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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주본 사시찬요’와 강희맹의 ‘사시찬요초’를 대조한 결과 강희맹 은 한악의 원본 사시찬요에서 극히 일부분만 인용하였을 뿐 대부분은 농 상집요(農桑輯要) 쇄쇄록(瑣碎錄), 월암종죽법(月庵種竹法) 등 중국의 여 러 농서에서 초록하고 이에서 부족한 것은 우리나라의 관행농법을 보태 어 편찬한 것이었다.
결국 강희맹의 ‘사시찬요초’는 편찬방식만 월령식농서로 한악의 ‘사 시찬요’를 따랐을 뿐 주된 내용은 중국의 다른 농서와 우리의 재래농법 을 인용한 것이다.
끝으로 강조할 것은 15세기 후반의 우리 농학이 식물의 감성(感性)이 나 가수(嫁樹) 등 높은 수준의 농업과학을 농업교재로 ‘사시찬요초’에서 밝혔다는 것은 비록 그 내용이 중국농학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높 이 평가해야할 내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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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화학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일찍 이 화란과 교류가 많았던 일본은 화란에서 전수된 의학을 통해 서양의 화학을 알게 되었고 우다가와요인(宇田川榕菴)은 1837년부터 10년에 걸쳐 세이미가이소우(舍密開宗)라는 화학책을 편찬하였다. 여기서 세이 미(舍密)라는 일어는 화란어 세이미(Chemie 화학)를 일어로 차음한 용 어다. 이때 여기에 산소, 수소, 질소, 탄소 등의 원소명과 산화, 환원, 용 해, 결정 등의 화학적 용어가 창안되었는데 이 학문을 화학(化學)이라고 처음으로 이름 붙인 사람은 가와모도 고민(川本辛民)으로 그가 1861년 에 쓴 화학신서(化學新書)란 책을 쓰면서부터였다. 그 후 일본에서 화학 이라고 통일하여 쓰게 되었는데 이 시절의 일본화학이 우리나라에 도입 된 사실은 전혀 기록이 없다.
우리나라에 화학이란 학문이 처음 도입된 것은 1885년 개화업무를 총괄하던 통리교섭사무아문 산하에 광혜원(廣惠院 후일 제중원으로 개 칭)이란 서양병원을 개설한데서 비롯된다. 갑신정변 때 칼에 베인 민비 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고종의 환심을 얻은 미국인 선교사 알렌 (Horace N. Allen 安連)의 건의로 광혜원이 개설되자 알렌이 이 병원 운영의 주무자가 되었다. 그는 플로리다의대 출신의 의료선교사였다. 달 레(Dallet.e.e)가 쓴 「조선교회사」에는 이 광혜원에 그해 도착해 새로 부임한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후일 연대 설립자)가 알렌을 도와 의학교육의 한 분야인 화학교육을 담당하였다 하니 이 때 처음으로 화학 이란 학문이 우리나라에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다음해인 1886년에 개교한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도 화 학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미수호조약후 미국을 시찰하 고 돌아온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신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개설을 건 의하여 육영공원이 개원되면서 헐벗(Hullbert), 벙커(Bunker), 길모어 (Gilmore) 등 3인의 미국인 교수를 초빙하였는데 이중의 한 분이 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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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새로운 학문인 화학을 강의하였을 것이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의 화학은 1885~6년경 미국인에 의해 처음 도입되고 교 육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화학적 용어로 산소, 망간 등의 용어는 화학이 정식으로 도입되기 이전에 앞질러 도입되었다. 실학자 최한기(崔 漢綺 1803~1877)는 1834년 육해법(陸海法)이란 양수기관계의 수리서 를 비롯해 년도 미상의 농정서(農政書)와 농정회요(農政會要) 등 세 농서 를 편찬한 분이다. 그는 또 지구전요(地球典要)라는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책도 편찬하였다. 이 「지구전요」의 제8권을 보면 온도계, 습도계와 산소, 수소, 질소, 황산, 질산, 염산 등의 화학용어가 풀이되어 있고 서양문자인 26개의 알파벳도 소개되고 있다.
또, 우두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은 1887년 갑신정변의 잔당으로 지 목되어 전남 강진의 신지도에 유배된 바 있다. 이때 할 일없는 귀양살이 에서 병충해가 많은 벼농사보다 병충해가 없어 재배가 용이한 보리농사 로 식량증산을 꾀하여야 된다고 1888년 중맥설(重麥說)이란 보리재배전 문서를 편찬하였다. 이 책에 공기의 구성을 풀이한 것을 보면 산소를 양 기(養氣), 질소를 담기(淡氣), 이산화탄소를 탄기(炭氣)라고 중국식 화학 용어를 쓰고 있다.
또, 1904년에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농학신서(農學新書)라는 신식 농서를 편찬하였는데 그 제1권을 보면 여기에도 양기, 경기, 담기 등 중국식 화학기호가 풀이되고 있다. 이 중국식 화학용어는 중국의 화 학을 개척한 중국의 화학자 서수(徐壽 1818~1884)가 만든 것이다. 서 수는 아편전쟁 후 전통적 중국학문이 무력함을 절감한 나머지 서양의 과 학서적을 탐독하며 서양의 새로운 과학을 중국에 도입하는데 앞장섰다.
이 서수에게 화학을 심어준 사람은 영국인 선교사 합신(合信 Benjamin Hopson)이었다. 합신은 자신이 저술한 박물신편(博物新編)을 서수에게 읽도록 하면서 서수에게 화학에 심취토록 교육한 것이다. 이때 서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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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기호를 일본과 달리 산소를 양기(養氣), 수소를 경기(輕氣), 질소를 담기(淡氣)하는 식으로 독자적 명칭을 창안한 것이다. 이 중국식 화학기 호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최한기의 「지구전요」, 지석영의 「중맥설」, 장 지연의 「농학신서」에 인용되었는데 그 도입경로는 알 수 없고 그 이후의 우리농서에 더 이상 반영되지 않은 채 단절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 화학용어 는 모두 일본식 용어들이다. 그것은 일본을 다녀온 안종수(安宗洙)가 1881년에 편찬한 농정신편(農政新編)을 국가가 세 번에 걸쳐 영농교재 로 인쇄 배포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광혜원에서 화학교육을 하기 4년 전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1886년 일본과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제1차로 김 기수(金綺秀), 2차로 김홍집(金弘集) 등의 수신사가 일본을 다녀와 일본 의 개화실상을 보고 돌아왔다. 그 후에 범어사(동래)의 개화승 이동인(李 東仁 1849~1881)이 1879년 밀항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대사찰 홍 간지(本願寺)에 10개월간 머물면서 일본이 우리보다 한발 앞서 서구 문 물을 도입하여 개화한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고 이를 조정과 개화파에게 알리자 우리 조정은 조직적으로 일본의 실상을 파악코자 1881년 6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이때 세 관을 주로 견문하는 담당은 후일 농상공부대신이 된 조병직(趙秉稷)이었 다. 그 조병직의 수행원이 23세로 진사였던 안종수(安宗洙)였다.
안종수는 일본에 4개월간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일본의 신진 농학자 쓰다센(津田仙)을 만났다. 쓰다는 화란어와 영어에 능통하여 1873년 오 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서 개최되었던 만국박람회에 일본대표 오까다 (岡田芳男)의 통역 겸 보조자로 파견되어 그곳에 3~4개월간 주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쓰다는 후이부랭크(Hooibranke 荷衣白蓮)라는 화란 의 실험농학자를 만나 그로부터 서양의 신농학을 집중적으로 전수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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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다. 여기서 서양의 실험농학(實驗農學)이란 동식물을 화학적으로 분석한다거나 생리현상을 실험을 통해 규명한다는 뜻에서 붙인 용어로 경험을 통해서만 농업지식을 얻는 동양의 경험농학(經驗農學)과 대칭되 는 용어다.
쓰다는 일본에 돌아와 서양농학을 소개하는 농업잡지도 발행하고 흥 농사(興農社)라는 농업학교도 개설하였으며 농업삼사(農業三事)라는 서 양농학서도 편찬하였다. 안종수가 만난 것은 바로 이 쓰다였다. 쓰다는 안종수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자신의 실험농학 지식을 안종수에게 친절 히 전수하면서 안종수가 귀국할 때는 일어로 된 서양 농학잡지와 일본농 서 등을 있는 대로 모두 기증하였다.
쓰다가 안종수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아마도 장차 안종수를 통해 그 가 신봉하는 개신교를 한국에 선교코저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쓰다 가 족자에 쓴 예수의 산상보훈을 선물하였을 때 안종수가 거절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안종수는 쓰다의 실험에 바탕을 둔 서양농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함이 시급한 구국의 길임을 인식하고 5개월간 두문불출하며 편찬한 농서가 1881년 12월에 완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농학서 농정신편(農政新 編)이다.
그 내용은 식물도 호흡을 하되 뿌리에서도 하며 식물도 암수가 만나 야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 그리고 영양과다로 위로 곧게 웃자란 가지는 질소과다로 열매를 맺지 않으니 구부려 도장을 억제함으로서 탄소 함량 을 높여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는 것 등이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식물 생리적 설명에다 현미경으로 확대한 벼꽃이나 보리꽃 그림 등이 있어 이 해하기 쉽도록 편찬되어 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제1권의 토양물 리와 토양화학에 관한 풀이였다. 돋보이는 것은 화학용어인 마그네슘, 인산, 유산, 규산, 산화철, 소다 등이 풀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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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우리 농학에 비로소 화학이 침투한 것이다. 이 「농정신편」에 서문을 쓴 분은 후일 학부대신이 된 신기선(申箕善)으로 “도(道 공자 맹 자의 도)는 만고에 변할 수 없어도 기(技)는 비록 오랑캐의 기술이라도 국민에게 이롭다면 도입해야 한다.”고 썼지만 이 「농정신편」은 곧장 인 쇄 배포될 수 없었다. 서양농학은 예수교 문명의 소산이라 서양농학을 도입하면 뒤따라 사교(邪敎 예수교)가 들어와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 후 이 오랑캐의 농서는 3년 반을 끌다가 지석영 등 개화파의 건의 가 여물어 1885년 5월에 가서야 국가가 4백부를 인쇄 배포하고 1895 년 10월, 그리고 일제의 식량증산책으로 1931년에 일제총독부가 거듭 인쇄 배포되어 널리 영농교재로 활용하게 되고 화학이 농학의 한 부분이 되었다.
농업교육에서 화학이 한 과목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04년에 개교한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에서였고 1909년에 개교한 진주, 공주 등 6개 지방농업학교에서였다. 그 교재는 산질되어 현재 알 길이 없으나 화학비 료에 관한 전문교재는 1909년에 김달현(金達鉉)이 편찬한 응용비료학 (應用肥料學)으로 필자 기증으로 농촌진흥청에 소장되어 있다. 이로서 일제강점기 이전에 화학은 우리 농학 속에 한 부분이 되었다.
화학이 농업에 크게 기여한 분야는 개화기에 비롯된 화학비료였고 개 화기 이후의 농약과 발효화학분야였다. 식물생리학이 발전되자 식물체 를 분석하다보니 작물마다 질소 인산 가리의 함량이 타 요소보다 월등히 높아 이를 작물의 요구대로 충족시켜주다 보면 종래의 유기질비료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질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에 인공으로 화학비료를 만들어 작물의 요구에 응하는 첫 사례가 1905년 독일에서 개발된 질소비료공장이었다. 그 후 여러 품목의 각종 화학비료 생산 기술이 계속 개발되었는데 이 다양한 화학비료는 세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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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공급에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가장 크게 기여한 셈이다.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 초기에 서울과 부산에 영세한 규모의 화학비 료공장이 있었다하나 이를 확인할 자료는 없다. 암모니아는 독가스로도 이용할 수 있어 일제는 조선에 비료공장 설립을 꺼려 왔다고 한다. 그러 다가 1931년 만주 침략을 앞두고 그 전진기지인 조선의 경제기반을 다 지고자 1927년에 함경남도 함흥에 대규모의 질소비료공장을 건설하였 다. 조선의 질소비료 80%는 이 공장에서 생산 공급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특히 동란 후의 한국은 극심한 비료부족에 시달리다가 1964 년 삼성이 대일차관으로 울산에 한국비료를 건설하였으나 삼성의 사카 린 밀수가 탄로나자 여러 곡절 끝에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였다.
그 후 충주비료를 거쳐 1970년대에 영남화학, 남해화학 등의 대규모 화학비료공장이 속속 건설되어 화학비료 수급의 어려움은 해소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