다.

13) 우리는 단지 경험할 수 없었던 어둠 속 (미지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그러 한 사태를 체험할 수 없다.

남아있다.

레비나스는 ‘존재’에 이르는 또 다른 통로로 불면의 경험을 든다.우리를 억압 하는,피할 수 없는,익명적인 존재의 살랑거리는 소리를 벗어날 가능성이 없음 은 우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잠이 찾아오지 않는 그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EE,109).잠들지 못함은 ‘깨어 있음’이 그 특징이다.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상태는 어떤 무엇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도 깨 어 있는 것이다(TO,27).깨어 있음은 의식적인 주시(注視)와 다르다.주시의 상태 는 내적 또는 외적 대상을 갖지만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상태에는 아무런 대 상이 없다.깨어 있음에는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EE,110).의식적인 주시는 어 떤 대상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주체가 전제되지만 불면 상태의 깨어 있음에는 자기 자신을 내세울 주체가 없다.주체는 현존 자체,얼굴도 이름도 없이 그저 그렇게 있는 ‘존재 자체’에 싸여 있을 따름이다(TI,47-48).불면의 상태에도 의식 은 현존하지만 의식은 존재의 익명성으로부터 탈출할 가능성을 갖지 못한다.의 식 주체는 불면의 상태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잠들지도 못한 채 다만 깨어 있 음에 자신을 내어줄 뿐이다.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깨어 있음이 아니라 깨어 있음 자체이며 목적도,내용도,시작도 끝도 없는 상태에 불 과하다(TO,28).

깨어 있음의 경험을 통해 레비나스는 주체를 그 텅 빈 깨어 있음 속에 사로 잡고 있는 순수한 현존이 다름 아닌 ‘존재한다’는 사건임을 보여준다.그것은 시 작과 끝이 없으며,어떤 누구의 존재도 아니다.‘존재’는 주체가 없는 존재이며 그곳에는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다.자신을 향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자의 부재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 사건’(TI,27)의 특징이 다.깨어 있음의 분석을 통해서 주체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 이 드러난다.주체는 무의미한 깨어 있음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주체는 깨어 있음을 몸으로 스스로 체험하는 존재 경험의 ‘담지자’이 다.즉 주체는 자기 상실(탈인격화,탈개체화)에 관해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이 것은 모순이 아닌가?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의식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깨어 있을 수 있는가?어떻게 주체는 스스로 자기 상 실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가?(서동욱,2011:362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