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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우역사(牛疫史)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12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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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자 실록을 보면 “매도(煤島) 목장에 큰 호랑이가 침입하여 국마 (國馬)를 상하게 하였다. 이 무렵엔 외딴섬에도 호랑이가 있었던 모양이 다. 강화부사가 호랑이를 포획하니 태종이 상을 주었다.”고 되어 있다.

상은 호랑이를 잡아 국마를 보호한 공로 때문이다.

이상 조선초기의 마소의 종축확보와 증식, 그리고 보호에 대하여 요 약하였다. 그 방법은 비록 현대에 비하여 미숙한 점이 있으나 그 생각(사 상)의 방향은 현재와 다를 바 없다. 문명을 향한 사고의 방향은 예나 지 금이나 다름이 없다. 다만 얼마나 더 과학적이냐 하는 차이 뿐이다.

이 글은 강면희(姜冕熙)가 실록에서 축정부분을 초록하고 번역하여 1973년 고대(高大) 농림논총 제13집에 게재한 내용을 필자가 체계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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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면역성이 있는 초원지대에서도 50~60%가 폐사하기 때문이다. 우 역은 주로 소의 역병이지만 양(羊)이나 돼지 등 발톱이 두 개인 우제류 (偶蹄類)에도 이병되나 말만은 이 병에 이병되지 않는다.

이 우역의 주된 발생계절은 봄이며, 가을에도 발생하나 여름과 겨울 에는 적게 발생한다. 이 병의 바이러스는 약간 건조한 층(層)에서는 55~60℃에서 한 시간이면 죽으나 습윤한 조직에서는 상온하에서 수주 간에서 일개월 남짓 생존한다. 감염경로는 코를 통한 호흡기 점막이 직 접적 이병경로이나 때로는 오염된 사료를 통한 간접적 이병의 경우도 있 다. 이병된 증상은 체온이 40~42℃로 오르고 눈이 충혈 되어 눈물이 흐 르며 코는 충혈 되고 콧물이 흐른다. 입안 전체가 충혈 되고 물집이 생기 며 식욕은 없는데 심한 갈증으로 계속 물을 마시고 떨며 점액성 혈액의 심한 설사를 계속하다 급격하게 쇠약하면서 호흡곤란중 수일 내에 폐사 한다. 우역으로 인한 세계적 피해는 유럽에서 18세기 초부터 1882년까 지 1억 8천만 두의 소가 폐사하여 심각한 식량난을 가져왔다. 1762년 세계최초로 불란서 리온에 수의전문학교(초기에는 소 전문)가 설립되어 방역기술을 개발해 오다가 19세기 중기부터 예방접종에 관한 연구가 비 롯되어 면역혈청이나 백신을 개발하면서 20세기에 이르자 우역의 세계 적 발생은 온전히 종식되었다.

우리나라 우역에 관한 첫 기록은 고려사에 고려 인종(仁宗) 20년 (1142) 10월 “서남로(西南路) 주군(州郡)의 마소에 역병이 들어 일관(日 官 천문담당관)을 보내 기양(祈禳)하였다.”는 게 사상 첫 기록이다. 그러 나 말에도 이병되었다는 면에서 이것이 우역인지는 의심스럽다. 또 같은 고려사에 충열왕 5년(1279) 12월 “경상도에 우역이 발생, 백정의 손을 빌어 도축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탄저(炭疽)로 믿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정종(定宗) 원년(1399) 4월 신편집성마의방 우의방(新 編集成馬醫方 牛醫方 서문 房士良)이 간행되었는바 우의방의 온역문(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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疫門)의 내용으로 보아 우역이 이시기에 발생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종 36년(1541) 2월조에 “평안도의 소가 병으로 4,106두나 죽었다. 황해도도 또한 그러하였다.” 하였고 11월조에 “평안 도 소가 병사한 내용은 8월 17일 보고 후 모두 1,909두이며 서울에서는 많은 돼지가 죽었다.”고 되어 있다.

같은 1541년 11월 그 대책으로 “우양저염역병치료방(牛羊猪染疫病治 療方 서문 權應昌)이라는 수의서를 간행, 각도에 반포”하였고 12월의 실 록에 “강원도 각지의 관축(官畜)인 돼지와 함경도 각지의 관우(官牛)가 많이 폐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조선에서 대 발생한 우역의 첫 번째 기록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선조 10년(1577), 이 해에 “팔도에 크게 역병이 발생하였는데 평안도와 함경도가 더욱 심하였고 마소 또한 역병으로 죽어 소가 없자 농부들은 인력(人力)으로 농지를 갈았다.”고 되 어있다. 선조 11년(1578)의 실록에는 “우역의 대 발생으로 가정 20년 (嘉靖 1541) 편찬한 언해우마치료방(諺解牛馬治療方)이라는 수의서를 다시 발간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두 번째의 우역대 발생으로 제1회 이후 37년 만의 대 발생이다.

또, 인조실록에는 인조 14년(1636) 6월 “여름에 평안도와 황해도에 우역이 크게 발생하였다.” 하였고 7월에는 “우역이 계속 퍼져 경기를 거 쳐 호서(충청)에 파급되었는데 이것이 백여 년 간에 세 번째 발생한 우역 의 대 발생이다.

이 해 9월에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을 중간(重 刊)하였는데 이 세 번째의 우역대 발생은 제2회 발생 후 58년만의 일로 평안 황해에서 경기를 거쳐 충청도로 전파된 것이다.

인조 22년(1644)에 간행된 우역방(牛疫方)에 쓴 이식(李植)의 후발(後 跋)에 “인조 15년(1637)과 16년 우역이 치열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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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우역으로 소가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자 인조 16년(1638)의 실록에 는 “비변사의 랑관 성익(成釴) 일행을 몽고에 보내 181두의 소를 구입해 와 평안도 각 군현에 배부하였다.”고 되어있다. 또 같은 이식의 후발에 인조 22년(1644) “우역이 발생하였다.”는 기록과 12월 「우마양저염역 병치료방」에 새로 개발된 약간의 처방을 보태어 교서관(校書館)에서 이 를 인쇄, 각 고을에 배부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네 번째의 우역 대발생으 로 제3회 발생 후 7~8년만의 발생이다. 이를 병자호란의 여독으로 재연 된 것이라고 본다면 앞에 발생한 세 번째 대 발생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 간행된 우역방(牛疫方)은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을 증보한 4판(版)에 해당한다.

인조 23년(1645)의 인조실록에 함경도 감사가 보고하기를 “중국 동 북부에 위치한 영고탑(寧古塔)에 우역이 우심하여 함경북도 북단에 위치 한 온성(穩城)의 우시장을 철시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국경인 두만 강을 우역 방호선으로 한 첫 기록이다.

현종 4년(1663) 6월의 실록에 “제사에 쓰는 검은 소가 갑자기 폐사하 자 다른 소들도 계속 죽어 겨우 7두만 남았는데 우역 때문이다.” 하였고 10월의 실록에 “황해도에 우역이 크게 발생, 관에서 기르는 돼지까지 폐 사 하였다.” 하였으며 12월의 실록에는 “강원도에 우역이 크게 발생하 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종 7년(1666) 12월의 실록에는 “전라도에 염병(癘疫)이 크게 번지 고 우역도 발생하여 인축(人畜)이 심히 많이 죽었다.” 하였고 현종 9년 (1668) 5월의 실록에 “함경도의 마소에 역병이 크게 발생, 전후 폐사한 수가 18,100여두라고 하는 감사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9월의 실록 에는 “전후의 마소폐사수가 2만여 두”라고 되어있다. 이때의 우역은 다 섯 번째의 우역창궐로 이 해부터 현종 12년까지 4년간에 걸쳐 함경도에 서 전라도까지 번진 것이다. 이는 제4회째의 대 발생 후 약 32년만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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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인데 그 이후 우역병균은 전 조선에 퍼진 것이다.

현종 10년(1669) 10월의 실록에 “충청도에 우역이 크게 발생하였 다.” 하였고 “이 해에 마역(馬疫)도 발생하여 말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 는 마조제(馬祖祭)를 올렸다.”는 것이다.

현종 11년(1670) 8월의 실록을 보면 “황해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한 달 사이 2,600여두가 폐사하였는데 경기 강원 충청도에도 번져 소가 모 두 폐사하였다는 보고가 매일 이어졌다.”고 되어있다.

현종 12년(1671) 정월의 실록에는 “황해도에 염병과 우역이 함께 발 생하였다.” 하였고 “경상도에도 염병이 발생하면서 우역이 크게 번졌 다.”고 되어 있으며, 6월의 실록에는 “영호남에 우역과 가축의 역병이 겹 쳐 폐사한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8월의 실록에도 “경상도의 우 역으로 폐사한 소의 수가 6,820두”라 기록되었다. 또 “강원도 355두, 충 청도는 779두, 전라도의 장흥 등 17개 군현에서 한 달 새 우역으로 폐사 한 수는 1,039두”라고 되어 있는데 이들의 우역은 4년 전부터의 연속이 라 풀이된다.

숙종 6년(1680) 윤8월의 실록에는 “우역이 심히 치열하게 번져 폐사한 소가 심히 많다.”하였고 10월의 기록에는 “전라도에 폐사한 소가 4,100 여두”라 하였다. 이 우역은 여섯 번째의 큰 우역으로 5회 이후 11~12년 만의 큰 우역이다. 이로 보아 조선에서의 우역은 대체로 10년 간격이 5~6년 간격으로 잦아지다 2~3년 간격으로 다시 더 잦아져 마침내 우역 상재(常在)지역이 된 것이다.

숙종 8년(1682) 11월의 실록에 “각도의 관찰사가 보고한 내용을 보 면 우역으로 폐사한 소가 모두 1만여두”라고 기록되어 있고, 숙종 9년 (1683) 2월의 실록에 “황해도 관찰사가 보고한 내용은 옹진 등 7개 군 현에서 우역으로 폐사한 소의 수가 모두 140여두”라 하였다. 또 윤6월 의 실록에는 “제주도의 우역으로 인해 폐사한 소가 1만여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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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0년(1684) 2월의 실록에는 “관서(평안도와 황해북부)지방에 우역이 크게 발생, 전년 12월 이후 수개월 사이 숙천(肅川) 등 30개 군현 에 밭갈이용 소 3,749두가 폐사하였다.” 하였고 “함경도는 안변 등 5개 군현에서 농사지을 소 600여두가 폐사하였다.”고 한다. 4월의 실록에는

“태천(泰川) 등 24개 군현에 우역이 크게 번져 폐사한 소가 전후 1,950 여두”라 하였고 5월의 실록에는 “평안도는 우역으로 1,600여두가 폐사 하였다.” 한다. 전 조선 각지에 퍼진 역병의 발생으로 숙종 8년부터 3년 간 계속 발생한 것이라 이를 일곱 번째의 대 발생으로 볼 수 있다.

숙종 16년(1690) 10월의 실록에는 “경기도에서 우역으로 5백여 두의 소가 폐사하였다.” 하였고 11월의 실록에는 “경기도에서 우역으로 폐사 한 소가 1,700여두”라 하였다.

숙종 19년(1693) 5월의 실록에는 “종성(鍾城)도호부의 소 240두가 우역으로 폐사하였다.” 하였고, 숙종 27년(1701) 12월의 실록에는 “평 안도에 우역이 치열하게 번져 소가 계속 죽고 있다.” 하였으며, 숙종 43 년(1717) 2월의 실록에 “경상도의 우역으로 폐사한 소가 3,700여두”라 되어있다. 숙종 44년(1718) 12월의 실록에는 “경상도의 우역으로 폐사 한 소가 130여두”라 하였는데 이상의 숫자는 각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 한 숫자로 진작 병독은 전국적으로 확대 상재하여 이무렵 면역성을 가진 소도 일부 존재할 수 있다고 이해된다.

영조 14년(1738) 2월의 실록에는 “북관(北關 함경도)에 우역이 크게 치열하여 청(淸)나라와 무역코자 하였던 소 600두 중 550여두가 폐사하 였다.” 하였고 영조 23년(1747) 5월의 실록에는 “평안도에 염병과 우역 이 한때 만연하여 사망자와 폐사한 소가 심히 많았다.” 하였으며 11월의 실록에는 “가을에 이르러 우역이 점점 치열하게 번지더니 한 달 사이 1,000여두의 소가 폐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 25년(1749) 9월의 실록에는 “우역이 치성하여 소의 도축을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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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제사를 지내 우역이 물러나기를 빌었다. 이로서 마단(馬壇) 내에 소 의 목신(牧神)의 위패도 새로 설정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개 조항은 서로 연결된 것으로 평안도→황해도→경기도의 경 로로 퍼져 영조 23년 초여름에 시작하여 한여름에 소강상태가 되더니 가을에 이르러 다시 치열해 졌는데 이는 우역 유행의 계절성과 일치하는 발생양상이다.

영조 39년(1763) 12월의 실록에는 “호남에 우역이 창궐하여 1만여두 의 소가 폐사하자 장차 소의 부족을 염려하여 각도에 도축(屠畜)을 금하 도록 명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종 8년(1871)까지 백여 년 간 실록상 의 우역발생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아마도 기록 누락이 거나 발생정도가 미미한데서 원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고종 8년 시베리아로부터 전파된 우역이 조선에서 발생한 후 십여 년 간 기록이 없다가 주한미국공사 알렌(N.H.Allen 의사를 겸함)은 고종 22년(1855) 9월 서울에 우역이 유행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고종 29년(1892) 31년, 32년에도 우역이 크게 발생하였다 한다. 또, 광무 6 년(1902)에는 경상도 중심으로 우역이 발생하고 광무 7년(1903)에는 전 조선에 우역이 크게 발생하였다고 한다. 융희 2년(1908)의 조선가축 위생통계에는 597두, 1909년 1,221두, 1910년에는 92두가 폐사 하였 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이후 1931년까지도 매년 발생하였으나 1920 년 1,144두의 폐사를 제외하면 다른 년도에는 모두 백 단위 이하의 젖 소 폐사 수를 계속하다 1932년부터는 조선에서 우역이 완전히 사라졌 다. 이상으로 조선에서 우역발생의 대강을 개관하였다.

왕조실록에 기록된 우역으로 인한 소의 폐사 수를 통산하면 모두 10 만 7,567두이나 아마도 기록 누락이 이 수치의 몇 배가 되지 않을까 추 정된다. 여기에 일제강점기에 폐사한 4,691두를 합치면 통계에 나타난 수만도 무려 11만 2,258두나 된다. 소가 폐사하면 그 자체로 농가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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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이 크지만 2차로 밭갈이를 못해서 오는 손실이 더 크게 된다.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금양잡록(衿陽雜錄)에서 큰 소 1두의 노력은 장정 9명의 노력과 같다 하였다. 이로 보면 임원경제지(林園經濟 志)에서 말하는 농사의 5해(五害 한해, 수해, 풍해, 병해, 충해) 못지않게 소의 역병도 농민을 울리는 큰 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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