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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금융 자유화와 금융 세계화

IV. 미국의 금융화와 역플라자 합의

1) 미국의 금융 자유화와 금융 세계화

레이건의 집권 시기였던 1980년대는 기존 산업 자본 중심의 경제에서 금융 자본 중심의 경제로 이행하는 과도기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이행은 포스트 브레튼우즈 시기의 국제금융통화체제에 서 여전히 달러 패권을 유지해야 하는 미국의 국가적 이해관계와, 날로 성장하고 있던 금융자본의 이해가 일치하는 것이었다. 브레튼 우즈 체제 붕괴 이후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자유롭게 된 국제금융통화체제에서, 급 격하게 확대된 국제 금융 거래의 거래 통화(vehicle currency)가 달러화 였기 때문에, 달러화에 대한 글로벌 수요 역시 급속하게 확대될 수 있었 다. 이러한 달러화에 대한 수요 급증은 1970년대 내내 흔들리던 달러화 의 위상을 뒷받침해줄 수 있었다.

1980년대에 미국은 플라자 합의와 루브르 합의를 통해 달러화 환율에 개입함으로써, 자국 경제의 조정 비용을 전 세계로 전가할 수 있었다. 그 리고 1980년대 초반의 제3세계 부채위기를 통해서 포스트 브레튼우즈 체 제의 메커니즘이 국제적인 금융 위기가 발생하면 국제 자본의 흐름은 안 전 자산을 향하게 되어 결국 미국에로 회귀하는 달러 환류 메커니즘이라 는 것도 분명해졌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달러화의 국제적 위상을 더욱 공 고하게 해 주었으며, 미국 경제가 금융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한 동인 이 되었다. 즉 달러 패권의 유지와 미국 경제의 금융화는 상보적 관계였 던 것이다.

달러 가치가 금 1oz에 35$로 유지되어야 하는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 괴는 달러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미국의 의무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닉슨이 금태환 정지 선언을 한 이후 미국의 관심사가 포스트 브레튼 우즈 체제에서도 국내 경제 정책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달러 패권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쏠렸던 것은 지극히 자 연스러운 일이었다.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는 브레튼 우즈 체제가 고수

했던 원칙 역시 해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정환율제는 변동환율 제로 대체되었으며,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어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훨씬 용이한 체제가 되었다. 그런데 브레튼 우즈 체제 수 립 과정에 있어 1930년대 대공황의 경험으로부터 세계 경제의 안정적 발 전을 위해서는 모두가 공멸할 수도 있는 ‘근린 궁핍화 정책(beggar thy neighbor)’ 정책을 회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공통된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즉 1930년대에 보호 무역을 추구하면서 자국 통화에 대한 경쟁 적 평가 절하를 했던 ‘통화 전쟁(currency war)’을 회피하려면 환율 안 정이 필요하다는 공통된 인식 하에 브레튼우즈 체제가 고정 환율제를 채 택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자국 경제 정책의 자율성 확 보가 중요하다는 것 역시 공통된 인식이었다.129)

그렇다면 ‘불가능한 삼위일체(impossible trinity)’라는 관점에서, 국가 의 정책적 자율성을 지키려면 환율 안정이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중 하 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브레튼우즈 체제가 고정환율제를 채택하면서 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를 가한 것은 대공황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하고 변동환율 제로 전환된 상황에서 국가의 자율성을 여전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 능한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의 이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했었다.

아울러 국제금융통화체제가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변화하게 되 면서, 변동환율제가 고정환율제에 비해 훨씬 용이하게 각국의 대외수지 조정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마치 금본위제에서의 ‘가 격-정화 흐름(price-specie flow)’ 이론에서 금의 유출입을 통해 각국의 대외 수지 문제가 조정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변동 환율제에서는 각국 의 국제수지 변동에 따른 환율의 변동이 금의 유출입과 같은 역할을 하 여, 국제수지 불균형이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일반화되었던 것

129) 브레튼우즈 체제 성립 과정에서의 논쟁 이슈들과 이후 포스트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개혁되어야 할 과제들에 대해서는 James M. Boughton and K. Sarvar Lateef eds., Fifty Years after Bretton Woods:the Future of the IMF and the World Bank (Washington D.C.: IMF and WB, 1995). 참조.

이다. 그러나 변동환율제에서 환율은 움직임은 예측이 용이하지 않았으 며, 또한 각국 경제의 ‘기초 상태(fundamental)’와 무관한 움직임을 보였 다. 이는 투기적 자본의 흐름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투기적 자본의 흐름 은 때로는 변덕스럽고, 때로는 비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였다. 이러한 자본의 흐름으로 인하여 변동환율제는 대외적 시장 압력으로부터 국내 경 제를 보호하기는 보다는 오히려 국내 경제를 새로운 국제적 제약에 종속 시켰으며, 투기적 활동을 증가시켰다.130)

국제적인 자본의 흐름은 때로는 환율의 차익에 의해서, 때로는 국가 간 이자율 차이에 의해서, 때로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의해서, 다양한 이유로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었으며, 급격한 방향 전환은 국제적인 금융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자본의 흐름은 한 국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해당 국가 통화의 과도한 평가절하를 야기했 다. 심지어 이러한 평가절하를 노리는 투기적 공격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금태환 정지 선언 이후 지속적인 달러화의 평가 절하는 달러화로부터의 국제적 이탈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이는 바로 달러 위기로 이어질 수 있 었다. 그런데 이렇게 지속적인 달러화의 평가 절하가 일어났을 때, 미국 의 무역 상대국들, 예를 들면 일본이나 독일은 달러화에서 이탈하여 엔화 나 마르크화에 몰리는 수요를 흡수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엔화 와 마르크화의 평가 절상으로 이어지게 되어 대미 수출을 통해 경제를 지 속적으로 성장시켜온 일본이나 독일의 수출 경쟁력이 하락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금태환 정지 선언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하 던 1970년대 초반과 중반의 이러한 진행 과정을 통해, 미국은 개방적인 국제금융통화 체제에서도 국내 통화정책 자율성이 유지될 수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개방적인 국제금융통화 체제에서도 달러화의 권 력 메커니즘이 작동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브레튼 우즈 체제 붕괴 이후 자유로운 자본 이동, 즉 자본시장의 자유화에 이해 관계를 갖게 된 것이었으며, 1974년 자본 통제 폐지 결정을 하게 된 다.131)

130) Helleiner, op.cit., pp.123-124.

131) 김기수, op.cit., p.578.

이러한 자본 통제 폐지 결정에는 당시 강세 통화국이었던 독일과 일본 의 자본시장이 폐쇄적이었고 낙후됐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개방적이 며 발전된 미국 자본시장이 외국의 돈을 끌어들이는 데 다른 국가들보다 는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역외시장의 경쟁 에서도 당연히 교훈이 있었다. 유로 달러 시장이 미국에게 매우 유리했음 이 확인되었고, 역외 시장 경쟁에서도 미국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음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132)

사실 볼커 전환은 미국 정치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미국은 자신들의 ‘구조적 권력(structural power)’으로 인 하여 새롭게 출현한 개방적 국제 금융 질서가 자신의 정책 자율성을 보존 하는 데 대단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8년, 1979년 달러 위기 당시 다른 나라 정부들과 민간 투자가들은 별안간 미 국의 경제 정책에 대외적 규율을 부과하려 했다. 이런 새로운 대외적 구 속에 직면해, 미국은 정책 자율성과 금융 개방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 에 없었다. 국제 금융의 압력이 부과하는 규율을 따르기로 한 결정은 후 자의 선택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제로 워싱턴 정책 입안자들은 1978년 말의 짧은 논의 이후로 자본 통제를 사용하는 선택지를 거의 고려하지 않 았다.133) 이러한 상황 전개의 출발점이었던 볼커전환에 대해 Strange는 전 세계에 메아리로 울려 퍼진 ‘통화적 총성(monetary shot)’이었고, 이 를 계기로 달러와 미국 금융 시장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으며, 세계 금 융 체제에서 미국의 중심성을 각인시켜 주었다고 했다.134)

1980년대의 상반기 동안 달러화 가치의 급상승에 기반하여, 독일과 일 본의 경제는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수출 주도적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 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볼커의 극단적 통화긴축과 고달러 정책으로 인해 위기에 몰린 미국 경제는 같은 기간 동안 자기 변신을 위한 주요 과정들 을 시작했다. 고비용, 저이윤의 공장과 설비 및 노동을 일소(다운사이징)

132) Helleiner, op.cit., p.113.

133) Ibid., pp.133-134.

134) Susan Strange, “Finance, information, and power,” Review of International Studies (1990), 16, p.268.

하여 군살을 뺀 제조업 부문은 생산성을 급격히 끌어올리면서 장기에 걸 쳐 수익성을 회복해 나갔다. 이 기간 동안 역사상 유례없는 임금 성장 억 제를 달성함으로써 미국 자본은 수익성 향상을 향한, 저생산성 서비스 분 야로의 대규모 전환을 수행할 수 있었다. 경쟁자인 독일과 일본은 이를 쉽사리 모방할 수 없었다. 아마도 이 가운데 가장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금융 부문이 국가 정책의 전폭적인 뒷받침에 힘입어 국내외 적으로 동시에 가속적으로 팽창했다는 점이다.135) 낮은 제조업 이윤율로 인하여 새로운 설비에 대한 장기 투자에 자금의 유입이 끊기면서, 사치재 소비는 말할 것도 없고 금융 및 투기 부문으로 자금이 몰려 들었는데, 여 기에는 일반적으로 부자들, 그 가운데서도 금융가들에게 특히 호의적인 국가 정책의 공공연한 정책이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136)

이러한 금융 부문의 팽창은 국제 민간 자본의 미국에로의 유입을 위한 제도 형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플레이션에 대항하 기 위해 통화 긴축을 시도한 것이 볼커 전환이었지만, 당시 미국의 은행 이나 기업들은 유로-달러 시장을 통해 미국에로 자본을 유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당연히 긴축 정책의 효과를 상쇄시키는 것이었기에 연준 은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게 된다. 연준은 유로 달러 시장에서 활동 하고 있는 은행들에 대한 강제적 지불준비금 축적을 각국의 중앙은행들에 제안했다. 그러나 유로 달러의 핵심 이해 당사국인 영국과 스위스가 반발 하고, 독일 역시 국내법상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입장을 표명하면서 1980 년 4월 바젤에서 열린 ‘국제결제은행(BIS,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 회의에서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137)

이렇게 되자 1981년 12월, 미국은 자국 금융기관의 대외 경쟁력을 강 화하여 유로 달러 시장과 기타 역외 금융 시장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내 비거주자를 상대로 하는 ‘역외 금융 시장(IBF, International Banking Facilities)’을 개설하고, 이 역외 시장에서 국제 은행 업무, 역외 금융 업 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IBF에는 조세와 외환에 대한 특전이 부여되어

135) Brenner, 2001, p. 290.

136) Ibid., p.335.

137) Helleiner, op. cit.,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