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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이용자 ... - S-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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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타자철학에 기초한 스포츠윤리의 탐구. 레비나스 타자철학에 기초한 스포츠윤리의 탐구.

서론

문제 제기

스포츠를 정당화시키는 스포츠맨십은 그 시대가 갖는 보편적 윤리 또는 도덕 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도덕은 인간상호간 및 사회현상에 대한 실천 을 이끄는 원리․가치․규범 등의 체계를 내용으로 하는 의식형태라고 할 수 있 다.즉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및 그에 준하는 행위는 선과 악 그리고 옳고 그름 을 구별하는 원리라는 것이다.이는 어떠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 행동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고,생활의 틀로서 작용하는 인간 행위의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 인간으로 향하지 않는 스포츠윤리에서는 그 안에 심각한 윤리적 난점 이 내포될 수 있다.왜냐하면 추상적 이론의 경우,윤리적 행위를 고무하는 도덕 적 실천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따라서 이와 같은 윤리적 난점을 해결하는 접근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그렇다면 기존의 스포츠윤리에서 는 타자성과 주변성을 제대로 인정하는 윤리가 추구되었는가?.

연구의 필요성

유도 선수 야마시타를 윤리적 타자로 보는 관점에서,즉 타자의 존재사실을 인정하면서 형성되는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나와 너의 관계,나와 그의 관계,나 와 타자의 관계로 향한다.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숙고하게 될 때 바로 윤리적 사 태에 관련된 ‘너’,‘윤리적 요청자로서의 유도 선수 야마시타’가 정당한 자리를. 확보한다.아울러 이러한 윤리적 사태에서 라쉬완 선수로 하여금 도덕적인 행위 를 하도록 요청하는 ‘유도 선수 야마시타’의 의미,즉 주체에 대한 타자의 의미 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그리고 주체로 하여금 이 같은 유도 선수 야마시타의 윤리적 사태를 수용하도록 촉구하는 원리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연구의 목표와 과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나 의무론 그리고 덕 윤리에 의해 스포츠윤리학 의 정립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러한 논의들 자체에 도덕성의 원리가 주체 중심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데 있다.즉 스포츠에서 비도덕적인 문제가 지속 적으로 야기되는 원인에 대한 해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포츠만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인간의 행위로 이루어진 실천 영역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스포츠윤리 담론에서 이론적 탐구의 노력이 깊지 못했 던 이유도 실천에 대한 관심이 앞섰기 때문일 수 있다.

연구의 전거 및 구성

이 논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제1장과 제2장에서는 글의 전개를 위한 문제 제기 그리고 스포츠윤리와 관련된 기존 담론들 특히 스포츠윤리학의 근간을 이. 하지만 덕 윤리 역시 그 논의 자체에 도덕성의 원리가 주체 중심으로 명시되 어 있어 스포츠에서 비도덕적인 문제가 지속적으로 야기되는 원인에 대한 해명 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이에 본 논자는 이러한 문 제 제기와 더불어 ‘인간 중심적인 소통의 철학’을 강조하고 있는 레비나스의 타 자철학을 스포츠윤리 담론의 조성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대안책으로 제시하였다.

기존 스포츠윤리 비판

스포츠공리론 비판

공리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즉 공리주의는 좋은 것을 행위하는 것이 옳다라는 논지로 압축될 수 있다. 공리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도덕적 행위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이 요구된다.

공리론적 스포츠윤리 비판

우에 두 이론 사이에는 어떠한 상이점도 없다.하지만 어떤 개별적 행위에 대해 서 행위-공리주의와 규칙-공리주의가 서로 다른 도덕 규정을 제시하는 경우,보 편적으로 수용 공리를 극대화하는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가 실제로 최대 공리를 산출하게 되는 경우를 발생시킬 수 있다.이런 경우에 규칙의 지위를 공리에 대 해 부차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기존의 규칙에 새로운 규칙을 도입하거나 예외를 만들어 최대의 공리를 산출할 수 있도록 규칙을 수정하고 세밀화 한다면 규칙-공 리주의는 행위-공리주의로 사실상 환원된다. 규칙-공리주의에 입각해서 볼 때,모든 스포츠 행위들은 이미 정해진 규칙들 에 비추어서 윤리적 판단이 이루어지게 된다.이는 행위-공리주의보다 진일보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공리주의는 스포츠현상에서 비윤리적 행위가 양산될 수 있다.왜냐하면 우리가 규칙-공리주의의 이론 틀 (paradigm)내에서 볼 때,스포츠에는 행복의 가능성이 내재된 규칙이 존재하고, 그 규칙의 준수에 의해서만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주장이 전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의무론 비판

영화 《코리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탁구 경기에서의 오심이 경기 의 일부이고,야구에서의 빈볼이 관중의 재미를 북돋아주고,축구에서의 몸을 사 리지 않는 깊은 태클이 관중들에게 흥미를 더해주고,복싱 경기에서의 고의적인 반칙이 경기의 열기를 식지 않게 해주는 행위가 될 수는 있겠지만,그러한 행위 들이 각 경기 규칙의 범위 내에 있다는 점을 들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승리를 위해서 비윤리적인 행위가 승인되고,소속팀 선수냐 아니냐에 따라 급변 하는 관중들의 윤리적 기준은 결국 도덕의 자충수를 두는 것에 불과하다.결국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누군가가 행복을 누린다는 것 자체는 성립되기 어렵다.그 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가 과연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 물음은 지속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의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잣대를 제공하려는 것으로 이해된다.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주의자들은 행위의 명 확한 지침으로 ‘의무’9)를 상정한다.10)의무로부터 도출된 도덕적 판단은 법칙적 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칸트는 기본적으로 도덕성이 우리를 속박하는 법과 원 칙에서 나온다는 것으로 간주하고,이로부터 올바른 행위는 도덕 법칙에 대한 존 경으로부터 실행되는 것이라 생각했다.11)‘도덕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수 행하거나 그러지 말도록 구속하는 일련의 법과 같은 원칙들로’간주된다(Crisp, 1996:15).이러한 일련의 법과 같은 원칙들은 법정의 절대적 판결처럼 당연히 해. 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12)우리는 이들의 목표를,지속적으로 특별하게 정해 진 규칙을 형식화하고 옹호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그리고 이러한 원칙들 이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의 명확한 판단을 내려 줄 것이라고 강조할 수 있다.

의무론적 스포츠윤리 비판

단어에 이미 행위자의 의식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란,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궁극 목적보다는 언제 어 디서나 지켜야할 행위의 근본을 주목하는 윤리이다.의무윤리학은 ‘의무’혹은.

스포츠덕론 비판

자율성’을,도덕성을 설명하는 기본 개념으로 삼아 의무로서의 도덕을 강조하고, 인간의 행복이나 복지는 바로 이러한 개념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의무 윤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적 삶은 그것의 준거가 되는 어떤 도덕원리나 규칙 에 의거하여 행위가 이루어질 때 바람직하게 되는데,그것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 져 있거나 어떤 외적 권위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강일영,2004).의무론은 행동의 옳음을 그 행동의 결과에서 찾지 않고,결과와 상관없이 선의지 즉 도덕 법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결국 칸트의 윤리에 근거한 스포츠 윤리는 원칙이나 규칙에 집착함으로써 실제적으로 행위를 안내하기에는 충분하 지 못하거나 구체적인 스포츠 상황에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친다(노영란.

덕 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하지만 맥킨타이어의 접근법이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오해 중의 하나는 서양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덕 개념과 그 중요성이 완전히 부정되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거의 무시되었다가 자신의 덕 윤리에 이 르러 비로소 부활하였다는 인상을 준다는 데 있다. 물론 행 위자가 지닌 탁월성으로서의 덕을 윤리학의 가장 궁극적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행위 중 심이 아닌 행위자 중심의 윤리설을 구축하려 했던, 다소 좁은 의미에서의 덕 윤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가 맥킨타이어에 이르러 다시 등장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덕 이론적 스포츠윤리 비판

실천에 대한 맥킨타이어의 이러한 이해는 기술을 사회적 가치평가나 역할 속에 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이에 따라 기술을 통한 내재적 선의 성취를 위해 서는 정의나 용기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덕이 요구된다. 이런 이해가 옳다면 맥킨타이어의 덕 목록에 대한 역사주의적 설명은 보충을 필요로 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애초부터 윤리학이 엄밀한 학이 될 수 없음을 강 조한다(NE,1권 3장).

레비나스 타자철학의 전개

요소 세계는 사람이 사는 삶의 환경이다.세계,요소,환경은 여기에서 동의어. 향유는 ‘자신 안으로 물러남’이고 자신으로의 귀환이다.향유는 자아의 자기성을 형성한다(TI,91).

레비나스의 생애와 사상

초기 철학 :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시간과 타자』(1947)를 중심으로

존재론적 분리와 익명적 존재의 출현

존재한다’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술어는 현존재가 실존하지 않는 한 진술 될 수 없다.따라서 현존재의 존재 이해는 우리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해서 의미 있게 언급할 수 있는 틀이 된다.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존재자 없는 존재’에 대 하여 하이데거는 상정할 수 없다고 언급한다. 깨어 있음의 경험을 통해 레비나스는 주체를 그 텅 빈 깨어 있음 속에 사로 잡고 있는 순수한 현존이 다름 아닌 ‘존재한다’는 사건임을 보여준다.그것은 시 작과 끝이 없으며,어떤 누구의 존재도 아니다.‘존재’는 주체가 없는 존재이며 그곳에는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다.자신을 향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자의 부재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 사건’(TI,27)의 특징이 다.깨어 있음의 분석을 통해서 주체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 이 드러난다.주체는 무의미한 깨어 있음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주체는 깨어 있음을 몸으로 스스로 체험하는 존재 경험의 ‘담지자’이 다.즉 주체는 자기 상실(탈인격화,탈개체화)에 관해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이 것은 모순이 아닌가?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의식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자기.

주체의 출현과 존재 가짐: ‘여기’ 그리고 ‘지금’

의식이 ‘여기에 자리 잡기’위한 구체적인 가능 조건은 신체이다.레비나스에. 속에서 ‘순간’이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여기서 문제되는.

시간과 타자: 타자와의 조우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에서 특이한 것은 타자를 단지 ‘다른 자아’로 보지 않는 다는 점이다.타자는 나의 공감과 연민 감정 이입의 대상이 아니다.내가 너에게 타자가 되고 네가 나에게 타자가 되어주는 그와 같은 상호적인 관계에서는 진정 한 의미에서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그것은 단지 항(項)을 서로 대치한 형식 적 의미의 타자에 지나지 않는다.레비나스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상호 존재’는 진정한 타자 개념을 제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집단성만을 표시해주기 때문이다.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인 은 성격과 외모,심리와 상관없이 단지 내가 아니며 나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타자이다(TO,75).타인은 나와 대칭적 관계 다시 말해서 나 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전혀 예기치 못하고 전혀 나의 틀 속에 집어넣을 수 없는 사람이다.

중기 철학 : 『전체성과 무한』(1961)을 중심으로

생에 대한 사랑과 향유 확보

향유는 나의 삶을 채우는 모든 내용에 대한 최종적 의식이다.이 내용들을 향유는 모두 안고 있다.나의 삶은 노동과 양식(糧食)이 있는 삶이다. 물,공기,따뜻함,이와 같은 것들은 사물로 환원될 수 없다.요소는 우리의 삶의 환경이며 이 속에서 우리는 마치 고향에 있듯이 즐기고 향유한다.

향유적 자아의 주체성 확립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주체성의 기원인 이 향유는 순수 의존성도 순수 독립성도 아니다.향유는 ‘의존성을 통한 독립성’이다(TI,87).따라서 주체 의 주체성은 향유의 행위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떠맡음으로서 성립된다.자신 의 것으로 떠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자신이 아닌 것,다른 것에 의해 주어진다. 둘째,주체의 내면성과 유일성은 향유를 통해 구성된다.향유는 자아의 응축 이고 자신에게로의 복귀이다.향유를 통해 자아는 삶과 활동의 중심이 된다.향 유를 통해 내면성이 형성되고 내면성을 통해 ‘자신’과 ‘자신 아닌 것’사이의 분.

얼굴의 현현

절대적 타자성,레비나스에 의하면 그것은 타자의 얼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하 지만 이때 ‘얼굴(visage)’이란 눈,코,귀,입이 어우러져 표현되는 다양한 개별성 (individuality)을 지칭하지 않는다.‘타자의. 얼굴은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법으로,한 존재가 우리와 접촉하는 방식이다.그것 을 통해 얼굴은 모든 범주를 벗어나 있다.

후기 철학: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을 넘어』(1974)를 중심으로

분리되어 어느 것에도 참여하지 않고 오직 내면적인 존재로서만 내 집에 머물러 편안하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그러나 타자가 나타날 때 상황은 달라 진다.타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내 집 문을 더 꽁꽁 걸어 잠그 거나 아니면,내 집의 빗장을 열어 그를 맞아들여야 한다.타자의 얼굴은 단지 내 ‘밖에서’오는 것이 아니라 내 ‘위에서’저 높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 다.내 ‘위에서’오는 타자는 나의 자유를 문제 삼고 나의 소유권을 문제 삼는다.

나의 책임과 존재 모험 극복

나에게는 나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존재 유지에 필요한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가 있다.하지만 나의 선택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유한하다. 세계 안에서 나의 존재 실현 노력은 한마디로 ‘자율성’이란 말로 요약될 수 있다.나는 타자를 나에게로 환원하고 나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법으로 군림한다.

주체의 존재 유지 노력과 타인과의 관계 형성

장한다.타인에 대한 책임은 나의 주도권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39)얼굴의 나타 남으로 나는 내가 요구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응답하는’존재로 ‘책임적인’존 재로 세워졌다.그러므로 나의 자연적 경향이나 이타적 본성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희생정신이 타인에 대한 책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레비나스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내가 타인의 책임을 대신하는 것은 심지어 그의 잘못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대된다.만일 나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타자윤리로서의 스포츠맨십

대면적 관계 윤리로서의 스포츠맨십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이러한 작업의 성과 위에서 비로소 윤리학에 대한 정당한 이해와 평가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타자 중심성을 띠는 것은 분명하다.그리고 그가 최종적 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상호 간 관계(larelation inter-humaine)’이다.그렇다면 타.

책임 윤리로서의 스포츠맨십

행위 주체로서의 대속적 주체 획득

이 책임은 타자의 표정을 받아들임으로써 발생하는 것이지 자발적인 어떤 의 지와 행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의 책임론은 일 반적인 책임론과 구분된다.책임은 이전의 어떤 관련이 없어도 발생되는 것이다 (OB,195). 2002년 당시의 안정환 선수가 자신의 행위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안 정환 선수가 (페널티 킥커라는)행위의 주체로서,그 행위를 자유롭게 의욕했기 때문이다.안정환 선수의 경우처럼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행위야말로 어떤 행위를.

행위 주체의 존재 모험과 책임 파악

이기주의에 근거하는 것으로 본다.이러한 이기주의에 대항하여 레비나스는 타자 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totheOther)이 모든 다른 사회적 책임이 기초하여 있 는 근본구조(TI,51)라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에 들어와 거주하는 존재 양식으로 분석한다.그런데 하이데거와 다르게 레비나 스는 환경에서 마주치는 사물들을 향유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고통 현상학으로서의 스포츠맨십

행위 주체의 원초적 경험

안과 고통이 있다.즉 인간 존재는 그 자신이 가지는 감각의 만족으로부터 누리 게 되는 향유의 기쁨과 충족되지 못한 욕구의 고통이 있다.고통은 윤리적 관점 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윤리적 관점 바로 이것이 고통에 의해서 열린다는 말이다.고통에 관심을 둘 때,우리가 고통으로 고생하 는 타인의 신음과 한탄에 귀를 기울일 때,바로 삶에 대한 윤리적 전망이 열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웃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음흉한 세력이고,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낙관적인 전망에 찬물을 끼얹는 가장 원초적인 사태이다.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낙관적인 철학이 고통의 문제를 즐겨 다루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행위 주체에 대한 구원의 근원적 요청

레비나스는 ‘나’또는 ‘우리’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인간 상호간의 전 망(interhuman perspective)’에서 볼 것을 요구한다.그렇다면 고통의 현상에 인간 상호관계의 열림을 위한 어떤 실마리라도 있는 것인가. 나는 대가를 기다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진다.그는 내 목숨까지도 요구한다.

타자윤리에 기초한 스포츠윤리의 제 문제

타자윤리에 기초한 스포츠윤리의 제 문제. 지 못하는 것처럼,윤리적 만남도 도덕적 행동의 지배하는 일련의 안정적 규칙들 을 제공하지 않는다.레비나스의 윤리는 옳고 그름,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길을 제공하지 않는다.윤리는 가장 근저에서부터 나에게 도전하는 것과 접촉하는 지 점이며,그 도전을 통해 나의 정체성과 세계와의 관계는 의문 속에 던져진다.만 남에 대한 나의 응답은 내 자신의 윤리적 본질을 명확히 한다.

스포츠에서의 정의

스포츠윤리는 스포츠 세계에서의 경험적 만남보다 오히려 존재의 양식들에 관심을 두어야한다.왜냐하면 스포츠 세계를 공유하는 타자는 내 자신의 반영으 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스포츠 세계에서 타자는 나와 같지 않고 그렇기에 동일성의 측면에서 이해 가능하지 않다.스포츠윤리가 주체성의 측면에서 고찰된 다면,지나치게 이성 중심의 논리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본 연구자가 이 장에서 논의의 성격으로 스포츠윤리의 시론을 타자윤리에 근거하여 개진한 바,작금의 스포츠윤리와 그 궤를 달리한 이유는 바로 기존 사상에서의 탈피를 시도하기 위 함이다.

타자에 대한 공평으로서의 정의

첫째, 소수자의 이익이나 욕구가 다수의 더 큰 이익이나 보 다 나은 자들의 욕구에 의해 희생된다. 여기서 중요시 되는 것은 ‘규칙의 적용에 있어서 참여자에게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규칙은 스포츠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합법적이며 공통적으 로 부여되는 제약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사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정의

왜 우리는 정의로워야 하는가’혹은 ‘왜 우리는 정의로울 수밖에 없는가’가 레비 나스 자신의 물음이 갖는 특이성이다.레비나스는 정의 물음의 원천을 ‘나의 존 재 권리’를 문제시하는 데서,즉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 속에서 발견한다. 이런 일반적인 견지에서 보면,레비나스가 내놓은 정의관은 다소 특이해 보인 다.왜냐하면 레비나스는 정의를 타자와 맺는 윤리적 관계,대면적 관계와 등치.

스포츠 도핑

시키기 때문이다.본 연구자는 일단 다자간의 문제를 한 발 뒤로 놓는다.이때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것은 정의가 자유에 앞선다는 점,다시 말해 타인과의 관계 가 개인의 권리인 자유에 우선한다는 점이다.이 같은 주장의 초점은 개인을 원 자적 실체로 놓는 자유주의의 관점을,윤리를 앞세운 관계론적 관점에서 비판하 는 데 있다.

도핑에 의한 몸의 주체성 상실

주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타자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에서 도핑의 비윤리성은 시작된 다.도핑은 타자를 공존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그 무엇으로 간주함으로써 주체를 닫. 행위 주체의 움직임은 ‘나’밖의 현실인 타자들 속에서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과 정이며 ‘나’를 객관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이러한 의미에서 타인은 자아의 연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원이 될 수 있다.이런 관계는 스포츠 세계에서의 타자윤리를 원천적으로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된다.

타자윤리를 통한 몸의 주체성 회복

적인 형태들로 나타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즉 신체성과 감성은 가장 구 체적인 타자성을 표현하며 신체적인 감성은 타자와의 향유적인 삶을 주체에게 가져다준다. 다.하지만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 표현한다.얼굴과의 만남은 사물과 는 전혀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스포츠 환경

얼굴을 통해서 존재는 더 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앞 에 나타난다.얼굴은 열려 있고,깊이를 얻으며,열려 있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준다.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 나타내는,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얼굴의 나타남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부여한 의미보다 타인의 존재 자체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스포츠 세계에 있어 타자 (즉 상대 선수)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스포츠와 환경에 대한 타자윤리적 접근

를 할 수 있고,선악을 평가하고,행위하는 존재로 보았다.이러한 철학을 근거로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능력을 최상위에 두기 때문에 환경 문제 역시 기술적 진 보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에 대한 환경윤리 담론에서는 대부분 생태중심 주의에 지향점을 두지만,생태중심주의는 현재 발생하는 환경문제에 내재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적합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

스포츠 세계에 대한 친환경적 가치관 형성

바람직한 윤리적 관계를 통해 진정한 스포츠 주체로서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는 것이다.나아가 레비나스는 스포츠 하는 주체가 어떻게 자기중심적 가치관에 서 벗어나 타자지향을 가지게 되며 타자와 하나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밝혀주 고 있다.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은 스포츠 주체로서의 인간 에서 출발한 생태중심주의적 대화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타자 지향의 환경관에서 타자는 절대적 외재성을 지니므로,타자에 포함되는 자 연 요소는 스포츠 주체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변화시키며 다룰 수 있는 존재 가 될 수 없다.타자는 스포츠 주체가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될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스포츠 주체는 타자의 절대적 외재성을 승인하며,타자의 부름에 응답하 고 타자를 책임지기까지 한다.타자에게 응답하는 스포츠 주체는 주체 중심주의 에서 벗어나 타자성을 경험한다.이렇게 주체 중심주의에서 타자성을 경험한 스.

결론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