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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수업료 치른 대단위 한우목장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137-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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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데 남도영(南都泳)이 쓴 ‘조선시대 제주도 목장(한국사연 구4)’ 등 3편의 논문과 나까야마(中山蕃)의 ‘제주마에 대하여(1931)’ 마 쓰마루(松丸志摩三)가 일본농회보에 기고한 ‘조선우마사’등 7편의 논문 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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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181두의 소를 구해왔다. 방역기술이 없던 조선시대에 국영목장에 서 더 많은 한우를 확보해두어야 했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국영목장에서 군마의 필요성이 없어지자 대한제국 말기 에 모두 폐장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조성한 소규모 낙농목 장들이 있었는데, 그중 아까보시(赤星鐵馬)가 1915년 현 천안시 성환읍 에 개설한 낙농목장(500ha)이 가장 컸다. 아까보시는 일본 귀족으로 영 국에 군함을 사러 갔다가 낡은 배에 색칠만한 군함을 사온 독직사건으로 인해 일본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자 성환에 와서 목장을 조성한 것이 다. 이곳은 현재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광복 후 대부분의 목장들은 소규모 낙농(젖소)목장이었다. 하지만 5.16 군사혁명 이후 쇠고기 수요가 점점 늘어가자 1969년 민간자본으 로 충남서산에 2,127ha의 초대형 육우목장이 설치되었다. 주된 사업목 적은 한우 번식우(송아지)의 생산이었다.

농림부는 이 사례를 본떠 육우도 민간자본을 유치하여 젖소목장과 같 이 육성코자 1974년 5월 재력이 있는 우리나라 기업인 45명을 농림부 회의실에 초청하여 대단위 육우목장을 조성토록 권하였다. 정부는 법인 세, 소득세 등 5종 세금 면제와 국공유림에 목장을 개설할 경우 초지 조 성이 완료되는 대로 국공유지의 불하 등을 지원키로 했다.

이 시책은 2, 3차 산업에서 얻어진 기업이윤을 자금이 부족한 축산분 야에 유치하여 쇠고기 공급을 늘리자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부수적 으로 낙후된 산간오지 개발을 통해 지역의 균형개발에도 기하자는 복안 이었다. 목장이 조성되려면 산간오지까지 도로, 교량, 전기, 전화 등의 기초시설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에 목장이 설치되면 인근 지역사회개발 도 수월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사업 초기에는 한진그룹, 삼양라면, 두산그룹, 한일시멘트 등 20여 개의 대기업들이 활발하게 참여했으나, 40여 년이 경과한 현재, 남아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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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대목장은 대관령의 삼양목장, 한일목장과 제주도의 제동목장 등 소수 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육우목장이 아닌 대부분 자금회전이 빠른 젖소목 장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정책의 실패라 할 수 있다.

첫째로 대단위 육우목장을 기획하던 1974년만 하더라도 국내 쇠고기 수급은 어디까지나 자급자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단위 육우목장 사 업을 추진한 지 2년만인 1976년,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쇠고기를 각각 500톤 씩 총 1,000톤을 수입하게 되면서 쇠고기 자급계획은 무너져버 린 것이다. 쇠고기 가격이 물가인상의 선도품목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쇠고기를 수입할 경우 국내의 대단위 육우목장들이 쇠고 기 수출국의 육우목장들과 경쟁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선 국내 토지가 격이 외국의 광활한 토지에 비해 턱없이 비싸고, 각종 생산자재들도 경 쟁이 안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대단위 육우목장들은 자본의 회임기간이 길어 자금회전이 빠 른 상공업에 길들여진 대기업주들이 사업에 착수하자마자 이내 손을 들 고 사업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넷째는 산지개발에 따른 관계 법 개정이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산림법 시행령에는 국공유림을 개인에게 임대할 때 임 대료가 지가종율제(地價從率制)로 되어 있었다. 이 말의 뜻은 땅값이 비 싸면 임대료도 비싸다는 뜻이다.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의 오지는 원시 림으로 있을 때 땅값이 얼마 안 되지만 도로와 교량을 설치하고 전기를 놓아 목장을 조성하면 땅값이 천문학적으로 오르게 된다. 땅값이 오르면 임대료도 오르기 때문에 목장주의 입장에서는 자기 돈을 들여 땅값을 올 리고 본인이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게 된 것이다. 기업인들은 정부에 속 았다는 항변이 대단하였다.

당시 산림청은 농림부산하에 있지 않아 법 개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지 지 않았다. 1973년 경찰력을 동원해 산림을 보호한답시고 산림청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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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부 산하로 이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부처 간의 옥신각신 끝에 목장 조성에 한해 국공유지 임대료를 사업 착수 당년 임대료로 고정하기로 산 림법 시행령을 개정하였지만, 이미 기업인들의 목장조성의지가 상당부 분 감소한 후였다.

우리나라의 낙농업 개발에 독일과 합작한 한-독 낙농시범목장과 뉴질 랜드와 합작한 한-뉴 낙농시범목장은 성공적인 기여를 하였다. 낙농가 가 젖소를 기르기 전 이 시범목장에서 수개월씩 교육과 실습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적에 비추어 육우도 시범목장을 설치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1971년 4월 호주의 지원으로 남원군 운봉면에 한-호 면양 시범목장을 설치한터라 외국의 선진기술 도입으로 농경우에서 차츰 육우화 되어가는 한우의 사양 기술개선에 크 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

다행히 뉴질랜드와의 통상회담 때 한-뉴 육우시범목장 설립이 합의되 어 우여곡절 끝에 1974년 6월 대관령에 육우시범목장이 개설되었다. 낙 농시범목장은 반관반민이 사업 주체였으나 면양시범목장과 같이 육우시 범목장은 국립종축장의 지장(支場)형식으로 관청이 운영주체였다. 이곳 에 초빙된 뉴질랜드 전문가는 당연히 교사겸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뉴질랜드가 낙농시범목장뿐 아니라 육우시범에까지 인심 좋게 제나 라 돈을 써가며 합작해 준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축산 은 뉴질랜드 경제의 8할에 기여하고 있었다. 축산물은 연방 16개국으로 수출되며 부를 누려왔으나, 영국이 구주공동체(EC)에 가입하게 되자 영 국에 수출하던 축산물을 우리나라에 수출코자한 것이다. 그 예로 당시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 합작으로 치즈 공장을 설치하되 원료는 절반 뉴 질랜드에서 가지고 오기로 협의가 진행 중이었다.

이 육우시범목장은 당시 힘써 추진하던 대단위 육우목장조성 사업과 맞물려 활발한 기술연수를 통해 설치목적을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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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믿었으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부업으로 한두 마리씩 기르는 양축가들은 굳이 기술연수를 받을 필요 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조성되어 가는 대단위 목장들은 사업 착 수 당시부터 새삼 기술연수를 받을 필요조차 없는 대학출신의 고급기술 자들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연수생들은 소수밖에 배출되지 않았으며, 시범목장을 통 한 경영기법개선이나 사양기술보급은 거양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대 단위 목장들도 자기자본으로 막대한 투자를 했으나 한우번식이나 육성 우 사업은 투자에 비해 이윤이 너무 적었으며, 조성 당시의 여러 어려움 때문에 새로 착수하려는 신규 투자자가 없었다.

가령 더 있었다 하더라도 정책상 쇠고기 수급에는 큰 보탬이 되지 않 는다고 믿었다. 가령 1,000두 규모의 목장 10개가 더 있어도 전국의 한 우통계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대단위 목장은 한때 반 짝한 거품사업에 불과했다. 어찌 그뿐인가? 한우번식 및 육성우 사업에 남는 이윤이 별로 없자 대부분 목장들은 경영이 안정된 낙농목장으로 전 환되었다.

결국 우리나라의 한우증식 및 육우사업은 한두 마리 부업축산이나 중 소경영의 목장들이나 할 소규모 사업이란 교훈만 우리에게 남았다. 너무 나도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얻은 교훈이었다(2015. 3. 세계 식품과 농수 산).

3.5. ’70년대 양돈파동에서 얻은 것

1960년대만 하여도 우리나라 축산은 부업 수준이었고 사료도 곡류를 도정할 때 부산물로 나오는 강피류(糠皮類)가 전부였다. 60년대 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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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배합사료가 생산되었지만 배합도 기계로 하는 게 아니라 일일이 삽 으로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축산의 비중은 파격적으로 수직 상승해 2013년 기준 축산물 생산액은 농림업 총 생산액 46조 6,500억 원의 35%를 차지하는 16조억 원에 이르고 있다. 농림부의 명칭에 축산을 넣 어 농림축산식품부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축산의 범위에는 여러 가지 축종이 있다. 그 중 돼지의 생산총액만을 보면 무려 5조억 원이나 되어 생산액이 8조 5,000억 원으로 우리 농산 물 중 첫째가는 쌀 다음가는 품목이 되고 있다. 70년대만 하여도 양돈산 업이 이렇게 커질 것이라고는 어떤 농업경제학자도 예측하지 못했다.

양돈산업이 부업양돈에서 전업양돈을 거쳐 기업양돈으로 빠른 속도 로 전환된 시기가 1970년대에서 80년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따라서 그 무렵 국제시장에서 사료곡물을 확보하거나 수입하는 거래방법도 안 개 속을 헤치듯 하였지만 여기서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양돈농가들 의 시장대응능력이 너무나 원시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예를 70년대의 양돈파동에서 찾아 다시 반성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양돈경기는 총괄적으로 말할 때 대체로 사료곡물의 수입 가격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적 흉작으로 국제 사료 곡물 가격이 폭등할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흉작이 아니라도 미국의 카길 등 세계 5대 곡물메이저들이 담합하거나 농간을 부려 가격이 오를 때에는 대체로 불황이었다. 그렇다고 반대로 국제 사료곡물 가격이 하락 할 때에는 국내의 양돈경기가 호황이었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 다. 여러 가지 국내적 요인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구 북반구의 옥수수 수확이 끝난 1975년 10월의 국제 옥수수 가격은 톤당 146달러였다. 1년 후인 ’76년 10월의 가격은 톤당 25%가 하락한 109달러였고, 2년 뒤인 ’77년 10월에는 34%가 떨 어진 93달러였다. 이렇게 되면 국내 배합사료 가격은 매우 안정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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