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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초기, 일거양득이었던 잠사업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146-152)

최근 우리나라의 잠사업은 비단실을 생산하기 위한 잠사업이 아니라 동충하초 등 기능성식품을 생산하는 사업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1960~70년대에는 비단실 생산으로 농가소득증대와 외화획득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유망한 사업이었다.

잠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나 1960~70년대의 우리 농촌에는 과잉노 동력이 넘쳐흘렀다. 공업화가 안 된 시절이라 농촌이 유휴인력을 흡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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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사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잠업기술은 기록상 고려초 이후 우 리 농민이 천 년간 익혀온 기술이라 낯선 산업도 아니었다. 이에 더하여 누에고치에서 생산된 생사(비단실) 수요는 국제적으로 매년 증가일로에 있었다.

이에 착안한 5.16군사 혁명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 의 중요정책 사업으로 잠업증산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예컨대 제2차 경 제개발5개년계획(1967~71) 중 잠업증산계획의 규모를 들어보면 5개년 간 98억 원의 투자와 융자를 통해 5억 5,000만주의 뽕나무를 생산·식재 하여 목표연도인 1971년에는 누에고치 4만M/T를 생산하고 비단실 4,800M/T를 수출함으로써 연간 6,7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계획이었다. 1965년 국가전체 외화획득액(수출액)이 겨우 1억 7,500만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단일품목으로 생사의 수출기여도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잠업증산계획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정부예산을 확 보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이 뽕나무를 심도록 하려면 뽕나무묘목 구입비 를 정부가 보조해주지 않는 한 가난한 농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묘목을 구입해 심을 수가 없었다. 당시는 공무원 월급도 제때 주지 못했던 재정 형편이라 정부예산으로 뽕나무묘목 구입비를 충분히 확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참고로 1967년의 정부예산으로 책정된 묘목 보조금은 겨우 2억 9,000만 원뿐이었다.

당시 누에고치를 사서 비단실을 만들어 수출하는 제사공장 면허를 받 고자 하는 자본가들이 많았다. 이미 제사공장을 갖고 있던 자본가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떼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력이 있는 사람 은 대부분 권력의 줄을 타고 제사업면허를 받고자 농림부에 강력한 압력 을 행사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때의 농림부 장관은 서울대 교수로 있다 가 장관으로 발탁된 박동묘(朴東昴, 1966.2.~67.6)씨였다. 그는 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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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목을 구입할 정부예산은 확보하기 어려운데 뽕잎을 먹고 생산한 누에 고치를 가공할 자본가들이 많다면, 그 자본가들이 직접 뽕나무묘목을 사 서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그 뽕나무 잎을 먹고 생산된 누에고치를 농민으 로부터 사서 제사를 하는 안을 생각해냈다.

즉, 정부가 하던 뽕나무묘목대 보조를 자본가가 대신하고 그 뽕나무 에서 생산된 고치를 가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 추진사업에 민간자본 을 유치하는 것으로 이때 잠업에서의 민간자본유치가 우리나라 경제개 발에 있어 최초의 민간자본유치가 아니었나 기억된다. 이렇게 되면 제사 업면허를 받고자 하는 정치권력의 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확보가 어려운 정부예산의 상묘대보조금 책정에도 숨통이 트일 수 있었기 때문 이다.

경제성 있는 최소한의 공장을 운영하려면 제사기(製絲機) 100대가 있 어야 했는데, 기계 100대가 1년간 가동하려면 300ha의 뽕밭이 필요했 다. 따라서 제사업면허를 원하는 자본가가 300ha에 대한 뽕나무대금과 지도원 월급 등을 공장을 세울 군수명의로 예치한다면, 2년 후 공장을 가동한다는 조건으로 제사기 100대 규모의 제사업면허를 허가하겠다는 요지였다. 이 제도는 1967년 5월에 공표하였는데 만 2년만인 1969년 5 월, 뽕나무대금으로 확보한 민간자본유치총액은 모두 7억 원이었다. 참 고로 국고보조금으로 확보한 1968년의 뽕나무보조금은 9억 2,000만 원, 1969년에는 8억 원이었으니 민간자본의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잠업증산에 둘째로 어려웠던 것이 우수한 누에씨를 확보하는 것이었 다. 1960년대만 해도 일제가 보급하였던 잠종을 그대로 사용하는 실정 이었다. 최근에는 유전자조작으로 누에씨 육종이 놀랄 만큼 발전했지만 1960년대만 해도 6.25동란으로 시험시설이 모두 파괴되어 복구도 미처 못한 처지라 새로운 누에씨를 육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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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누에씨는 고치 한 개의 실을 풀어 보면 그 길이가 약 800m 내외였으나 개량된 외국종은 1,200m까지 나가는 품종이 있다는 것이 었다. 그때 다행히 서울대학교나 잠업시험장에는 일제 때 일본 고등잠사 학교나 잠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재학시절 일본 인 동창생 중 당시 일본의 잠업시험장이나 잠종장에 근무하는 이가 있어 동창관계를 이용해 일본 누에씨를 은밀히 분양받도록 추진하였다. 마치 문익점이 600년 전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경우와 같이 일본정부가 모르게 누에씨를 도입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도 국제시장에 생사를 수출하였기에 국제경쟁을 고려해 누에씨를 금수품목으로 정하여 국외반 출을 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누에씨의 도입은 쉬운 게 아니었다. 누에씨는 겨울철 냉 장고에 보관해두었다가 뽕잎이 필 무렵 꺼내어 부화시키는데, 가령 누에 씨를 요행히 분양받았더라도 수송 도중 기온이 올라 누에씨가 부화해버 리면 종자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에씨 수송은 신속하고 은밀 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이용한 것이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나 라 대사관에서 본국에 보내는 외교행낭편을 이용한 것이다. 국제관례상 외교행낭은 일본의 세관에서도 열어볼 수 없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일 본에서 분양받은 누에씨는 일본 비행장에서 외교행낭을 부칠 때 얼음상 자에서 꺼내 외교행낭에 넣어 보내고, 2시간 후 김포공항에서는 잠업시 험장 연구진이 휴대용 얼음상자를 들고 대기하다 인계받는 식의 과정을 거쳤다.

그 후 우리나라 육종기술을 향상시키고자 일본 잠업시험장의 유전생 리부장으로 있다가 은퇴한 스미스(淸水)씨를 초빙하여 1년간 육종지도 를 받은 적이 있다. 그가 일본으로 떠날 때 감사의 표시로 송별만찬을 갖 은 바 있는데 그가 답사를 할 때 “한국의 누에씨는 아무리 보아도 일본 의 누에씨와 닮았다”고 하였다. 이때 좌중 모두 당황하였으나, 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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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말로 보아 스미스씨는 일본잠종이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나라로 유입된 것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2차 잠업증산 5개년계획이 활발히 추진되던 1968년의 어느 날, 미 국의 듀폰사가 70억 달러의 연구비를 들여 인조실크를 개발하였다. 이 사실이 타임지에 보도되자 국내 매스컴이 이를 인용하여 대서특필하였 고 인조실크는 당시 세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인조실크 는 비단실크와 통기성, 보온성이나 흡습성이 꼭 같을 뿐 아니라 천을 맞 대고 손으로 비벼보면 그 마찰음까지도 비단실로 만든 천을 비빌 때와 같은 소리가 난다는 보도였다. 이 무렵 이 인조실크의 영향 때문인지 확 실하지 않으나 국제생사가격이 일시 좋지 않은데다 예년과 같이 국제생 사가격이 계속 오를 것으로 가정하고 누에고치 가격을 전년보다 15% 인 상한 까닭에 생사수출이 한때 현저히 감소한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청 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 하에 개최하는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대 책을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잠업문제로 대통령까지 근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시절의 잠업증산은 국가적 과제였기 때문에 대통령뿐 아니라 영부인 육영수 여사도 권잠(勸蠶) 행사로 1년에 두 번 뽕밭에 나아가 손 수 뽕잎을 따고 누에치는 행사를 하였다. 이 같은 행사는 조선시대 때 왕 비가 직접 뽕밭에 나아가 뽕잎을 따고 누에를 기르는 친잠의례를 본뜬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 후 얼마 안 되어 국제생사가격이 회복되어 염려한 만 큼의 어려움은 없었다. 또 인조실크도 처음 화제에 오른 만큼의 인기가 없었던지 다시 국제적으로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오늘날과 같이 잠사업 이 침체된 것은 1980년대 말부터 국내 노임이 급상승한데다 상대적으 로 임금이 싼 중국과 인도가 대대적인 잠업증산을 통해 국제생사가격 상 승을 억제하여 우리나라 잠사업이 국제경쟁에서 패한데 기인한다. 안타 까운 일이나 우리 실크가 경쟁력이 없는 데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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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군사혁명정부가 경제건설을 하던 초기에 잠업이 간절히 필요하였던 외화획득의 선봉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농정사에 길이 남을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2015. 7. 세계 식품과 농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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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조선시대의 농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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