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볼커 전환에서 플라자 합의, 루브르 합의까지
2) 일본 경제의 자산 거품 붕괴와 엔고 불황
는 점이었다. 1980년대에 일본은 막대한 대미 흑자로 인한 잉여 달러를 바탕으로 미국 자산을 취득하면서 달러화의 가치를 지탱해주었다. 특히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와 달러화의 벌어진 환율 격차와 일본의 저금리를 바탕으로 일본의 투자자들은 미국 자산에 대한 차입 매수에 적 극적으로 나섰으며, 특히 1987년 검은 월요일의 주식 시장 붕괴 직후에 는 미국 주식 시장에 대한 구원 투수로 나섰다. 그러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일본 경제의 거품이 붕괴되고 경기 후퇴 국면에 들어서게 되자, 일본의 투자자들은 미 재무부 채권 및 유가증권과 기타 미국 자산 에 대한 매입을 축소했을 뿐만 아니라 현금화하여 일본 국내에 들여오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국내 수요가 급격하게 위축되면서 일본의 수 입량은 현저하게 축소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엔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 고, 반대로 달러화에 대한 수요는 축소되었으며, 그 결과 엔화 가치의 평 가 절상 속도가 급격하게 나타났으며, 엔화 가치의 급격한 절상으로 일본 의 수출 경쟁력은 한층 더 추락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하여 거품이 꺼지 기 시작한 1991년 말부터 1995년 하반기까지 일본 경제는 심각한 경기 후퇴를 경험하게 된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경기 후퇴를 경험한 것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 었다. 일본과 더불어 막대한 대미 무역흑자를 향유하였던 독일 역시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경기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독일 정부는 ‘건전 재정’에 초점을 두고 1987년까지 긴축통화정책을 실시했다. 예산 적자의 비율을 GDP 대비 1980년 3.1%에서 1985년 1.1%로 줄였으며, 실질 금리 는 1970년대 평균 2.5% 수준에서 1979년에서 1984년 사이에는 5.1%로, 1984년에서 1989년 사이 평균 4.1%%로 상승했다. 이 결과 1980년에서 1986년 사이에 제조업 산출 증가율은 내내 2%에도 미치지 못했다. 반면 에 제조업 노동력은 시간 기준으로 1/10 정도 감소했다. 따라서 제조업 체들은 1973년에서 1979년 사이의 기간과 비교해 실질임금 증가율을 절 반으로 줄이고 합리화와 감량 경영만을 통해 생산성을 어느 정도 증가시 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독일의 소비자 물가지수의 연간 증가율은 1981 년 6.2%에서 1987년 0.6%로 하락했으며, 1982년에서 1990년 사이의 독
일 제조업의 단위노동비용 연평균 증가율은 1973년에서 1979년 사이의 4.8%에서 절반 이상 감소한 2.1%로 하락했다.122)
이렇게 제조업 단위노동비용 증가율의 하락을 바탕으로 독일의 대미 수 출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플라자 합의 전까지 상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전 재정’의 결과로 수입이 억제되고, 환율 효과에 힘입어 수출이 증가 하면서 독일의 마르크화의 가치는 절상 압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 와중 에 플라자 합의에 따라 독일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게 되면서 마르크 화의 가치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따라서 일본 생산자들처럼 독일의 생산 자들도 마르크화의 가치 상승을 상쇄하기 위하여 수출 가격 인하를 통해 수출 증가율과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이는 다시 이윤율 하락 으로 귀결되었다.(<그림 3-5> 참조)
그러나 독일 통일은 서독의 제조업체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되었 다. 동독 지역의 재건을 위해 독일 정부는 동독 지역에 대한 보조금을 지 급하였으며, 이에 따라 동독 지역의 강화된 구매력은 서독 상품에 대한 수요를 진작시켰다. 문제는 동독 재건을 위한 보조금은 재정 적자를 통해 서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독일 정부의 ‘건전 재정’ 정책과 상충하는 것이었으며,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1991년 독일 정부는 동 독 지역에 대한 보조금을 중단하고 재정 지출을 삭감했으며, 인플레이션 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금리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그 결과 독일 역 시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플라자 합의 직후 일본과 독일 모두 단기적인 호황이 나타났지 만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한 고금리 정책은 마르크화와 엔화의 가치를 더욱 상승시켰으며, 일본과 독일의 제조업 수 출 경쟁력은 더욱 가파르게 하락하였고, 이윤율 하락 추세는 더욱 강화되 었다. 특히 1990년대 초,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균형 재정’ 정책을 펴 게 되면서 미국의 수요 억제로 인하여 일본과 독일의 대미 수출이 타격을 입게 되면서 일본과 독일은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과 독일은 1990년대 초의 불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도를
122) Brenner, 2002, op.cit., pp.160-161.
하게 된다. 먼저 일본은 아시아 지역으로 생산 기지를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 초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들은 엔화 및 달러화에 대해 평가절하 를 했으며, 따라서 엔화 강세에 힘입어 상대 비용을 더욱 절감할 수 있었 기에 아시아 지역으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생 산기지 이전은 1980년대 후반 이후 계속 진행 중에 있었지만, 전반적인 조율과 정보 확산을 통해 국가가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보다 광범위한 규모로 확장되었다. 이는 노동 분업의 증대를 통해 효율성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상대적으로 저임금인 아시아 노동과 아시아 적 노하우 및 하부 구조를 활용한다는 발상이었다.123)
이 과정에서 일본의 해외 직접 투자는 당연히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 었다. 특히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일본의 직접 투자는 1991년에서 1995년 까지 29억 달러에서 81억 달러로 늘어났다. 이 결과 아시아 지역에서 일 본의 무역 역시 증가했다. 일본의 총 수출에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수출 비중이 1990년 31.1%에서 1995년에는 44%로 급증했다.124) 그렇지만 엔 화의 지속적인 절상으로 여전히 수출 의존도가 높았던 일본 내 제조업은 여전히 불황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해외 직접투자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일 본 내 제조업은 만성적인 불황의 늪에 빠져 있었다.
다른 한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일본 금융의 자유화와 개방화는 일본의 잉여 달러가 본격적으로 해외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본 계 정에 있어 세계 다른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대출은 주로 달러로 표시되었 다. 이는 달러화가 선물 및 선물 외환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거래 통화이 기 때문에 거의 배타적으로 미국에 대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일본의 대출만이 양허적인 조건에서 엔화 대출이다.
따라서 일본의 대출자들은 대부분의 ‘경화 대출(hard lending)’에 있어 외환 시장의 리스크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연화 대출(soft lending)’에 있어서도 간접적인 통화 위험(currency risk)에 직면할 수 있다. 1993년 초에서 1995년 초까지 엔화의 급격한 가치 상승은 엔화의
123) Brenner, 2001, op.cit., p.398.
124) OECD, Economic Survey of Japan 1995~1996, Brenner, 2001, pp.399-400에서 재인용.
주요한 대부 국가인 중국, 인도네시아 등이 엔화 부채에 대한 경감을 호 소하게 하였다.125)
1981년에서 1990년까지 일본의 장기 자본 유출은 경상 수지 흑자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결과적인 기초 수지(basic balance)에서의 적자는 단기 자본의 대규모 유입-주로 일본 은행에의 외화(달러화) 예금 수취-을 통해 상쇄되었는데, 이는 1986년에서 1989년 사이 거품 경제 시기 동안 특히 빠르게 축적되었다. 이렇게 일본은 단기 자금을 빌려 (경상 수지 흑 자를 넘어서는) 장기 대출을 시행한 것이었는데, 타블라스와 오제키 (Tavlas와 Ozeki)는 1990년의 이러한 일본 금융 시스템을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미국이나 1914년 이전의 영국과 같은 방식의 거대한 ‘국제 금융 중개기관(international financial intermediary)’126)으로 비유했다.
그러나 1991년부터 1994년까지 거품 경제의 부정적인 측면이 야기한 결과에 따라 이러한 모델은 붕괴되었으며, 일본은 국제 금유 중개기관처 럼 행동하는 것을 중지하게 되었다. 1991년, 기초 수지에 있어 거대한 흑 자를 창출하기 위해 장기 자본이 일본으로 회귀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95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단기 자본 유출은 경상 수지 흑자를 융자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으로 지속되었다. 1990년대 초, 이러한 단기 자 본 유출의 많은 부분은 일본 은행들이 거품 경제 시기에 확보했던 유로- 달러 예금을 통해서 나타났다. 결국 금융 중개 기관 역할로부터 이탈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은 대규모 위험에 노출된 해외 자산의 순보유 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경상 수지 흑자를 융자하 는 메커니즘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를 보였다. 만일 외국인들이 엔화 증 권으로 장기 대출을 하고자 하지 않거나, 세계 경제에 있어 통화로서의 유용성 때문에 엔화로 일본 은행에 예금했던 필요성이 줄어든다면, 국제 금융 중개 기관으로서의 일본 모델은 활성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엔화는 너무 불규칙적으로 평가 절상되었고, 변동성이 너무 커서 국제 통화로서 매력적이지 않았다.127)
125) McKinnon, Ohno, op.cit., p.103.
126) Tavlas and Ozeki, op.cit., p.21 127) Ibid., pp.106-107.
독일의 경우 1990년대 초의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펴게 되었고, 생산성 성장, 설비가동률 등이 감소했다. 일본이 아시아 지역으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면서 경기 침체를 극복하려고 노려한 것과 달리, 독일 은 다시금 수출 가격 인하를 통해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제자리 걸음을 걸었고, 가격 인하로 인하여 이윤율 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1995년, 이윤율은 1990년의 50%내지 60%수 준에 그쳤다.128) 특히 마르크화는 일본의 엔화와 마찬가지로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지속적으로 평가절상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독일 수출경쟁력 은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렇듯 세계 경제를 이끌어왔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중 일본과 독일 은 플라자 합의 이후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과 독일 의 경기 침체는 미국이 환율 조정을 통해 자국 산업의 수출 경쟁력을 높 이고, 일본과 독일이 미국 제품 수입을 확대하게 하여 경상수지 적자 문 제를 해결하고자 한 전략에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된 것이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1990년대 초 균형 상태에 도달하기 도 했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재차 확대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 국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러한 미국의 회복세는 일본의 독 일의 불황 등으로 인한 글로벌 수요의 부족으로 온전한 회복을 보였다고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일시적으로 경상수지의 균형을 이뤄낼 수 있었지 만, 근본적으로 글로벌 수요가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경상수지 균형이 지속될 수 없었다. 플라자 합의 이후 루브르 합의를 통해 추가적 인 달러화의 약세를 저지하고, 일본과 독일의 내수 부양을 통해 미국의 수출을 늘리고자 했던 데에서 일본과 독일을 포함하여 글로벌 경제의 새 로운 전환이 미국에게도 필요하게 되었다.
128) OECD, Economic Survey of Germany 1995~1996, p.15, Robert Brenner, 1998, p.414.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