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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화 가치의 급격한 상승과 역플라자 합의

IV. 미국의 금융화와 역플라자 합의

2) 엔화 가치의 급격한 상승과 역플라자 합의

미국 스스로 달러화의 평가 절상이 미국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 변화를 보이고 있던 이 시기에, 국제적으로 달러화의 환율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한 사건들이 나타났다. 멕시코의 페소화 위기와 일본 엔화의 지속가 능하지 않은 가치 상승이 바로 그 사건들이었다.

흔히 ‘데킬라 위기’라고 부르는 멕시코 페소화 위기는 1994년 12월, 멕 시코가 페소화를 급격하게 평가 절하 한 이후 발생한 중남미의 공황을 일 컫는다. 1980년대 초의 부채 위기의 해결책으로 1989년 ‘브래디 채권 (Brady Bond)’이 제안되었다. 브래디 채권은 볼커 전환의 여파로 멕시코 를 비롯한 제3세계의 부채위기 해결 과정에서 1988년 말, 전 미 재무부 장관 브래디가 시장 지향적이고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며 채무 삭감 방식 을 도입한 새로운 외채 조정 방안인 ‘브래디 플랜(Brady Plan)’에서 제안 되었다. 브래디 플랜에 의해 각국의 채권은행은 메뉴 방식의 다양한 옵션 을 가질 수 있었고, 채무국은 외채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브래디 플랜에 의해 발행되는 브래디 본드는 고정 금리, 스텝 금리, 변동 금리 등 다양한 금리 형태를 취하면서, 만기는 대개 30년의 장기채권이 며, 미 재무부 제로 쿠폰채가 담보로 제공되었으며, 환매나 콜 옵션 조건 이 제공되었고, 채권 금액이 일부 삭감되었다. 동 방식에 의한 채무삭감 및 채무재조정을 위해서 채무국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해해야 했다. 브래디 본드는 경직된 상업 차관(신디케이트 론)을 유연한 채권으로 변화시켰으며, 채권은행들은 대출채권의 유통시장이 마련됨으로써 부실 채권을 정리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185)

그런데 멕시코는 브래디 채권을 통한 외채의 해결 과정에서 외채의 일 부를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환해야할 외채의 원리금은 여전히 상당 한 규모였다. 특히 1994년에 멕시코의 총 외채는 1,426억$에 달했는데, 이는 멕시코 GDP의 37.8%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 해에 상환해야 하는 외채 원리금 역시 210억$로, 멕시코 총 수출액의 26.9%에 달하는

185)김영석, “중남미 외채문제와 브래디 본드,” 『이베로아메리카』 제2집 (2000), pp.71-72.

액수였다.186)

당시 멕시코는 1990년대 초부터 개방화를 시도한 결과, 경상수지 적자 가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왔다. 질 좋은 선진국 제품에 비해 멕시코 제품 의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무역 적자는 확대되었고, 외채의 원리금 상 환 부담은 여전히 큰 상황에서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 었던 것이다. 멕시코는 이러한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을 해결하기 위해 자 본자유화 정책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상대적으로 높은 멕시코의 이자율을 노리는 많은 단기 자금들이 멕시코로 유입되었다. 그런데 멕시 코는 1988년 이후 시작된 금융기관 민영화 정책으로 1991~1992년 18개 은행에 대한 민영화가 단행되었으며, 그 결과 민간부문에 대한 신용은 1994년까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상업은행 대출은 연 25%, 주택금융은 연 67%, 신용카드는 연30%씩 증가하였다. 이러한 과다 대출은 결국 부 실대출의 문제를 야기하였다.187)

이러한 상황에서 멕시코로 유입되던 단기 자금들이 멕시코의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과, 미국의 이자율 인상 등으로 인하여 급격하게 유출되기 시 작하자, 페소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까지 시작되었다. 이에 멕시코 정부는 외환준비금으로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치아 파스 지역의 무장 봉기가 발생하면서 멕시코 정부는 12월, 페소화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게 되었으며, 결국 평가 절하를 결정하게 되자 외국 자본의 유출은 더욱 심각해져 페소화 가치는 급락하게 된다.188) 1994년 12월에 서 1995년 3월까지 페소화는 50% 이상 절하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부실 대출의 문제를 안고 있던 은행들의 자기자본 비율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으며, 상당수 은행이 도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189)

미국은 ‘데킬라 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이었던 1994년 1월, 멕시코, 캐 나다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North America Free Trade

186) 이내영, “페소화 위기의 원인과 멕시코의 대응, 그리고 그 이후 – 한국에의 교훈,”

『아태연구』 제5권, 1998, p. 91.

187) 김경수, “멕시코 경제위기의 교훈,” 『라틴아메리카 연구』 제13권 1호, 2000, pp.268-269.

188) 이내영, op.cit., p. 94.

189) 김경수, op.cit., pp. 269-270.

Agreement)’를 맺었다.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미자유무역협정’을 관 철시켰던 클린턴과 그린스펀은 이 위기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클 린턴과 그린스펀이 제안한 멕시코에 대한 구제 방안에 대해 미국 의회는 예산으로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재무부와 IMF 자금을 이용해 멕 시코에 400~500억$의 차관을 지원하고 3번에 나눠 상환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멕시코에 필요한 자금의 규모는 수천억 달러였기에 이것만으로는 멕시코의 혼란을 잠재울 수 없었지만, 미국의 금융가들은 이 지원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멕시코 국민들이 집과 전 재산을 잃었던 한 해 동안 시티은행은 8,100만 달러, J.P.모건은 4,000만 달러, 뱅크오브아 메리카는 1,000만 달러, 체이스맨해튼은행은 700만 달러를 벌어들였 다.190)

멕시코의 데킬라 위기 해결 과정에서 미국은 국제정치경제 시스템의 안 정을 위해 나섰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미국에 투입되었던 일본 자금의 본국 회귀가 나타났던 것이었다. 플라자 합의와 루브르 합의 이후 일본의 저금리와 고평가 된 엔화는 소위 ‘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를 불러왔다. 즉 일본에서 대출받은 자금이 미국의 달러 표시 자 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일본의 거품 붕괴는 일본 은행들에게 총 대출의 1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부실채권을 인수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거품 붕괴 이후 많은 금융기관들 이 파산했으며, 자산 디플레이션과 심각한 금융경색(credit crunch)으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 경기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엔 캐리 트레이드’로 미국에 머물렀던 일본 자금들은 금융 경색에 따라 대출 자금의 변제를 목적으로, 혹은 대차대조표의 개선을 목적으로 미국 에서 다시 일본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1994년의 소위 ‘엔 고 불황’ 시기를 거치면서 또 다시 일본으로 회귀하는 자본 유출이 나타 났다. 그런데 멕시코의 데킬라 위기 직후 달러화가 평가 절상되면서 또 한 번의 (미국으로부터) 일본 자금 유출이 나타나게 되었다. 미국으로부터 의 일본 자금 유출은 결국 달러화를 팔고 엔화를 매입하는 것이었기에,

190) Batra, op.cit., pp.203-205.

이러한 미국으로부터의 일본 자금 유출로 인하여 엔화는 일본의 장기적인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평가 절상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의 무역 적자 문제 해결을 위해 1980년대부터 꾸준히 협 상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시장 개방 속도는 미국의 입장에서 만족 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1993년 12월, 우르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 간의 무역 긴장은 해소되지 않았다.

1994년 겨울까지 클린턴 행정부가 ‘양적 목표(quantitative targets)’에 대해 일본을 압박하면서 미국과 일본 간의 양자 관계는 악화되었다.

1994년 3월, 클린턴 행정부는 지난 부시 행정부에서 기간이 만료되었지 만 갱신되지 않았던 슈퍼 301조를 행정 명령(executive decree)으로 재 도입했다.

미국은 일본과의 양자 무역 균형과 일본의 개별 항목 수입 규모조차도 양자 협상의 정당한 목표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만일 일본이 대규모 양자 무역 불균형이라는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해 미국이 만족할만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면 (처벌적 관세와 같은) 보복을 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재도 입된 슈퍼 301조가 1995년 1월에서 4월까지 미국 자동차와 부품 산업에 대해 일본 시장을 개방하기 위한 토론의 근거가 되었다. 이 협상 과정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고 때로는 험악하게 진행되었다.

1994년, 미국의 경제 지표는 미국 경제의 성장이 지속되고 있다는 신 호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엔-달러화, 마르크-달러화 환율의 변동성이 확대되었으며, 달러화의 평가 절하가 다시 추세적으로 나타났다. 달러화 의 가치를 평가 절상시키려는 노력은 1994년 5월에 시작되었다. 1994년 봄, G-7 국가들과 시장에 대한 미국 재무부의 주장은 달러화의 평가 절 하가 근본적인 경제 펀더멘털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는 것이었다. 일본과 독일은 이러한 분석에 동의했으며, G-7 국가들 내에 서도 미국의 경제적 상황에 비추어 달러화는 평가 절상되어야 한다는 합 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에 대한 구두 개입에도 불구하고 달러화 는 잠시 평가 절상된 후 곧 평가 절하 추세로 회귀했다. 시장은 G-7 재 무부 장관들과 중앙은행장들의 분석을 거부한 것이었다. 특히 미국 무역

대표부는 일본 시장이 본질적으로 폐쇄되어 있어 미국의 무역 수지 적자 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였다. 이는 미국이 약한 달러를 선호할 것이라는 신호를 시장에 준 셈이었다.191)

1994년 9월 27일 ‘미국 연방 공개 시장위원회(FOMC, Federal Open Market Committee)’ 회합에서 연준이 이자율을 동결하게 되자 통화 정 책에 대한 연준의 입장이 물가 압력을 막기에 부적절하다는 시장 참여자 들의 우려가 점증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단기 이자율과 장기 이자율 이 해외 이자율에 비해 낮은 상태에서, 시장 참여자들은 이러한 금리 격 차가 1994년 동안 달러화 평가 절하의 원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 에, 연준이 이자율을 동결하는 결정을 하게 되자 시장 참여자들은 향후 달러화가 추가적으로 평가 절하될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었다.

10월 25일, 1 달러 당 96.40 엔과 1.4860 마르크로 마감된 달러화의 가치는 연중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렇게 달러화의 약세가 지속되 자 1994년 10월 31일에서 1995년 5월 31일 사이에, 미국은 G-7 국가들 과의 협력적 개입에 대한 동의를 구하였으며, 통화 당국은 이후 4차례 외 환 시장에 개입했다. 11월 2일, 뉴욕 연준 외환 창구는 마르크와 엔화 대 비 각각 8억 달러를 매입했다. 개입과 더불어 번스텐 재무부 장관은 “나 는 달러화의 최근 움직임이 미국의 강력한 투자주도 회복을 보이고 있는 경제 펀더멘털과 세계에서 경쟁하는 미국 기업들의 크게 강화된 능력에 부합하지 않다고 믿는다. 정부는 낮은 인플레이션 하에서 경제 능력을 확 장하고 회복을 지속하는 건강한 경제 정책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외환 시장 추세의 지속은 미국과 세계 경제의 생산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더 강한 달러화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약화시키고 미국인들의 생 활수준을 개선하며 투자를 촉진할 것이다. 우리는 G-7 국가들과 협력하 여 향후의 전개과정을 긴밀하게 감시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번스텐 장관의 입장에 대해 독일의 분데스방크 티트메이어(Hans

191) Andrew Baker, “American power and the dollar: The constraints of technical authority and declaratory policy in the 1990s,” New Political Economy, Vol.11, No.1 March 2006, p.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